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화 〉 500화. 비밀스러운 일 (3)
* * *
"여보…?"
백아영은 이호연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에서는 그가 지금껏 드러낸 적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렇기에 백아영도 이호연에게 집중해야했다.
"아영 씨. 아니, … 여보."
이호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선택했다.
가슴에 매달린 채 훌쩍이는 백아영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너무 싱숭생숭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백아영에게 모든 걸 말해줘도 되는 건지.
하지만 이미 한계에 몰린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행위 자체가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뭐라도 말할 생각이었으니 백아영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만약 지금 백아영에게 모든 걸 고백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호연이 처한 여자들과의 관계부터 그렇게 된 원인인 자신이 이 세계에 있는 이유까지.
'… 아니 그걸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백아영이 믿어주고 안 믿어주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이 게임이고 당신은 히로인이었다….
모든 히로인들을 공략해서 마왕을 쓰러뜨리지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미친놈 취급만 돌아올 뿐이다.
물론 진실을 증명할 순 있다.
마법이나 아티팩트.
이 세계에는 진실을 증명하는 도구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용자의 인식이 기준이다.
지구가 평면이라는 개소리를 해도 발언자가 그걸 진심으로 믿는다면, 진실이라고 나온다는 뜻이다.
즉 완전히 미친놈 취급을 받겠지.
"…."
아니, 애초에 이호연도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생각 따위 하고 있지 않다.
앞에 있는 백아영도, 복도를 지나가던 의사도, 다른 히로인들도.
모두가 이호연에게 현실이었다.
사실 쓸모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냐도 문제다.
게임이나 소설에 나오는 뻔한 클리셰.
자신의 정체를 말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힌다거나. 듣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는 것.
지금껏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되는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아…."
그때, 백아영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 주변이 붉어지도록 훌쩍거리던 게 방금인데, 자신을 걱정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후우.
이호연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보. … 할 말이 있어요. 사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호연은 이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비밀에 대한 금제 따위 없었다.
말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모든 걸 말할 수 있다.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것.
여자들을 공략하지 않으면 마왕을 죽일 수 없다는 것.
난 당신의 호감도를 볼 수 있고, 생각도 읽을 수 있다는 것.
"아…."
입술이 떼어지질 않는다.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걸 알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여보…."
포옥.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백아영이 이호연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얼굴 주변을 압박하는 부드러운 가슴이 이호연의 정신을 각성하는 것 같았다.
백아영도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있었다.
이호연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어쩌면 그 선택이 백아영이 가진 의문을 해결해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여보의 생각을 알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어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고… 서운하니까."
"…."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게 여보와 관계가 무너지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든, 여보가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언젠가… 마음이 편해질 때 말해도 괜찮아요…."
"……."
이호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차마 백아영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항상 배려만 받는 자신은 오늘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 아영 씨.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요. 지금 당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잘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응. 믿고 있을 게. 호연아."
이호연은 백아영의 가슴에 안긴 채 눈을 꾹 감았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눈물을 흘린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니, 이호연은 최대한 감정을 죽였다.
*
터벅. 터벅.
드르륵.
"…."
병실에 돌아온 이호연은 임솔이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한 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멍청한 새끼를 어쩌면 좋을까…."
백아영과 대화를 끝낸 뒤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행동 방침부터 해야 할 일 까지.
'가짜 던전 계획….'
가짜 던전 계획은 가짜 던전을 펼쳐 위기를 만들고 모두를 속여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려는 계획이다.
단 한 번나쁜 짓을 하기로 했던 가짜 던전 계획에 의심이 생긴다.
'솔직해지는 게 맞는 건가?'
백아영과 대화로 느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히로인들은 자신을 먼저 배려해줄 거다.
이미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 일방적인 친절을 거짓말로 대해도 되는 걸까.
"… 이제와서?"
하지만, 의심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계획은 이미 완성되어있었다.
실행 직전에 멈추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모든 히로인들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것보단, 가짜 던전을 펼치는 게 맞지 않나?
선한 거짓말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딱 한 번 교통정리를 한 이후로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도 이호연은 여자들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으으음."
이호연이 끙끙거리며 고민을 이어가던 그때.
침대에 있던 임솔이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호연은 그제야 임솔의 이마가 땀에 젖은 걸 확인했다.
"… 클린."
이불을 걷고, 손가락을 튕겨 임솔의 몸을 깨끗하게 만든다.
병실에서 나오기 전에도 클린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때보다 꼼꼼히 청소해줬다.
섹시한 알몸이 눈에 들어왔지만, 너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발기도 되지 않았다.
환자 옷까지 정갈하게 임솔의 옆에 준비해놓은 이호연은, 별생각 없이 임솔의 옆에 누웠다.
그녀가 일어날 때 까지는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으음…."
깜박. 깜박.
잠시 후. 부스스 눈을 뜬 임솔은 익숙한 천장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이상하게 시원한 몸에 깜짝 놀랐다.
바람이 솔솔 통하며 이불의 촉감이 느껴지는 게 마치 알몸인 것….
"일어났어요?"
"응?"
멍하니 고개를 돌린 임솔은 알몸인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제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3초.
2초.
1초.
"… 헉."
정확히 3초 뒤에 상황을 파악한 임솔은 이불을 돌돌 말아 자신의 몸을 가렸다.
중요한 기억이 애매했다.
잠들어버리다니.
왜? 어째서?
마지막에 어떻게 잠든 거지?
임솔은 이호연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고,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미 볼 거 다 봤잖아요."
"무, 무슨…."
"기분 좋다고 한 거 기억안나요?"
"그때는 그때잖아…."
임솔은 김밥처럼 몸을 완전히 가렸다.
그 후, 조심스럽게 이호연의 얼굴을 살폈다.
"… 뭐에요?"
눈을 끔벅거리며 이호연을 슬쩍 쳐다보는 임솔은 왠지 평소보다 위축되어 있었다.
혹시 너무 창피해서 그러는 건가?
왜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혹시 창피해서 그래요? 귀엽네."
"…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갑자기 태도가 바뀌진 않을까 해서."
"오…. 절 그 정도 놈으로 생각하시는 거군요. 잘 알았습니다."
"아, 아니야. 그냥 혹시나 해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이호연은 말을 쏟아내는 임솔을 보며 헛웃음을 지은 후에, 자애롭게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솔아.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안기렴."
"… 헛소리 하는 거 보니 평소랑 똑같네. 다행이다."
임솔은 이불로 몸을 두른 채 이호연에게 안겼다.
★ 히로인 상태창
[임솔]
[ 호감도 : 100 ] ( + 0.1)
[ 성욕 : 85 ]
[ 식욕 : 40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다행이다. 다행… 꿈이 아니었으니 이제 제자랑… 사, 사귀는…?
[호감도 100 달성시 무엇보다 이호연을 우선합니다.]
'드디어 마법을 이겼네.'
임솔에게 마법은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
몇몇 마법사에게 불리는 그녀의 별명이 '마법에 미친년'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녀의 일상은 모두 마법이었는데, 그 마법을 이겼으니 기분이 꽤 좋았다.
"솔아. 내가 좋아? 아니면 마법이 좋아?"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애도 아니고."
임솔은 눈을 찌푸리며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했지만, 이 티키타카도 재밌었다.
역시 예쁜 여자와 대화를 하면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진다.
우울한 기분이 어느정도 사라진 것 같았다.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임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하다 우리 아기. 같은 느낌이다.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임솔은 제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다가, 이불이 흘러내려 가슴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결국 가만히 손을 허락했다.
*
임솔과 즐거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첫 경험의 여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 즈음, 난 병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평소와 같았다.
남다은이 해준 저녁을 먹고, 잠시 여자들과 수다를 떨다가 곧바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진짜 미치겠네."
멍하니 천장에 손을 뻗었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천장의 무늬를 새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마치 중2병이라도 걸린 것 같지만, 나름 진지한 고민이다.
사실 저녁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노는 시간이 끝나고 다가온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고 차가웠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나도 억울해. 시발."
그래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중에 나쁜 짓도 많다는 거?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억지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자신을 되돌아보면 객관적으로 쓰레기라고 매도할만한 일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너무 많아서 세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당시의 내 최선이었다.
여자가 무려 11명이다.
미친 신이라는 새끼는 자신을 여기 던져놓고 세계 멸망이라는 큰 짐을 지게 했다.
그런데도 그 흔한 최면술 하나 주지 않았다. 이건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잖아.
보통 이세계물이라면 치트 능력 같은 걸 서비스로 주는 게 국룰아닌가?
물론 내 마법과 전투능력은 치트나 마찬가지지만, 임솔 11명을 공략하는 게 아닌 이상 마법은 하등 쓸모없었다.
'하렘, 오케이?'
'예스. 마이 달링.'
'오케이. 굿.'
모든 여자들이 이렇게 반응했으면 나도 걱정 하나 없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각자 성격이 너무나 뚜렷한 히로인들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호감도가 100이 되어도 여자들은 직접 판단하며 생각했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실패하면 세계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거짓말이나 나쁜 짓 하나 없이 하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설령 존재하더라도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머리가 아팠다. 내 능력부족도 분명히 있을테니까.
마음 같아선 애처럼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당장 내일이면 마법진이 완성되는 건데. 하아….'
며칠 내로 계획을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내 마음의 호수에 돌도 아니고 운석이 떨어져 버렸다.
신이 무심코 던진 운석에 개구리들이 전부 뒤져버린 거다.
깊게 생각할수록 불합리한 이 상황 자체가 억울했다.
똑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고민을 깨트렸다.
"다은이야?"
아니, 애기 아빠. 나야. 들어가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레베카는 웬 일로 정중하게 의사를 물어보고 방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일단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레베카는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애기 아빠한테 도움 좀 받으려고. 아까 했던 말 기억하지?"
"… 아. 네. 당연하죠. 도와드릴게요."
난 미소로 화답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를 도와주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그리고 보통 해도 끝나지않는 고민은 의외의 곳에서 답이 나오곤 한다.
이럴 때는 끙끙 앓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야한다.
… 근데 아까 했던 말이 뭐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