〈 512화 〉 512화. 휴전 (2)
* * *
"…."
아이리스 길드 한국 지부의 조사원, 김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정면을 바라봤다.
아주 잠깐이었다.
빅토리아 공원을 습격한 마인들은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대처하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결계를 펼쳤다.
결계 내부에서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고, S급 마인이 포함된 습격자들에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되었다.
그게 약 한 시간 전.
고문이나 죽음. 운 좋으면 포로가 되는 것만을 기다리던 김태현은 마인들에게 구타당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뜬 지금, 마인들이 하늘로 날아가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저 생도는 대체 정체가 뭐지?
콱. 콱.
이호연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어두운 마력이 마인들을 휘젓고, 그 강한 마인들이 하나 씩 뒤로 날아가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모, 목표가 마력 무효화 결계를 뚫고 있습니다!"
마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호연의 마력은 자아라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공격과 방어를 해내며 마인들을 압박했다.
"이런 씨발… 어떻게든 해봐!"
케서스는 눈앞까지 다가온 이호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호연이 마력을 끌어올렸을 때도 당황했지만, 그 후로 이어지는 마법 세례는 대처도 불가능했다.
몇십 명이나 되던 마인이 머릿수로 밀어붙였지만 이호연은 혼자서도 몇 십명 분의 마법을 쏟아냈다.
결국 믿었던 마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어느새 자신과 보좌관 단 둘만 남았다.
"그래. 나도 가끔은 스트레스 풀어야지. 고생했다."
천천히 걸어온 이호연은 마력을 담은 주먹으로 케서스의 옆에 서있던 보좌관의 배를 후려쳤다.
보좌관은 케서스를 보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커흑…."
"이, 이 개새끼가…."
"시끄러워. 지금 바쁘다고."
"끄아악!"
케서스를 걷어찬 이호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마인들이 모여있던 공간 뒤 쪽에 쪼르르 모여있는 아이리스 길드원들.
다행히 루시퍼의 말대로 모두 살아있었다.
이호연은 그 쪽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다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금방 풀어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호연은 마력 밧줄을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 간부에게 통제권이 있겠지. 루시퍼의 명령대로 죽지않게 잘 보호해놓은 것 같다.
'근데 결계에서 마력을 쓰는 걸 보여버렸네.'
포로들은 당연히 정신을 잃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중 몇 명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신경 쓸걸.
이호연은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케서스에게 걸어갔다.
"넌 이름이 뭐냐? 본 적이 없는 마인이네."
"케서스다. 죽여라. 이호연."
"내 이름은 아는구나. 케서스. 우리 좋게 좋게 가자. 루시퍼랑 여기 있던 이유가 뭐야? 그것만 알아내면 편하게 보내줄게."
"어차피 죽을 텐데 말해줄 이유는 없지."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저 말이 맞긴 하다. 어차피 죽을 거면 굳이 적에게 도움되는 행동은 안 하는 게 맞지.
하지만 방금 전까지 쌍욕을 하던 놈이 죽기 직전에 부처라도 된 것마냥 초연해진 게 마음에 안 든다.
이호연은 캐서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얇은 결계를 펼쳤다.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보고 있지 않다면 곧바로 싸커 킥을 날렸겠지만, 뒤에는 시선이 있었다.
마력 무효화 결계를 뚫어낸 건 어떻게 변명한다 쳐도 인성 부분은 감추는 게 낫겠지.
빡.
결계를 친 이호연은 곧바로 케서스의 관자놀이를 후렸다.
"끄아악!"
"따라 해 봐. 투 아르마 마에스트로"
"무슨 짓이냐!"
"뒤지게 맞다 보면 말하고 싶어 질 거야."
아이린의 집에서 빅토리아 공원까지는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전투에 걸린 시간까지 생각하면 5분도 남지 않았다.
약 3분 뒤.
의외로 고문은 금방 끝났다.
"루, 루시퍼 님이 빅토리아 공원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
"그 외에 아는 건 없고?"
"예… 옙… 으악…."
이호연은 주먹을 들 때마다 몸을 움츠리는 케서스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세뇌어를 말한 케서스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이호연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마음이 약한 마인이 세뇌에 걸렸다고 그런 미친놈이 되다니.
마에스트로 그 자식도 대단한 놈이었다.
"마인의 도움 없이 풀었다면 처음부터 호연 생도가 풀어줄 수 있었던 게…."
"예? 뭐라고요?"
"아, 아닙니다…."
고문이 끝난 뒤, 아이리스 길드원을 풀어준 이호연은 검은 기둥이 있는 광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땀에 젖은 채 산발이 된 금발과 단추가 몇 개 풀린 와이셔츠가 보인다.
엄청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아이린 씨. 왔어요?"
"으응. 하아… 괜찮아? 혹시나 해서 한국 지부에도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미 다 끝난 모양이네."
아이린은 쓰러진 마인들과 서로를 부축하는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는 것 같았다.
"다들 같이 있었는데 혼자 왔네요?"
이호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자들이 단체로 올까 봐 더욱 빠르게 처리한 건데 의외로 공원에는 아이린 혼자 나타났다.
"어… 응."
아이린도 다 데려올까 고민을 안 한 건 아니다.
긴급 신호는 정말 긴급한 상황에만 누르기로 약속했으니, 강한 전력을 데려가는 게 맞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 시각 엘리스는 스칼렛과 레베카 사이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주일간 집에서 합숙…? 애기 아빠가 허락했다고?
네. 설마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셔 놓고 이제 와서 거절하는 건 말도 안 되겠죠? 동거를 일주일보다는 오래 하셨을테니까요.
… 엘리스 양은 머리가 좋네.
일주일은 긴 시간이다.
이호연이 집으로 온다면, 그만큼 같이 잘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렇다면 엘리스와 아이린이 같이 자는 시간도 오겠지.
'그걸 막을 순 없었어.'
짧은 순간에 엄청난 고민을 한 아이린은 결국 엘리스의 대화를 막는 것보다 혼자 출동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을 나눠야 했다.
일주일은 아이린에게도 큰 기회였으니까.
"다들 엄청나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방해할 수가 없었거든. 그냥 나 혼자 왔어."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였어요? 궁금하네."
"응…. 그랬지."
이호연이 들으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린에겐 중요한 이야기였다.
엘리스와 사랑도 나누고 싶었고, 이호연의 자지도 느끼고 싶었다.
둘 다 아이린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크흠.
아이린은 빨리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어? 다행히 다들 안 다친 것 같은데. 마인들이 쓰러져있는 걸 보면 습격?"
"맞아요. 마인들의 습격이었어요. 아이리스 길드원들은 저기 구해놨고… 루시퍼는 도망쳤어요."
"루시퍼가 왔었다고? 여기에?"
"네. 빅토리아 공원에 볼일이 있다던데, 금방 사라지긴 했어요."
"…그건 큰 일이네. 빅토리아 공원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다시 조사해봐야겠다."
"…."
진지한 표정의 아이린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심장이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가짜 던전 마법진?'
빅토리아 공원에 숨겨진 것?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것이었다.
너무 완벽하게 숨겨놔서 안심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루시퍼였다.
이호연은 루시퍼의 마안을 벗어난다.
하지만 자신의 마법진이 루시퍼의 마안에도 벗어날 수 있을까?
"… 아이린 씨. 아이리스 길드원들 좀 챙겨주세요. 잠시 체크해볼 게 있어서요."
"으응? 지금?"
"네. 잠시만요."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린을 내버려 둔 채 가짜 던전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루시퍼를 만날 가능성을 생각해 룬의 결계까지 잊지 않았다.
"진짜 안되는데…."
괜히 불안감이 앞선다.
가짜 던전 마법진을 감춰놓은 곳에 도착한 이호연은 마법진을 점검했다.
다행히도 결과는 이상 없음.
"… 이게 아니면 공원에 들를 이유가 뭐지?"
검은 기둥?
빅토리아 공원에 있는 기둥은 이호연이 소환한 검은 기둥이지만, 루시퍼가 이걸 특별 취급할 이유가 있을까?
"머리 아프긴 한데… 최악은 아니야."
이호연은 다시 한번 꼼꼼히 마법진을 훑었다.
누군가 건드린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안심한 이호연은 검은 기둥이 있는 광장으로 돌아왔다.
광장에는 길드원을 챙기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김태현 씨. 괜찮아?"
"옙. 괜찮습니다. 1 팀장 님."
"곧 한국 지부장이 올 테니까 자세한 보고는 그쪽에 해.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한국 지부원들은 이상하게 한국 지부장을 무서워하네.
물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아이린은 길드원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의료팀에 보낼 인원을 선발했다.
그때, 가까이 온 이호연이 보였다.
"응? 벌써 왔네. 뭐하고 왔어?"
그는 아이린의 말에 머쓱하게 웃었다.
"왠지 켕기는 게 있어서 체크하고 왔어요.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흐으음. 그래? 그럼 돌아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가장 신경 쓰게 한다는 걸 모르는 구나.
아이린은 이호연의 말을 기억에 새겼다.
"네. 엘리스의 집에 아직 다들 모여있죠? 이제 슬슬 얘기도 끝났을 거 같은데."
"아… 잠시만."
아이린은 집에서 나올 때 그녀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지금 이호연을 집에 들였다가는 일주일 합숙 계획이 흐지부지 될지도 모른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
"네? 왜요?"
"중요한 얘기 중이라니까.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나중에 와."
"하지만 저랑 상관있는 거 아니에요? 아이린 씨랑 같이 들어가면서 루시퍼 얘기도 좀 하면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내가 마무리해줄게. 너는 집으로 돌아가 있어."
"…."
이호연은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싶었지만, 아이린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다른 여자들이 걱정되긴 해도 아이린은 애가 아니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없어야 대화가 더 잘 될 거라 판단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알겠어요. 그럼 집에 갈 테니까, 나중에 무슨 대화를 했는지 슬쩍 알려주세요."
"그래. 내가 전해줄게."
이호연은 그제야 안심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아이린은, 이호연이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죽겠네 정말…."
사실 아이린은 이호연을 싫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했던 나쁜 짓 정도는 엘리스를 보면 모두 용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 복잡한 여자관계는 고쳤으면 좋겠네.'
그것만 아니었어도 참 좋은 남자였을텐데.
아이린은 아쉬움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아이린 님! 죄송합니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음. 괜찮아. 지부장. 여기 좀 맡아줘. 마인의 습격이래."
"알겠습니다. 너희들. 왜 다들 이런 꼴이야?! 빨리 설명해봐!"
뒤처리를 강효린 박사에게 맡긴 아이린은 공원을 빠져나오며 집으로 향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엘리스를 응원해야한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온다.
아이린은 거의 달려가듯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