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11화 (511/648)

〈 511화 〉 511화. 휴전

* * *

엘리스의 집 안, 거실.

사람이 6명이나 있는 거실은 고요했다.

딸깍딸깍 움직이는 벽시계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

"…."

이 분위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스는 입맛을 다시며 스칼렛을 바라봤다.

이호연이 나간 뒤 여자들을 모은 사람이 스칼렛이었다.

"스칼렛, 네가 남으라고 했으면 말을 꺼내야지. 아니, 이제 스칼렛 씨라고 부를까?"

"편하게 부르시죠. 엘리스 님."

"알겠어. 스칼렛. 하고 싶은 말은 뭐야?"

"사과와 변명을 하려고 합니다."

"변명?"

"아이리스 길드에 있던 시절, 엘리스 님에게 임무를 받았을 때는 호연 님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엘리스 님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 한 번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엘리스에게 이호연과 관계가 들키게 되면 하고싶은 말이었다.

이호연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는 건 방지해야했다.

"하지만 감시 대상에게 정을 준 것도 제 잘못. 죄책감에 아이리스 길드를 나왔지만 이제라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엘리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스칼렛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이 이호연과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고, 이호연을 감시하라는 엘리스의 명령을 이호연과 공유하며 엘리스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낮았다.

아이리스 길드는 정보 길드인 만큼, 길드원의 관리는 기본이다.

스칼렛이 이호연과 접점이 없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엄청난 능력으로 관계를 숨기고 있다는 가정보다는 이호연과 관계가 발전해 자연스럽게 아이리스 길드를 나오게 된 게 타당한 추측이겠지.

"그런 오해는 안 하니까 걱정 마. 스칼렛이 일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어."

"감사합니다."

"그 다음은이호연이 잘못했겠지. 보이는 여자마다 다 꼬시는 게 잘못이야."

"그건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호연의 바람둥이 기질은 스칼렛도 부정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스칼렛,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예."

"네가 나보다 빨랐어?"

스칼렛은 엘리스의 말에 잠깐 고민했다.

무엇이 빠르다는 걸까.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고민은 짧았다.

"… 아마 아닐 겁니다."

이호연과 관련된 일 중 스칼렛이 엘리스보다 빠른 건 없었다.

릴리아나와 섹스를 직관하기.

같은 건 빨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물어본 건 아닐 테니까.

"내 명령을 듣기 전까지 이호연의 얼굴도 몰랐던 거고?"

"맞습니다."

"흐음… 그래. 지난 얘기는 그만하자."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엘리스는 괜히 만족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 얘기를 해볼게. 사실 여러분들이 이호연의 집에 있는 건 좀 전부터 알고있었어요. 특히 릴리아나 씨는 예전부터 알았고요. 섹시 서큐버스 님이죠?"

"오, 혹시 내 팬이야? 사인해줄까?"

"… 그건 괜찮습니다."

엘리스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팬을 꺼내는 릴리아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호연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그는 본래 남에게 잘 휘둘린다.

동거를 하고 있는 이유도 별 거 아닐 가능성이 높다.

스칼렛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호연과 친해졌고,당신 때문에 아이리스 길드에서 나왔다는 스칼렛의 말에 그대로 집에서 지내라고 하지 않았을까.

남다은도 마찬가지.

바이어 길드 사건이 해결되고 지낼 곳이 없었던 남다은이 여동생과 함께 이호연에게 달라붙었을 거다.

'… 그럼 릴리아나랑 레베카는?'

엘리스는 그 둘의 사정은 잘 모른다.

하지만 스칼렛과 남다은. 이 둘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이유가 중요하진 않아.'

이호연과 같이 지낸다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이호연이 저 넷을 편애해서 집에 데려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두 스칼렛처럼 지낼 곳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된 거겠지.

매력이 기준이라면 엘리스가 빠질 이유가 없으니까.

"… 다은아."

"응. 엘리스."

엘리스는 스칼렛과 대화를 빤히 바라보는 남다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 남다은에게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남다은과 대화를 몇 번 정도 했지만, 그때마다 엘리스와 남다은은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호연이 집에서 여동생과 같이 지내는 거지?"

"맞아. 바이어 길드에서 탈출한 이후로 신세를 지고 있어."

역시나 엘리스의 예상대로였다.

엘리스는 남다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이해해?"

"응."

"지금은 어때. 아직도 마음은 안 바뀌었어?"

"… 아무리 생각해도 난 호연이 뒤가 좋아. 이건 바뀌지 않아."

이호연이 중심인 남다은과 자기 자신이 중심인 엘리스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남다은은 자신과 여동생의 인생을 바꿔준 이호연에게 진 빚을 평생 갚을 생각이었고, 엘리스는 좋아하는 남자를 차지하고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답답하다는 말을 해도 안 듣겠네."

"미안해."

"바보같이 사과는 또 왜 하는데…."

엘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남다은을 경쟁자라고 생각하려 해도 긴장감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연약한 여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다.

"엘리스 너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는 호연이가 필요해. 단지 그것뿐이야. 그 옆에 누가 있든, 몇 명이나 있든 상관없어. 나는 호연이 옆에 있을 테니까."

남다은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호연뿐.

여자가 몇 명인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런 조건은 두 번째였다.

"…."

엘리스는 남다은의 말에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이호연과 관련된 일이면 항상 이런 두통이 느껴진다.

그나마 감정기복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지.

이호연을 포기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이게 게임은 아니지만, 만약 승패를 나눈다면 이호연의 옆에 있는 게 승리고 이호연을 포기하는 게 패배다.

그렇다면 남다은처럼 행동하면 승리하는 것인가 패배하는 것인가.

엘리스는 알 수 없었다.

"… 그래. 나도 아예 이호연에게 떨어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렇다고 너희와 웃으며 친하게 지낼 순 없잖아."

"왜 안되는 거야? 난 호연이만 괜찮다면 엘리스랑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건…이상해."

엘리스는 여자들의 얼굴을 훑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영웅호색(???色)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는 자신의 능력이 올라갈수록 여자를 찾는다.

이건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본능이나 마찬가지.

엘리스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배웠다.

바람둥이는 오케이.

하지만 최우선은 언제나 자신 이어야 했다.

­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여유란다. 꽃에 벌들이 꼬여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야 하고,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줘야 해. 무슨 짓을 해도 저 사람의 남자를 빼앗을 수 없을 것 같은 여유를 느끼도록 말이야.

엘리스는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원하는 남자가 생기면 조기교육의 성과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겠지만, 이 여자들은 엘리스의 상식과 달랐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가장 사랑받고 싶은 것 또한 여자의 본능일 텐데, 이 여자들은 그런 본능이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호연의 태도도 엘리스가 원하는 것과 달랐으니 그녀의 상식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 아이린. 지금 무슨 상황이야?"

"우리 엘리스는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예쁘…응? 뭐라고?"

"엘리스가 저러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레베카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엘리스를 보며 아이린에게 슬쩍 다가갔다.

"당연한 거지. 엘리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니, 애초에 저 쪽이 정상이지. 너희가 비정상이잖아. 한 남자를 두고 여러 명이 그러는 게 어딨어."

"아이린 너도 애기 아빠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

아이린도 어느 새부터 이호연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거기엔 기분 좋은 섹스와 엘리스의 지분이 크지만, 지내다보니 엄청나게 나쁜 놈은 아니었다.

"그래? 음. 나도 엘리스하고 대화해도 괜찮지?"

"안될 건 없는데, 이상한 말을 하면 곧바로 막을 거야. 우리 엘리스를 더럽히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잘해볼게."

레베카가 이호연과 가까워진 이유는 룬의 일족의 복구였다.

물론 지금은 이호연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지만, 그녀도 이호연에게 여자가 몇이나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 마음가짐으로 엘리스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레베카는 판데믹에 있으며 마인들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마인들 대부분은 성격이 괴팍했기에자존심이 강한 사람과 대화는 레베카에게 누워서 떡먹기였다.

엘리스의 성격이 아무리 안좋아도 마인보다는 좋았으니까.

살살 긁는 척하면서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느새 이 쪽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

"엘리스 양.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 네?"

"엘리스 양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이호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건 엘리스 양도 마찬가지니까 잘 알겠지?"

"… 그렇겠죠."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들은 절대 이호연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여왕벌이라는 걸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아이리스 길드의 위세로 누르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특기인 암살로 우리를 노릴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이리스 길드의 힘을 사적으로 쓰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이호연을 차지하는 데에 경쟁자들을 무력으로 밀어내는 건 자신의 매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으니까.

"흐음. 엘리스 양 표정이 마음에 안 드네. 누가 보면 할 수 있는 데 봐주는 표정이잖아."

"아이리스 길드를 무시하지 마세요."

"엘리스 양. 아이리스 길드는 나도 존경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조금 더 유하게 지내자는 거지. 애기 아빠 성격 알잖아. 다른 여자랑 헤어지라고 눈물을 흘려도 안 헤어질 사람이야."

"… 그건 저주 때문이에요.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호연이가 애기 아빠인 건가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겠죠?"

레베카가 이호연을 부르는 호칭은 솔직히 많이 짜증 났다.

여보나 자기, 허니. 이런 것도 아니고 애기 아빠가 뭐야.

이미 결혼한 지 10년은 된 부부 같잖아.

"애기 아빠인 이유는 애기 아빠니까 그렇지. 맞아. 이렇게 된 김에 싸움보다 조금 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때. 저주에 관한 거나, 애기 아빠에 대한 얘기. "

"저도 저주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긴 합니다."

엘리스는 레베카의 템포에 말려들어 어느새 스칼렛과 레베카의 사이에 앉아있었고, 그 모습을 보던 남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아나와 말을 이어갔다.

"레베카 씨의 말솜씨가 대단하네요…."

"으음. 스카웃하고 둘이 항상 저런 식으로 나한테 일을 시킨다니까."

릴리아나는 스칼렛과 레베카의 대화를 지켜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저렇게 당해서 심부름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엔 절대 안당하겠다고 마음먹어도 금방 말려들곤 한다.

"그러고보니 릴리아나 씨는 질투심이 안 드세요?"

"매일 질투하고 있어. 아침에 팔을 깨물 때마다 깨무는 힘을 조금씩 늘리고 있거든."

"… 그건 눈치채기 힘들 것 같은데요."

릴리아나와 남다은도 단 둘이 대화를 이어갔고, 그 틈에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한 아이린만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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