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01화 (501/648)

〈 501화 〉 501화. 나쁜 남자 이호연

* * *

이호연의 저택 지하에는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다.

촤아악­!

강한 마력 둘이 부딪히며 굉음을 낸다.

이 곳은 보통 남다은이 개인 수련을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들이 와있었다.

까득. 까드득….

레베카의 룬의 결계가 이호연이 펼친 지옥의 마력과 부딪히며 움찔거린다.

룬의 결계를 공격으로 사용하는 방식.

그녀가 연구중인 전투 방식이다.

"애기 아빠, 이런 식으로 대처하면 어때?"

"나쁘진 않은데… 지옥의 마력은 일반적인 마력과 구조가 다르잖아요. 지금도 보시면…."

훈련장에 서있는 건 이호연과 레베카였다.

레베카가 요구한 것은 지옥의 마력을 사용한 대련.

루시퍼에게 당한 이후로 칼을 갈고 있던 그녀는 이호연에게 부탁해 지옥의 마력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럼 마법 사이의 틈을 공략하는 건? 애기 아빠의 다른 마법이랑 비교했을 때 조금 느슨한 것 같던데."

"어… 그건 제 숙련도 부족일 거예요."

"으, 어떡하라는 거야. 약점이 없잖아."

"굳이 약점을 찾는 거보단 익숙해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레베카 씨도 처음보다 대처가 훨씬 나아진 게 느껴지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지옥의 마력은 인간의 마력과 다를 뿐, 우월한 게 아니다.

강한 마법사인 레베카나 임솔이 지옥의 마력에 당한 것도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지, 익숙해진다면 더이상 비밀병기로 사용할 순 없을 거다.

'그러고 보니 루시퍼는 뭐 하고 있는 거지?'

요 며칠간 판데믹의 테러는 비정상적으로 늘어났다.

마치 고삐가 풀린 말처럼 날뛰는 걸 보면 루시퍼도 분명 뭔가 하고 있을 텐데… 영 잠잠한 게 신경 쓰인다.

"좋아. 대련뿐이야.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하자."

"알겠어요. 레베카 씨가 그렇게 노력한다면 도와야죠."

이호연은 레베카의 말대로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도와준 게 있으니 자신도 도와야겠지.

하지만 이호연은 대련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하필 중요한 고민을 하던 중에 레베카가 들어왔으니, 대련 중간에도 계속 생각이 났다.

'… 레베카 씨는 날 어떻게 생각하려나.'

레베카의 호감도는 100이다.

자신을 남편이라고 생각하며 내조하는 레베카는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레베카에게 사실을 고백하면, 레베카는 어떻게 반응할까.

쓸데없는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었고, 전투 중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레베카는 이호연의 지옥의 마력을 깔끔하게 파괴했다.

"아…."

"애기 아빠. 집중을 못하는 거 같은데… 괜찮아?"

"… 네. 죄송한데 내일 이어서 해도 될까요? 오늘은 컨디션이 영 별로네요."

"으응. 그러자. 시간도 늦었으니까."

레베카는 싱긋 미소를 지어줬지만, 이호연은 괜히 미안함을 느꼈다.

도와줄 거면 확실히 도와줘야지. 이렇게 대련을 하는 건 레베카한테도 민폐다.

지이잉­

레베카와 이호연은 훈련장의 시스템을 종료했다.

동시에 구석에 앉아있던 스칼렛이 이 쪽으로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차라도 드시죠."

"아, 고마워. 스칼렛."

"땡큐. 스칼렛 양."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군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까?"

"응. 애기 아빠 컨디션이 별로래. 우리도 잠시 쉬었다가 올라가자."

세 사람은 훈련장 내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참고로 스칼렛은 이호연이 레베카와 대련을 한다는 말에 마침 할 게 없으니 구경이라도 하겠다며 내려왔다.

레베카와 이호연은 스칼렛이 준비한 차를 홀짝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이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그전까지는 꽤 열심히 몸을 움직였으니 온도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다은이는 아직도 매일 수련하러 와?"

"예. 다은 양이 훈련장 청소도 하고 있습니다."

"헤에. 어쩐지. 올 때마다 깔끔하더라."

"레베카 님도 직접 사용하신 건 치우시죠. 클린 마법진이 있다고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노력은 하고 있어…."

레베카와 스칼렛이 잡담을 나누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둘이 참 친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레베카가 이호연을 덮치고 룬의 일족에 대한 걸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집에서 지내던 나머지 세 명의 여자들 모두 레베카를 불편해했었다.

특히 스칼렛은 레베카 같은 타입이 힘들다고 도망치기도 했는데, 어느새 저렇게 편한 사이가 되다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붙임성이 참 좋아.'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일족을 잃은 기구한 과거와 다르게 레베카의 성격은 참 쾌활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강하다는 거겠지.

존경할만한 부분이다.

"으응? 애기 아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던 레베카는 이호연의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였다.

"레베카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남편으로서 존경하고 좋아하지."

"정확히는 이호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요. 나름대로 착하게 산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이 많거든요."

레베카나 스칼렛의 의견이 궁금하긴 했다.

이호연의 사정을 대부분 알고 있으면서 어른스러운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니까.

어쩌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지도 모른다.

"음. 애기 아빠는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남자로서는 뭐랄까. 어…… 나쁜 남자 스타일?"

"레베카 님. 솔직하게 쓰레기라고 말하셔도 됩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편한테 그런 말을 해."

"… 역시 그렇겠죠?"

"응. 혹시 몰랐어?"

"모르진 않았어요. 그냥…. 아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화가 나지도 않았다.

여자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쓰레기라고 느껴지겠지.

하지만, 메인 퀘스트의 존재가 있는 한 자신의 억울함은 풀어질 수가 없었다.

이걸 여자들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결국 가짜 던전 계획밖에 답이 없는 건가.

예상한 결과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굉장히 억울한 표정이네요."

"그러게. 애기 아빠, 무슨 일 있는 거야?"

이호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둘의 시선에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레베카는 룬의 일족 때문에 그렇다쳐도, 스칼렛은 어떻게 생각할까.

"… 이건 비꼬거나 하는 게 아닌데, 스칼렛은 나를 왜 좋아하는 거야?"

"비꼬는 거 같은데요."

"진짜 아니야. 궁금해서 그래."

스칼렛은 이호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를 홀짝거렸다.

이 사람이 이상한 건 맞지만, 그래도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비꼬는 건 아니겠지.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서로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결혼식 직전에 꽤 큰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 칼같이 끊는 사람과 끊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저는 의외로 정이 많아서 못 끊습니다."

"… 약간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해.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다는 뜻이잖아. 나도 그런 타입이거든."

"솔직하게 말하면 호연 님의 행동을 분석하는 게 아이리스 길드의 일보다 어렵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요."

"맞아. 특히 애기 아빠의 여자관계는 무섭지…."

"아이리스 길드의 밤의 황제와 맞먹을 정도니까요. 오늘부터 낮의 황제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자마자 작업을 걸더라."

"어릴 적부터 봤던 저한테도 슬쩍 추파를 던졌으니까요."

신나게 자신을 돌리는 둘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이런 주제로 말을 하니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조금 서운하긴 하네.'

다은이처럼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스칼렛 같은 타입도 있는 거겠지.

알고있지만, 괜히 야속하다고 해야 할까.

성격을 아니까 이해는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저렇게 말하는 게 약간은 슬펐다.

"… 만약 내 행동이 이유가 있는 거라면?"

"이유가 있어? 정말?"

"아니 뭐… 있다고 가정하면요. 그럼 좀 덜 쓰레기일까요?"

큰 의미를 둔 말은 아니었다.

'엄청난 이유가 있다면 그럴 수 있지~' 같은 위로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면 세상이라도 구하는 줄 알겠어. … 하지만 세상을 구한다고 해도 똑같아. 지금 애기 아빠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착각이요?"

"내가 단순히 바람둥이라서 쓰레기라고 하는 것 같아?"

"… 그게 아니에요?"

레베카는 입을 다문 채 조심스럽게 할 말을 떠올렸다.

이호연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여자들과 대화를 나눈 지 오래.

그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늘 말하는 걸 보면 그 고민이 여자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호연의 여자로서 고민이 필요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고민이든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다르고, 자기 자신이 아니면 그 고통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사람은 대부분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다.

그렇기에 심도 깊은 대화가 중요한 것인데, 이호연과는 그걸 할 수 없었다.

"… 무언가 사정이 있다고 해도, 애기 아빠가 그걸 숨긴다면 아무도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어."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자명한 사실이라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스칼렛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죠. 여자를 10명이나 만나는 남자가 억울하다는 태세를 취하니까요."

"…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아닙니다. 저도 호연 님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순간 미안한 감정을 느낀 스칼렛은 이호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분위기를 타서 강하게 말해버렸는데,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약간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스칼렛의 기분 좋은 체향이 훅 다가온다.

무릎에 손을 올린 스칼렛은 미안하다는 듯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호연은 스칼렛의 손을 잡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 진심을 들으니까 조금 힘들긴 하네.'

레베카는 지금의 이호연보다 어릴 때 룬의 일족을 잃었다.

그런데도 쾌활함을 잃지않았고, 그만큼 성숙한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걸 바라볼 수 있다.

"레베카 씨. 바람둥이 말고, 저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예요?"

"… 뭐라고 해야 할까. 태도의 문제가 있어."

이호연의 표정을 살핀 레베카는 말을 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할 얘기였다.

물론 레베카는 이호연이 여자가 몇 명이든 남편으로 섬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미래와 앞으로 태어날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이호연 스스로 똑바로 서야 한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애기 아빠의 삶은 공장에서 하는 단순 작업 같은 느낌이 들어."

"… 네?"

"특히 여자관계가 그래. 애기 아빠가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건 알아. 근데 으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일인데 그걸 즐기는 느낌이야. 이 차이를 이해할까?"

"저도 무슨 느낌인 지 알 것 같습니다. 9시 땡 하면 이제부터 스칼렛의 차례. 라는 듯이 다가오니까요."

"……."

찬물로 얼굴을 강하게 몇 대 맞은 기분이다.

둘의 말이 이호연의 멍한 정신을 확 뜨게 한다.

단순 작업이라니.

이호연은 단 한 번도 여자들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항상 진심을 다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 계속 보는 레베카와 스칼렛은 그렇게 느끼는 건가?'

다른 여자들은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긴 해도, 저런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레베카와 스칼렛은 같이 살며 자신이 행동하는 걸 계속 지켜봐 왔다.

둘이 자신을 폄하하려는 뜻으로 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뜻.

아니, 어쩌면 높은 호감도 때문에 오히려 좋게 말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정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 고마워요. 둘 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저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할 말도 많았지만 마음에 켕기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비틀비틀.

이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흠… 중병 같은데요."

"그러게. 물리치료라도 해야 되나?"

그리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베카와 스칼렛은 남은 차를 홀짝였다.

돌아가는 이호연의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왠지 미안해지네요."

"애기 아빠는 정도 많고 의외로 마음이 약하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은 레베카 님 차례였죠? 힘내셔야겠습니다."

"헉. 스칼렛 양 때문에 내가 분위기를 타버렸잖아. 오늘 내 차례 어떡할거야. 응?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임신할 수가 있겠어."

레베카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이런 말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해도 괜찮았을 텐데.

하필 오늘 해서 자신의 차례가 애매해졌다.

임신하지 못한다며 슬퍼하는 레베카를 본 스칼렛은 미소를 지었다.

"…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어떻게?"

"따라오시죠."

스칼렛은 남은 차를 깔끔하게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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