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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92화 (492/648)

〈 492화 〉 492화. 난 선생이고 넌

* * *

문수린은 예전부터 그랬다.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 와중에도 학생으로서 본분을 놓치지 않았고, 인플루언서 활동은 물론 다른 생도들에게도 이미지를 잘 구축했다.

거기까지라면 좋았겠지만, 문수린에게는 번아웃(burn out)이 일어났다.

자신의 상태를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부담감.

점점 심해지는 스토커와 파파라치의 압박.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문제를 해결해준 건 다름아닌 한 남자였다.

서걱. 서걱.

서류 작업을 이어가던 문수린은 슬쩍슬쩍 눈을 돌렸다.

의자에 앉아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는 이호연이 보였다.

'확실히 누군가 있으니까 좋다. 헤헤.'

문수린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물론 평소에도 학생회 인원들이 있지만 이호연과 비교할 순 없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대화가 끊겼는데도 그는 옆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 안정감이 생긴다.

사실 문수린은 대화가 없는 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었다.

문수린은 자리에 놓인 거울로 이호연의 모습을 살폈다.

이호연이 스마트 워치를 보며 피식 웃는다.

'뭘 보고 좋아하는 걸까. 귀엽네.'

이호연이 웃으면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이호연을 구경하며 중간중간 딴짓을 하고 있지만, 일을 마친 후에 조금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일의 능률 자체는 훨씬 좋았다

한편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내려놓고 문수린을 슬쩍 바라봤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문수린과 스몰토크를 나누는 건 꽤 재밌었지만, 수린 누나가 일에 집중하면서 점점 말이 없어졌다.

가끔 이 쪽을 쳐다보는 것 빼고는 계속 일만하고 있었으니 대단하긴 했다.

'진짜 이걸로 괜찮은 건가?'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때우던 이호연은 일에 집중하는 문수린의 옆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일도 좋지만, 오랜만에 봤는데 좀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문수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애인과 있을 때, 아무것도 안 해도 느껴지는 그 편안함과 안정감.

그걸 이호연도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에게 의존하는 문수린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좀 그렇잖아.

"누나. 많이 바쁜가 봐요?"

"미안해. 혹시 많이 심심하면 눈을 붙여도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닌데, 얼마나 남았나 해서요."

이호연은 슬며시 의자에서 일어나 문수린의 뒤로 다가갔다.

문수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호연은 어깨를 주물렀다.

"으응. 기분 좋아."

문수린은 이호연의 손에 볼을 비비며 미소를 지었다.

단정한 백금발이 어깨를 따라 흘러내려있고,살포시 드러나있는 목덜미와 탐스러운 가슴.

문수린에게 여성의 향기가 흠뻑 풍겨 나오며 이호연의 코를 간질였다.

이 누나는 자신이 이렇게 매력적인 걸 알고 있을까.

이호연은 문수린이 하는 일을 슬쩍 쳐다봤다.

판데믹의 테러에 대한 내용. 이호연도 조금은 알고있었다.

"판데믹의 테러… 최근에 많이 늘었다고는 하던데요. 그것도 학생회장이 해야 되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이사장 대리로서의 업무지. 할아버지, 아니 이사장 님도 나이가 있으시고… 아빠는 업무를 진행할 상황이 아니니까."

"아…."

괜히 물어봤다.

문성민에 대한 일은 일부러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애초에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상태가 좋거든. 금방 낫고 죗값까지 치르게 할 거야."

"다행이네요."

"아빠가 나아지면 호연이 비밀도 말해주기로 했던 거 기억해? 난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아… 네. 당연하죠"

문수린의 아버지인 문성민을 생포했을 때.

자신이 여러 여자들과 엮여있다는 걸 문수린에게 들켰었다.

문성민의 몸이 나으면 고백하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변명을 준비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일 전체를 덮어버리기 위해 준비한 게 가짜 던전 계획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 그러고 보니 당분간 행사 같은 건 없어요?"

"행사? 글쎄. 다음 주에 실전 대련이 있긴 하지. 이번에 너무 열기가 뜨거워서 그때는 조금 더 교육적으로 진행할 거야."

"그렇구나…."

이호연은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해 다시 문수린의 어깨를 주물렀다.

다가오는 가짜 던전 계획을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행사가 없다면 계획에는 더 좋지만,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었다.

"행사는 왜? 휴식이 조금 더 필요해서 그래?"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고 보니 일은 언제 끝나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아, 근데 곧 일이 있다고 했었나?"

"임솔 교수님 병문안이 있어서… 그래도 1시간 정도는 있을 수 있어요."

"… 집중해야겠는데."

이호연은 손이 빨라진 문수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복잡한 일은 그때 생각하자.

나쁜 짓을 히로인들 앞에서 생각하는 건 이치에 맞지않는다.

"수린 누나 옆에서 놀기만 하니까 뭔가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늦었지만 도와드릴까요."

"도와줄 필요는 없어. 호연이가 도와주면 슬퍼서 집중이 안 될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튼, 빨리 끝내주세요. 저번처럼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요."

"나는 괜찮아. 나중에 학생 회장실에 있는 cctv를 돌려보면 그걸로 충분…."

"네?"

"아."

"수린 누나?"

"미안. 일에 집중해야 해서…."

소통을 단절한 채 고개를 테이블에 박은 문수린을 보며, 이호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했더라.'

문수린을 힐끗힐끗 바라보긴 했지만,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다.

바지에 손을 넣어서 사타구니를 긁지도 않았고… 냄새를 맡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호연은 문수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금방 끝난다고 했으니 잠시 스마트워치라도 볼 생각이었다.

이 세상은 꽤나 특이했다.

빙의 전 지구와 같은 세계에 게임 속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뉴스를 봐도 이호연이 알만한 요소가 꽤 있었다.

'여기는 아직도 전쟁 중이고… 저 나라는 여전히 더운가 보네.'

뉴스를 보며 자신이 아는 정보와 다른 점을 찾는 것도 꽤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그때, 이호연의 눈을 사로잡는 기사가 있었다.

"… 부인이 11명?"

"응? 뭐라고?"

"아, 그냥 인터넷 기사 좀 보고 있었어요. 중동 부자가 부인이 11명이라길래요."

부인이 11명이라니. 왠지 자신과 비슷한 처지 같았다.

물론 매매혼과 자신을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이호연의 말을 들은 문수린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11명은 조금… 그렇네. 많아도 너무 많지 않아?"

"그, 그러게요. 너무하네 정말. 음."

왠지 가슴이 아프다.

이호연은 헛기침을 하며 스마트 워치를 껐다.

*

빅토리아 아카데미 VIP 입원실.

방음 마법진이 펼쳐진 병실 내부에는 스트레칭을 하는 두 여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한 명은 그녀를 돕고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천천히. 응. 그렇지."

"끄으윽…. 아하읏."

임솔은 자신의 등을 누르는 백아영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백아영의 치료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임솔은 아플 때는 자기자신보다 백아영을 신뢰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파도 너무 아팠다.

스트레칭을 하는 도중에 관절 곳곳에 마력을 집어넣는다는데, 백아영을 의심하기 싫어도 의심하게 될 정도의 아픔이다.

치료가 다 되었으면 안 아파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두둑­

"아악…."

결국 한계가 찾아왔고,임솔은 두둑 소리가 난 등에 손을 얹은 채 엎드렸다.

몸을 파르르 떠는 게 물을 털어내는 개구리 같은 자세였다.

고통스러워하는 임솔을 본 백아영은 등에 치유의 마력을 집어넣었다.

"솔아. 너무 아프면 그만하는 게 좋아.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은 낮지만, 0%는 아니라니까."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프다고는 말 안 했잖아."

"그건 네가 몸을 움직이며 산책을 하고 싶다고 떼를 써서 그런 거지. 천천히 안정을 취하며 치료했으면 하나도 안 아팠을 거야."

"… 으음."

임솔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 스트레칭은 자신이 부탁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곧 있을 면회.

자신을 완벽하게 제압한 제자가 찾아오는데, 침대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움직이면서 대접해야겠지.

… 기회가 되면 당분 보충도 좀 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렇기에 억지로 움직일 수 있는 처방을 부탁한 것이다.

"알겠어. 아영아.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아."

"응. 하지만 너무 과격한 운동은 안돼. 알고 있지?"

"당연하지."

"그럼 다시 마력 큐브 재활로 들어가 보자. 침대에 앉아."

"… 아니아니. 곧 면회시간이야."

"아, 그렇구나.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임솔의 스트레칭을 위해 펼쳐놨던 요가매트를 돌돌 말던 백아영은 문득 생각했다.

오늘 임솔을 보러 올 사람은 이호연이다.

솔이가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고, 이호연이 곧 온다고 했으니 확실하겠지.

근데 하필 지금 스트레칭을 요구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

"솔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호연이하고 병실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지?"

"… 안돼?"

"당연히 안되지! 넌 환자라니까 환자. 그때 옥상에 올라갔다가 아파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렇긴 하지만…. 오랜만에 제자가 온단 말이야. 그것도 날 이긴 제자라고."

"호연이가 널 이긴 제자가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난 널 담당하는 의사니까."

"… 알겠어."

임솔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백아영의 직업 정신을 더 이상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웠다. 제자랑 할 일이 많은데, 병실에만 처박혀있어야 하다니.

'… 오히려 이게 나을지도 몰라.'

다르게 생각한다면, 밀실에 남자와 여자 단 둘이 있는 것이다.

이제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으니 지, 진도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임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뱉은 말이 하나 씩 기억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해준다고 했었지. 역시 너무 막 말했나? 사실 10년은 아니어도 3년 정도는 걸릴 거라고 생각해서… 아, 솔이라고 부르라고도 했었는데 왜 안 부르는 거지? 혹시 거부감이라도 느끼나? 만약 곧바로 하고싶은 걸 말하면… 으, 으으음.'

사실 이호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남성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던 임솔이다.

최근까지도 당분보충이라고 생각했을 뿐, 흥분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경험이 몇 번 없는 임솔이었으니 금방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제자의 달콤한 음색.

자신의 몸을 덮는 이호연의 손길.

임솔은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들썩거리는 입꼬리는 그녀의 고민이 즐거운 고민이라는 걸 알게 했다.

'왠지 기분 나빠.'

그리고 그녀의 동맹인 백아영은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임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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