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504화. 루시퍼
* * *
짹짹.
쪼르르르.
일반적인 가정에서 들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새소리가 이호연의 잠을 깨웠다.
집의 마당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옆 집인 엘리스의 마당에서 나는 소리다.
"… 머리 아프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 셋이 같이 잤는데, 일어나 보니 옆 자리에는 레베카만 누워있었다.
이호연은 본능적으로 레베카의 볼을 쿡쿡 찔렀다.
"으응…."
"푹 자세요."
레베카의 머리를 쓸어 올려준 이호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제 격렬한 사랑을 나눴으니, 레베카는 좀 더 자려는 모양이다.
자신도 아직 몸의 피로가 풀리진 않았지만, 스칼렛이 일어났으니 나가서 인사라도 해줘야지.
거실로 나가자 예상대로 스칼렛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좋은 아침. 스칼렛."
"예. 이제야 일어나셨군요. 커피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부탁해."
스칼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커피를 내왔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어젯밤에 안 멈추길 잘했어.
이호연은 흐뭇한 표정으로 스칼렛을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 아무것도 아니야. 피곤하진 않나 해서."
"괜찮습니다. 어제는 일찍 잠들었으니까요."
홀짝.
스칼렛의 붉은 입술을 보니 어젯밤에 있던 일이 떠오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게 솔직히 많이 귀여웠는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면 분명히 맞겠지.
"호연아.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응. 다은이 너도 좋은 아침."
부엌에서 나온 남다은은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강아지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남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아침 곧 준비해줄게."
"항상 고마워."
"아니야. 호연이한테 해주는 거니까."
남다은이 돌아가고, 스칼렛도 그 뒤를 따라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사 준비를 도와줄 모양이다.
'새벽 감성 때문인가.'
혼자 남은 이호연은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어제 일들을 생각했다.
어젯밤에 창피한 말들이 엄청나게 오갔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깊은 대화를 나눈 건 기분이 좋네.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보며 할 일을 생각했다.
딱히 히로인들과 약속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은 있었다.
빅토리아 공원에 있는 가짜 던전 마법진의 점검이다.
'… 오늘은 진짜 가야 되는데.'
이미 완성단계인 마법진이라도 이틀 연속으로 마법진에서 손을 떼는 건 마법사로서 실격이나 마찬가지.
임솔이 알게 되면 화를 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호연은 어제 레베카와 스칼렛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진짜 폐기해버려?'
어젯밤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했다.
레베카와 스칼렛의 말은 이호연에게 비수로 박혔고, 모든 걸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부터 내가 나쁜 남자 이호연이 되었나.'
자신의 최선이 다른 여자들에게도 최선은 아니었다.
나름 노력은 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제는 잘못을 인지했으니, 바뀌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리고 꼬인 이유는 뭘까.
'처음부터 모든 걸 밝혔어야 했나?'
사실 처음부터 모든 걸 밝힌다는 선택이 맞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적당한 때에 밝히는 정도는 괜찮았을지 몰라도, 처음부터 밝혔다면 모든 히로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거다.
'분명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지?'
히로인들의 공략은 순조로웠고, 이호연도 이 세상을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턴가 그 일들이 '단순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현실이라는 걸 몇 번이나 자각해놓고 그렇게 변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다.
그러니 원인을 찾아야 한다.
"왜 그랬나 가 아니라… 왜 그래야만 했나."
타고난 심성이 처음부터 쓰레기고 원래부터 멍청한 놈이라는 가설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다.
「뚜렷한 정신력 」
▶ 특전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에서 굳건히 정신을 유지한다.
ㅡㅡㅡ
그리고 이호연이 생각해낸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뚜렷한 정신력].
이호연이 이 세계에 빙의하며 얻은 특전이다.
정신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특성 덕분에 이호연은 큰 감정 기복이 생기지 않고, 정신계 마법 면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별 생각없던 이 특전에 수상한 점이 있었다.
'중심'에서 굳건히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이 특전은 이호연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준다.
다르게 말하면, 이호연의 정신을 언제나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다면 중심이라는 게 뭘까.
만약 그 중심이라는 게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태도가 이상했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게임이 아니라고 인식하려해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 마치 처음 빙의했던 그때 처럼.
'특전을 의식적으로 없앨 수는 없는 건가?'
인간에게 꼬리를 움직여보라고 해도 그 감각을 모르니 시도할 수가 없는 것처럼, 특전을 없앨 방법을 모르겠으니 시도도 할 수가 없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그 때.
"피곤해애… 으어어…."
털썩.
좀비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릴리아나가 이호연의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 지금 일어난 거야?"
한참 진지한 고민 중이던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응…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커피나 마시고 있었지. 명상 좀 하면서."
"아항. 어제도 다 같이 훈련장에 가서 놀았잖아. 오늘은 나랑 놀아줘."
"훈련장은 놀러간 게 아니고 훈련하러 간 거야. 어제 레베카 씨랑 대련했거든."
"갑자기 대련은 왜?"
"레베카 씨가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고 싶다고 해서 도와줬지."
"그러고 보니 나한테도 도와달라구 했었어. 앞으로 옆에 붙어 다니기라도 해야 하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지옥의 마력이라고 해서 있어보이지만, 특별한 건 아니다.
그저 새로운 마력의 종류일 뿐이다.
하지만 새롭다는 게 중요했다.
마력은 공기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숨을 쉴 때 공기가 필요한 것 처럼 전투에는 마력이 필요하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마력이 들어간다.
상대가 가진 마력 패턴을 읽지 못했다면 당연히 대처도 느린 법이고, 지옥의 마력처럼 아예 궤가 다르다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당연히 그 반대도 마찬가지.
릴리아나도, 케이론도, 알베도도 똑같았다.
지옥 출신들은 모두 처음에는 힘이 약했다.
하지만 루시퍼는 달랐다.
"… 루시퍼는 원래 괴물처럼 강한 건가?"
레베카의 기억으로 봤던 루시퍼는 정말 강했다.
시간상 인간 세상에 적응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을 터.
물론 개체마다 적응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우연히 마침 루시퍼에게만 생긴 것도 이상했다.
"릴리아나. 너는 이제 지구의 마력이 익숙하지?"
"당연하지. 나는 여기 오래 있었잖앙."
사실 궁금한 것도 있었다.
인간들이 지옥의 마력에 꼼짝못하는 것 처럼, 지옥 출신 마수들도 인간 세상에 오면 힘을 펼치기 힘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검은 기둥이 생기며 그런 기준이 모호해졌지만… 여전히 의문은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인간은 지옥의 마력에 대처하는 게 힘들잖아? 근데 지옥 출신 마수들은 이상하게 적응이 빠른 것 같단 말이지. 서로 처음 겪어보는 거면 걔들도 힘들어해야 하는 거 아니냐?"
"처음이 아닌 가 보지. 바보야."
"응?"
"지옥에는 인간에 대한 정보가 많아. 인간 세상에 대한 드라마도 있고, 실제 인간 노예도 있어. 거기서 겪어본 거야."
"아…."
기억났다.
릴리아나가 처음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때, 인간 세상이 지옥에서 본 드라마보다 안 좋다는 감상을 남겼었다.
지옥에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망나니 계약서에 쓰여있는 루시퍼의 정보는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루시퍼'.
그라면 인간을 실제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근데 인간이 지옥에 어떻게 가는 거야?"
"글쎄…? 시공간이 뒤틀려서 우연히 떨어진다는데… 나도 잘 몰랑. 아마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만 주워다가 교배시키지않을까?"
"… 무서운 얘기네."
우연히 떨어진 인간 중에 외모가 뛰어난 사람만 노예로 만들고 나머지는 농장행인가?
너무 무서운 이야기잖아. 역시 지옥의 사정은 안 듣는게 좋다.
루시퍼는 마왕의 후계자 중에서도 서열 1위.
그만큼 인간을 접할 기회도 많았을 터, 적응이 빠른 게 당연하다.
케이론이나 알베도도 지옥에서 오랜 시간 살며 인간을 많이 겪어봤을 테니, 인간 세상의 마력에 당하지 않는 것이고.
'… 생각해보니 다른 애들한테도 적응시켜야겠네.'
레베카는 혼자서도 열심히 하는 우등생이지만, 다른 히로인들은 아직 루시퍼의 위험을 잘 모르고 있다.
"배고프다. 아, 오늘은 나랑 놀아주는 거야?"
"그래. 오늘은 놀아줄게."
"야호! 그럼 내 방송에 게스트로 나올래? 요즘 침체기야."
"…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천재 마법사가 여캠에 나오는 건 좀 그렇지.
잠시 릴리아나와 도란도란 잡담을 하고 있다 보니, 흐느적거리는 레베카가 방에서 나와 테이블에 쓰러졌다.
"레베카. 어제 엄청났나 봐. 여자의 향기가 나."
"… 응. 애기 아빠 컨디션이 좋았어."
"아침 드세요~."
레베카가 태교에 안 좋은 대화를 시작하기 직전, 남다은이 식사를 가지고 왔다.
아침 식사는 프렌치토스트와 소시지, 그리고 오믈렛.
막 구워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빵에 탱글탱글한 소시지를 보니 나중에도 아침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다희야. 빨리 먹고 준비해야지."
"웅. 알겠어 언니."
평소처럼 도란도란 식사를 이어가던 중, 삐삐삐삐 하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스칼렛의 스마트워치였다.
"식사 중엔 매너모드가 매너라구. 스카웃."
"…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스칼렛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 워치의 내용을 확인했다.
얼핏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놓은 우리들은 스칼렛의 말을 기다렸다.
"호연 님. 아이린 님에게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루시퍼의 위치를 찾았다고 합니다."
"… 정말로?"
"예. 일단 이 쪽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연락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얼굴을 굳혔다.
루시퍼.
원작의 마왕이었던 그의 위험함은 잘 알고 있지만, 언제까지 피할 순 없다.
게다가 위치가 파악되었다는 건 무언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절대 가만히 둘 순 없다.
"일단 내가 아이린 씨한테 가볼…."
이호연은 직접 상황 파악을 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의 표정을 보자마자 생각을 바꾸었다.
"… 아니, 다 같이 가보자."
모든 건 사소한 것부터.
자신이 모두 해결하려는 인식부터 바꾸어야한다.
스칼렛은 이호연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아이린 님 집으로 바로 가죠."
"언니, 우리 어디 가?"
"아니야. 신경쓰지마. 저는 다희만 데려다주고 갈게요. 아카데미에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오늘은 나랑 노는 날이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릴리아나. 빨리 빵부터 다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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