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3화 〉 493화. 난 선생이고 넌 (2)
* * *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VIP병실.
로비에서 수속을 마친 이호연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늘 일찍 나오길 잘했네."
오전부터 나왔더니 문수린을 만난 뒤에도 시간이 많았다.
이호연은 엘리베이터에 있는 거울을 보며 괜히 옷매무새를 건드렸다.
마치 소개팅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첫 만남부터 혹시나 하고 사타구니를 빡빡 씻는 남자가 이런 기분일까.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퇴원하고 독방으로 이동한 건가? 넓은 방이겠지?"
이호연은 로비에서 안내받은 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입원했을 때 쓰던 병실은 임시였던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저번에 썼던 VIP병실보다 편의시설 같은 게 부족하긴 했어.
VIP들이 지내는 병실답게 복도를 돌아다니는 의사와 간호사가 자주 보였다.
백아영이 임솔을 담당하는 것처럼 각자 담당하는 환자가 있겠지.
"여기구나...."
[임솔 (VVIP) ]
[출입 주의]
출입 주의라니. 얼마나 VIP 대접을 받는 거야.
똑똑.
문을 두드린 이호연은 대답이 오길 기다렸다.
들어오세요.
대답은 금방 돌아왔고,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병실 문을 슬쩍 열었다.
먼저 눈에 보이는 건 이걸 병실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방이었다.
테이블에 의자, TV에 소파까지는 그렇다 치자.
옆에 보이는 건식 세면대와 스타일러, 옷장.
벽에 걸려있는 미술품까지.
이 정도면 자신의 방보다 살기 좋아 보였다.
가운데 있는 넓지막한 침대에는 임솔이 누워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뜬 큐브를 지루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호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큐브를 바닥에 내려놨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라. 끄으."
임솔은 침대 등받이에 등을 댄 채 기지개를 펴며 이호연을 맞이했다.
오늘도 백아영이 시킨 대로 하루 종일 큐브를 돌리고 있었으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예요? 마력 큐브? 진짜 오랜만에 보네."
마력 큐브는 수업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호연에게는 처음부터 쉬웠지만 다른 생도들은 모두 고생했었지.
"응. 재활 치료에 쓰는 물건이야. 한 번 해볼래?""
"그럴까요. 예전에 저도 엄청 잘했었는데."
그때는 첫 시도에 통과해버려서 다시 할 기회가 없었다.
교수도 깜짝 놀라 이호연 생도는 그냥 자습을 하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더욱 빠르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이호연은 큐브를 허공에 띄운 뒤 구조를 파악했다.
'어렵진 않은데 귀찮네.'
이리저리 꼬여있는 게 꽉 묶인 매듭을 푸는 것 같았다.
환자의 재활로 쓰기에 좋아 보이긴 했지만, 이호연의 수준은 아니었다.
타닥. 타다다다다다닥.
이호연의 마력이 큐브에 퍼지고, 큐브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3초 정도 걸렸을까.
깔끔하게 색이 배열된 큐브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호연은 임솔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네요. 재활 치료용으로도 좋을 것 같고."
임솔은 등받이에 몸을 딱 붙인 채 눈을 깜박거렸다.
몇 년 전 임솔은 학회에서 마력 큐브의 신기록을 세웠었다.
임솔이 갈아엎은 신기록은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심심풀이로 맞춘 게 세계 신기록이었으니 티는 안내도 나름 자랑스러웠다.
'저 정도면 그때 세웠던 신기록에 거의 근접한....'
크흠.
그럴 수 있지.
임솔은 목을 가다듬었다.
신기록이 뭐가 중요하겠어.
제자가 강한 건 좋은 일이다. 오히려 축하해야 한다.
"집중하면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딱히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그래. 알겠으니까 거기 앉아."
임솔을 괜히 눈가를 좁히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호연은 아무 생각없이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나 보네요. 편하게 앉아있는 걸 보니 제 마음도 편해요."
침대에 앉아있는 자세만 봐도 많이 나아진 게 보인다.
첫날에는 옥상에 올라가서 차가운 공기를 조금 맞았다고 바로 컨디션이 나빠졌으니까.
"아, 응…. 다행이지."
임솔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백아영 덕분이다.
스트레칭을 했던 등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임솔 교수님, 혼자 있느라 심심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아영 씨가 담당이니까 괜찮았나?"
"아영이는 올 때마다 재활 훈련밖에 안 해. 이게 다 네가 곧바로 퇴원해서 그렇잖아. 아영이가 한 마디 했다고 퇴원하면 어떡해."
"…의사가 나가라는데 어떡해요. 아영 씨가 내보내는 걸 저항할 순 없잖아요."
"그냥 질투나서 그러는거야. 으. 네가 마력 큐브를 하루에 10시간 씩 맞춰야하는 기분을 알아?"
"네네. 죄송합니다. 임솔 교수님."
임솔은 고개를 까딱거리는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스승에게 대들다니 싸가지없다 같은 생각이 아니다.
이호연이 버릇없는 건 처음 봤을 때 부터 알고있었다.
문제는 대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아영 씨'.
백아영을 호칭하는 그 단어가 임솔의 귀에 계속 맴돌았다.
'너무 친근해 보이잖아.'
아니, 친근해 보이는 게 아니라 친근한 게 맞다.
적어도 '임솔 교수님' 보다는 훨씬 가까운 호칭인 게 확실하다.
'…솔이라고 부르는 것도 허락해줬는데.'
왜 계속 임솔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솔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주는 데에 얼마나 깊은 내적고민이 있었는 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마법 학회장 아서를 제외하고, 남자에게 솔이라는 호칭을 허락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호연은 자신보다 연하.임솔에게 있어서 엄청난 양보였다.
"퇴원까지는 며칠이나 걸린대요?"
"길어봤자 사흘 정도? 아영이가 계속 붙어있으니까 괜찮겠지."
이 점에 있어서 심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말할 자신감도 없었다.
임솔은 아쉬움을 삼킨 채 이호연과 대화를 이어갔다.
"맞아, 교수 님. 이거 봤어요?"
"응? 이게 뭐야. 아니, 금속형 술식을 왜 이딴 식으로…."
둘은 자연스럽게 이호연이 가져온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마법을 좋아하는 마법사 둘이 대화를 나누면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
"맞아. 그러고보니…. 음?"
미소를 지으며 마법에 대해 토론을 나누던 임솔은 문득 떠올랐다.
면회시간은 무제한이 아니다.
제자와 하는 마법 토론은 너무나 재밌지만, 이럴 거였으면 고통의 스트레칭을 할 필요는 없었다.
… 무언가를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스트레칭의 보상을 받기 위함이었다.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면 적어도 당분 보충은 해야 한다.
"… 크흠. 그러고 보니 생각은 해왔어?"
"네?"
"하고 싶은 거. 해주겠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아아. 어떻게 까먹어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
임솔은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신만만하게 다 해준다고 해놓고 진 것도 창피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마치 그다음을 기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할 일이니까 빨리 해버리는 게 나아.'
모든 일이 그렇다.
마법 연구를 하더라도 힘든 일을 제쳐놓으면 안 된다.
제자와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먼저 제자가 원하는 걸 이뤄줘야 하는 법.
후발주자인 자신이 앞서나가려면 더욱 노력을 해야한다.
임솔은 그렇게 자기세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도 돼."
"그래요?"
이호연은 임솔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적극적이시지.'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임솔이 저렇게 먼저 말해오면 이호연의 입장에선 편했다.
"그럼 마음 편하게 말합니다?"
"으, 으응."
임솔은 주먹을 쥐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다 해주겠다고 했지만…설마 이상한 걸 시키진 않겠지.
얼굴에 오줌을 싸거나, 혹은 이상한 걸 먹이려 하거나….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임솔은 제자가 특이 취향이 아니길 기도하며 천천히 열리는 입을 바라봤다.
"그럼 마사지 좀 해주세요."
*
꾸욱. 꾸욱.
"…."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임솔은 누워있는 이호연의 몸을 마사지하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환자는 자신일 텐데, 침대를 차지한 이호연은 편하게 누운 채 임솔의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이게 왜 하고 싶었던 거야?"
"그냥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나 환자인데. 이건 환자 학대 아니야?"
"큐브 맞추는 것 보다 마사지가 쉽잖아요."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임솔이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걸 구경했다.
전문적인 스킬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의 몸을 꾹꾹 누르는 게 다였다.
재활 치료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환자에게 시키더라도 양심이 찔리진 않았다.
마사지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그냥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했고, 곧바로 섹스에 들어가기보단 스킨십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몸이 근육질이네?"
"운동도 자주 하고 있거든요."
사실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호연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멋있는 체형으로 변해있었다.
정확한 시기를 따져보면 서바이벌 시험에서 엘프의 정수를 얻었을 때 정도였지.
"아, 으음. 괜찮네요."
"근데 보통 마사지는 엎드려서 받는 거 아니야? 가슴이나 배는 마사지 할 곳이 없는데."
"엎드리면 교수 님을 보기가 힘들잖아요."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아니다. 우리 제자가 하고 싶다면야…."
임솔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다고 하면 해줘야지.
오히려 생각하던 것보다 건전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임솔에게는 마사지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대충 해도 괜찮다고 해서 시원해 보이는 곳을 누르고 있었지만, 이게 정말 시원한 건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제자가 이렇게 멋있었나?'
다만 알 게 된 건 이호연의 얼굴이 생각보다 잘생겼다는 것.
평소에도 잘생겼다는 말이 많은 제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실감이 되었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날카로운 턱선.
남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잔근육.
임솔은 설렘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눈을 깜박이며 침을 삼켰다.
'추태를 보이긴 싫은데….'
익숙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지만, 긴장하는 건 다른 문제.
연상의 여유는 아니더라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때, 임솔은 이호연의 시선을 감지했다.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가슴골.
귀여운 제자의 눈이 힐끗힐끗 이 쪽으로 향한다.
'우리 제자. 귀엽기는.'
이호연이 임솔의 몸을 자주 훔쳐보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평소에는 신경을 안 썼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괜히 신경 쓰게 된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알아주는 것.
기분 나쁜 꼰대들이 몸을 훔쳐보는 것과 이호연이 훔쳐보는 건 너무나 달랐다.
이호연의 시선을 받아 자신감이 생긴 임솔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동시에 자신감이 샘솟았다.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스으윽.
'… 내가 먼저 움직여야해.'
아영 씨. 라는 호칭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호연은 아영이 외에도 다른 여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영 씨가 아니더라도 그녀들을 다른 호칭이 있겠지.
'나는 호연이 밖에 없어.'
다른 여자들도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임솔을 이해할 남자는 이호연 뿐이었다.
그렇기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포기하기 싫었다.
임솔은 이호연의 배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복근에 침을 삼킨 임솔은이호연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아래로 손을 내려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