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9화 〉 509화. 루시퍼 (6)
* * *
세계 곳곳에 있는 검은 기둥의 근처에는 진한 지옥의 마력이 흘러나온다.
지옥의 마력은 인간에게 극독인 마력이지만, 지옥 출신인 루시퍼에게는 고향이나 마찬가지.
루시퍼가 이곳을 은신처로 삼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스윽. 스르륵.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조용한 방 안에서 검은 턱시도를 챙겨 입은 루시퍼는 판데믹의 마인에게 조용히 명령을 전달했다.
"루시퍼 님. 지금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빅토리아 아카데미로 간다. 금방 돌아오지."
루시퍼의 목적은빅토리아 공원에서 봤던 이호연의 숨겨진 마법진.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생각이었다.
'탈취할 수만 있다면 이호연을 사로잡기 편해진다.'
이호연을 생포해 마안을 막아내는 비밀을 알아내야한다.
아쉽게도 처음에 봤을 때는 아직 마법진이 불완전했지만,시간도 지났고 몸의 회복도 끝났으니 확인할 시간이다.
"죄송합니다. 바깥이 조금… 시끄럽습니다."
"무슨 뜻이지?"
"협회에 꼬리를 잡힌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찾아왔습니다."
"흠…."
루시퍼는 턱시도의 단추를 채우며 눈을 찌푸렸다.
지옥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덤비는 자가 없었는데, 인간 세상에서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겪는다.
"내가 나가며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조사팀을 상대하기 위한 마인들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루시퍼가 결정했다면 그걸 따라야한다.
그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죽은 전번 마인들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담당 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루시퍼가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내가 크게 한 번 쏘지."
"무슨 소립니까 형님. 제가 사야죠."
헌터 협회의 마인 조사팀은 루시퍼의 은신처에 다가가고 있었다.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나라가 얼마 없었기에, 보통 가벼운 일 위주로 맡는 조사팀이지만 오늘은 난이도가 꽤 높았다.
"그거 보셨습니까. 이번에 조사하는 마인은 S급 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하라는데요."
"야. 저번에도 그랬고 저저번에도 그랬잖아. 높으신 분들 호들갑이 한두 번이냐?"
"역시 그렇겠죠…? 왠지 불안하네요."
"그래 임마. 긴장하지 말고 잘 따라와라."
남자는 불안한 듯 은신처가 적힌 지도를 노려봤지만, 그도 내심 언제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은신처가 아니라 일이 끝난 뒤 먹을 식사였다.
"조심해라. 이 주변부터 마력이 잘 안 먹히니까."
"… 알겠습니다."
"영상 송출 장치도 안 떨어뜨리게 잘 챙기고."
"목에 걸어놓고 있습니다."
협회 말고도 여러 기관에서 모인 조사팀이었기에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움직였다.
몇 시간 정도 주변을 살핀 기관의 대표들은 머리를 맞대고 조사 결과를 공유했다.
"이 주변인 건 분명한데… 검은 기둥 때문에 마력 반응이 안 잡힙니다."
"인력이 더 필요한 건가?"
"아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고급 인력으로 교체해오는 것이, …잠시만."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백발의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달라진 게 없었다.
선선한 바람과 언제나와 같은 땅.
하지만 느껴진다.
나무들이 웅성거리고 공기가 이곳을 떠나려고 발버둥 친다.
그 이질감을 깨달은 순간, 루시퍼는 인간들의 앞에 서있었다.
"마, 마인이다! 모두 전투 준비해!"
타다닥.
하지만 조사팀의 헌터들도 베테랑 중에 베테랑.
마인이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전투 대형을 잡은 그들은 루시퍼를 노려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추측되는 놈은?"
"붉게 빛나는 마안과 검은 턱시도. 그리고 불길한 마력까지, 루시퍼가 확실해 보입니다."
"루시퍼…!"
가장 고참인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처럼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오산이었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 중 최강.
'… 오늘 살아나갈 수 있을까.'
밥을 사기로 했는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루시퍼는 인간들을 평가하듯 훑은 후에,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옵니다!"
"상대의 특기는 마안! 눈을 노려보지 마라!"
루시퍼의 마안은 모든 걸 꿰뚫는 힘.
눈을 쳐다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커흑…!"
"이런 버러지들이 내 앞을 가로막다니,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야."
지옥과 전혀 다른 삶은 나름 흥미로웠다.
마안으로 확인한 결과 저 인간들의 힘은 루시퍼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한다.
자신들의 수준을 모르고 덤벼드는 모습은 불로 날아가는 나방 같았다.
촤르륵. 콰악!
"으아아아악!"
"도,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루시퍼는 자신의 신체능력을 활용해 조사팀을 하나하나 사냥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아닌 학살.
이런 품위 없는 행위는 자제하고 싶지만, 지금은 이 쪽이 더 효율적이다.
게다가 이런 버러지들에게 마력을 사용하는 건 루시퍼의 격이 떨어진다.
"씨발…."
루시퍼가 나타나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차원이 다르잖아…."
저벅. 저벅.
송출 장치를 목에 건 조사팀원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며 입술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두 동강난 조사팀의 최고참 헌터와 형체도 없이 사라진 헌터 협회의 A급 헌터.
루시퍼는 손에 들고있던 인간을 집어던지고,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지루한 듯 바닥을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다. 잠깐의 유희 정도는 됐어."
"신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딱 한 번만… 평생의 은혜를 지금 갚게 해 주십시오…."
"만약 이 세계에 신이라는 게 있다면 널 살려주는 건가. 재밌는 실험이 되겠군."
"제발… 하늘에 계신 아…."
꽈득.
루시퍼는 기도를 이어가는 남자의 머리를 짓밟았다.
당연하게도, 신은 반응하지않았다.
"뻔한 결과였나."
기분 나쁜 마력을 내뿜는 목걸이까지 부순 뒤에, 루시퍼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의 목표는 빅토리아 아카데미다.
*
파지지직
신호가 끊긴 카메라가 검은 화면을 송출한다.
"""…."""
"…."
한국의 여러 기관에서 소집했다는 조사팀.
그 조사팀의 조사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이호연과 여자들은 침묵에 빠졌다.
"저번에도 세긴했지만,루시퍼가 저렇게 강했었나?"
"네. 더욱 강해진 것 같아요."
릴리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화면을 바라봤고, 남다은도 상황은 비슷했다.
"저번처럼 공격하면 통할 것 같앙?"
"… 노력은 하겠지만 자신은 없어요."
루시퍼의 힘을 실감한 남다은은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한편 루시퍼를 처음으로 본 엘리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언니. 저게 말이 돼?"
"걱정 마. 엘리스. 내가 무슨 짓을 해줘도 지켜줄 테니까."
"나보다는 이호연을 지켜줘야 해."
"… 고맙다. 엘리스."
이호연은 끊어진 영상을 보며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저걸 어쩌지?'
세상에 저런 괴물이 어떻게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조용했던 분위기는 이제 거의 침울해졌다.
'… 이 분위기는 안 좋아.'
다행히 이호연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엘리스의 집에서 침울한 상태로 있는 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이린 씨. 저희는 일단 돌아갈까요?"
"으응. 조사팀을 다시 꾸려야 할 것 같아. 아니면 토벌팀을 구성할지도 몰라. 너무 강력한 적이지만, 오히려 애매하게 강한 것보단 저게 나아. 높으신 분들도 금방 정신을 차릴 테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후우.
한숨을 내쉰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스칼렛과 레베카를 바라봤다.
"집으로 돌아가요. 사실 엄청난 소식이 없어서 조금 김이 새긴 하지만… 활동을 시작했다는 정보도 중요하고,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정보는 금방 나올 것 같으니까요."
이호연은 사실 전투까지 준비하고 있었는데 루시퍼의 전투력을 보니 더 준비가 필요해 보였다.
최대한 시간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건 운에 달려있다.
"괜찮아. 우리한테는 엄청난 소식이 있었거든."
"네? 레베카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연 님,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먼저 쉬시죠."
"피곤하긴 한데, 너희들은?"
"저희는 남아서 집주인분들과 대화를 좀 하고 가겠습니다."
스칼렛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스와 아이린을 바라봤다.
엘리스도 지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저기, 혹시 싸우거나 하진 않을 거지? 혹시 감정을 쏟아낼 거면 나한테 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그래. 그냥 대화만 할 거야."
스칼렛과 엘리스는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선해 보였으니 싸울 걱정은 안해도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의 책임이 있는데 옆에서 같이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
"저기… 스칼렛 씨. 저도 같이 있나요?"
"당연하죠. 남다은 양도 호연 님의 하렘이니까요."
"하, 하렘…? 저는 그냥 호연이 옆에 있으면 되는데…."
"남다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호연을 가질 생각이면 진작 포기해."
"…!"
남다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반짝였다.
이곳은 전쟁터.
자신의 권리는 직접 쟁취해야 했다.
"엄청나게 진심인 여자들이야."
릴리아나는 여자들의 대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린은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고생했어. 다음에는 사적인 일로 불렀으면 좋겠네. 엘리스랑 같이 만나는 거면 더욱 좋고."
"그래도 제가 같이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스읍. 엘리스가 나가라는데 무슨 소리야.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 바로 옆 집인데 뭘 데려다줘요."
"그럼 혼자 가."
"…."
쾅.
아이린에게 밀려 거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실 문이 닫혔다.
이호연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집 밖으로 나왔다.
"… 이게 뭐야."
요즘 자신의 취급이 너무 안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저게 다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화를 낼 수도 없다.
사실 엘리스나 아이린, 스칼렛이나 레베카.
모두 지성인들이니 트러블이 생기진 않을테니 안심해도 괜찮다.
"집에 가기는 싫은데…. 뭔가 답답하단 말이야."
방금 본 루시퍼의 영상이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게다가 다들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텐데, 혼자만 집에서 누워있기도 뭐하다.
"빅토리아 공원에나 가볼까."
가짜 던전 마법진.
이걸 쓸지 말 지는 모르겠지만 체크는 할 필요가 있다.
만약 폐기하더라도 준비가 필요하니,마침 할 일이 없을 때에 처리해버릴까.
이호연은 집으로 가던 발을 돌려 빅토리아 아카데미로 향했다.
빅토리아 공원은 아이리스 길드가 관리하는 곳.
지금 시간대에도 지키는 사람이 있을 거다.
"응?"
빅토리아 공원에 도착한 이호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처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다.
몇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아 서로 얼굴까지 외운 사람이라 잊을리는 없는데.
'오늘은 공원을 지키지 않는 건가?'
하지만 검은 기둥은 여전히 우뚝 서있었고, 아이리스 길드가 조사를 멈출 이유는 없다.
"…."
이호연은 긴장감을 느꼈다.
입구를 지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안 쪽에도 인기척이 없다.
적어도 수 십 명이 있을 공원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아이린 씨에게 연락을…. 아니, 입구 쪽만 확인해볼까.'
아직 자신의 전투 감각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곧바로 대응해야하는 비상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니,이호연은 조심스럽게 공원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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