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화 〉 510화. 루시퍼 (7)
* * *
빅토리아 공원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입구를 지났는데도 아이리스 길드는 보이지 않았고, 싸늘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 진짜 이상해.'
이호연은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이나 왔던 공원의 길에 아무도 없으니 어색한 건 당연했다.
"여기부터 인원들이 돌아다녀야 정상인데."
애초에 아무 저지 없이 공원에 들어온 것부터 이상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경계는 이렇게 허술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 확실해.'
스르륵.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펼친 채 높이 솟아있는 검은 기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 아이리스 길드원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싸늘한 기운이 이호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두근.
"뭔가 있긴 하네."
검은 기둥에 일정 거리 접근하자마자, 익숙한 전투 감각이 몸을 채운다.
강적을 만났을 때만큼 강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적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주변 마력이 너무 칙칙해. 마인인가?"
검은 기둥 주변에는 결계가 쳐져있었고,이호연의 예민한 감각은 미세한 마인의 향을 잡아냈다.
'마법진이나 확인하려 온 건데… 운도 더럽게 없네.'
마인의 습격이다.
습격을 당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은 기둥 근처에 있는 아이리스 길드원들은 모두 마인에게 당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검은 기둥 주변에서만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일까.
아이리스 길드원에게 작업을 들키지 않도록 검은 기둥과 가짜 던전 마법진은 꽤 먼 곳에 설치했으니 마인들의 목표가 자신의 마법진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발각될 가능성은 낮긴 한데….'
은신 작업에도 많은 투자를 해서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곧바로 아이린에게 연락을 했다가 가짜 던전 마법진이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최악이다.
'… 바로 연락 안했다가 길드원들이 위험해지면 어떡하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마인들의 특성상 생포했을 가능성은 낮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마인들의 움직임만 살펴볼까.
이호연은 검은 기둥을 향해 은밀하게 다가갔다.
"어?"
공원을 가로질러 검은 기둥에 다가가자, 이호연의 예상대로 마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인영이 하나 있었는데, 이호연은 그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숨겼다.
'루시퍼…?'
검은 턱시도와 머리 위에 솟은 악마의 뿔.
검은 기둥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짓누를 정도로 강한 위압까지.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저건 루시퍼였다.
'루시퍼가 왜 여기 있어?'
이호연은 룬의 결계에 마력을 집중하며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지옥의 마력과 융화된 룬의 결계는 루시퍼도 눈치채지 못했다.
예… 이제 어디로 가시는….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마인과 루시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긴장감에 침을 삼킨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주변 공기의 떨림을 잡아냈다.
이호연의 마력 감응력은 세계관에서도 최고 수준.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미세한 소리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쓸데없는 건 묻지 마라.
… 거의 끝났습니다. 다만 인간들은….
'개안'
루시퍼의 목소리는 나름 또렷하게 들렸지만, 루시퍼의 위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마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이호연은 개안으로 마인의 입모양까지 읽어내며 대화를 훔쳐 들었다.
무엇이냐.
루시퍼 님의 명령대로 모두 생포해놨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딱히 흥미로운 인간은 없더군. 처리는 마음대로 해라.
알겠습니다…!
히죽 미소를 짓는 마인을 보며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생포했다고?'
마인들이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생포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루시퍼의 성격을 고려하면 납득이 간다.
루시퍼는 기본적으로 완벽한 마왕이지만, 두 가지의 약점이 있다.
인간 세상의 멸망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흥미를 채우려 하는 그 성격과 마안에 대한 의존성.
원작의 주인공은 모든 조건이 루시퍼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당연히 이호연도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번에도 내가 마안에 보이지 않겠지.'
레베카의 기억에서 루시퍼는 릴리아나 말고도 이호연을 찾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자신에게 흥미가 생겼기 때문.
루시퍼는 어떤 행동을 하든 사전에 마안으로 위험성을 체크한다.
그의 마안은 세상 모든 만물을 간파할 수 있으니, 마안에 의거해 행동 방침을 정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이호연에게는 루시퍼의 마안이 통하지 않는다.
마안에 의존하는 루시퍼가 처음으로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으니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
원작에선 그 틈을 이용해 루시퍼를 공략한다.
'차라리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을텐데.'
루시퍼가 실제 마왕이 아니라 아쉬울 뿐이다.
이제 가야겠군. 뒤처리는 맡기마.
넵. 루시퍼 님…!
이호연은 마무리되어가는 대화에 집중하며 루시퍼의 등을 노려봤다.
스르륵
잠시 후 루시퍼의 몸이 허공에서 흩날리듯 사라졌다.
동시에 주변을 짓누르던 지옥의 마력이 약해졌다.
"… 어디로 간 거지?"
이호연은 루시퍼가 사라지는 걸 보자마자 스마트워치로 아이린에게 비상 연락 신호를 보냈다.
비상 신호라면 자신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 금방 이 쪽으로 오겠지.
남은 건 저 마인들뿐이다.
"저 새끼들이 알고 있으려나."
루시퍼의 행방과 사라진 아이리스 길드원들.
아이리스 길드원에겐 미안하지만, 이호연은 지금 루시퍼의 목표를 알아야했다.
이호연은 루시퍼의 마력에 주의하며 천천히 검은 기둥으로 다가갔다.
*
빅토리아 공원의 검은 기둥을 장악한 판데믹의 간부, 케서스.
그는 루시퍼가 사라지자마자 숙였던 허리를 들며 부하에게 말했다.
"이제 철수한다. 씨발… 뒤지겠네"
"옙. 알겠습니다!"
판데믹에게 루시퍼는 골칫거리나 마찬가지였다.
다행인 건 꼬리를 내린 자는 그나마 덜 건드린다는 것.
결국은 루시퍼의 기분에 따른다.
지금 검은 기둥을 장악한 것도 루시퍼의 명령 때문이었다.
"뭐 하는 지도 안 알려주고 부려먹기만 하네. 미친 새끼같으니라고."
케서스가 이렇게 뒷담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루시퍼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무조건 지킨다.
한 번 돌아간다고 말했으면 절대 오지 않는다.
"쯧…. 인간이라도 데리고 놀 수 있으니 다행인가."
그는 얼굴을 구긴 채 구석에 있는 인간들을 바라봤다.
온몸을 구속당한 채 마력을 봉인당한 인간 무리.
루시퍼에게 허락까지 맡았으니,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 된다.
"… 케서스 님."
"응?"
그때, 제일 앞에 있던 마인이 케서스를 불렀다.
한참 즐기려던 타이밍에 방해받은 케서스는 고개를 돌렸고.
스르륵
허공에 누군가의 형체가 생기는 걸 바라봤다.
"침, 침입자입니다!"
"침입자? 결계에 반응은 없었는데."
강한 마력을 내뿜는 이상할 정도로 잘생긴 인간 남자.
케서스는 순식간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 이호연입니다! 케서스님!"
"… 나도 알아."
이호연 마법사.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 주의해야 할 리스트 중 상위에 있는 인물이자 판데믹의 목표 1순위.
간부 한 명으로 상대하긴 위험한 인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루시퍼를 보조하기 위해 간부급인 자신을 비롯해 A급 마인 상당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루시퍼가 오기 전에 아이리스 길드를 제압한 판데믹의 비밀 병기.
마력 무효화 결계.
지금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케서스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쫄지마! 마력 무효화 결계가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너희도 출세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예!""
케서스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마인들도 하나둘씩 이호연의 주변을 둘러쌌다.
실제로 마력 무효화 결계 아래에서 아이리스 길드를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이호연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자신을 둘러싼 마인을 본 이호연은, 전투 감각이 천천히 올라오는 걸 느꼈다.
두근. 두근.
마인들의 표정은 거칠었지만, 이호연의 마음은 평안했다.
빠지지직
이호연을 둘러싼 마인 중 한 명을 중심으로 이질적인 기운이 퍼져나갔다.
"큭… 사냥 1순위인 천재 마법사 이호연을 잡을 기회가 오다니."
케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을 노려봤다.
자신의 마력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것이 마력 무효화 결계.
마인은 마력을 쓰지 못해도 괴물 같은 신체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호연은 평범한 인간.
수십 명의 마인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황은 너무나 완벽했다.
마법사를 상대로 마력 차단 결계를 펼친 순간,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
이호연은 눈을 찌푸린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력 무효화 결계.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문수린의 스토커였던 신동민이 사용했던 마력 무효화 결계.
그때 몸이 부서지도록 맞다가 죽기 직전에 문수린에게 구해졌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천재 마법사의 마법은 끝인데… 인간, 어떻게 할 거지?"
"이것도 추억이네."
지직. 지지직.
마력이 올라오지 않는 어색한 감각.
이걸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썼는지 모른다.
스칼렛과 근접전 훈련을 하기도 했고, 마법을 더욱 가다듬을 생각도 했었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력 차단 결계는 결국 인간을 기준으로 만든 것.
지금의 이호연에겐 전혀 다른 마력이 있었다.
"보고 있지 말고 죽여버려!"
간부 케서스를 중심으로 마인들이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자신들이 질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않는 움직임.
그 꼴을 지켜보던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땅을 짓밟았다.
우드드득.
"으윽?!"
이호연이 땅을 건드리자마자 칠흑같이 어두운 지옥의 마력이 솟아올랐다.
마력 차단 결계를 가볍게 밀어낸 지옥의 마력이 마천궁을 만들어냈고, 바닥에서 솟아오른 마력은 마인들의 다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되는… 마력 저항 결계에 대한 테스트는 이미 끝났을 텐데…!"
케서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테스트는 완벽했고, 인간이 이 결계를 뚫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거지?
눈 앞의 이호연에게서 루시퍼와 같은 마력이 흘러나오는 상황을 케서스는 평생 이해할 수 없었다.
"주제를 알아 새끼야."
이호연은 오랜만에 통쾌한 감정을 느꼈다.
몇 달 전의 이호연이라면 이 결계에 막혔을지도 모르지만, 지옥의 마력을 마스터한 이호연에겐 무리가 아니었다.
"내가 시간이 많이 없어. 곧 아이린 씨가 오거든."
이호연은 케서스에게 걸어가며 주먹에 마력을 담았다.
아이린이 오기 전에 필요한 정보는 다 뜯어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