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91화 (491/648)

〈 491화 〉 491화. 사랑과 전쟁 (3)

* * *

머리가 차가워진다.

엘리스의 몸에 올라온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일순간이었다.

결계에서 나온 아이린은 곧바로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절대 보지 못했겠지.

운이 좋았다.

"… 운이 안 좋은 건가? 보면 안되는 걸 봤어."

어쩌면 이번 일로 자매의 우애가 모두 망가질지도 모른다.

엘리스는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입에 털어 넣듯 비웠다.

그녀로서는 눈앞에 일어난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이 이호연의 집에서 나온다니?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이린의 마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엘리스에게도 충격이었다.

이호연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동생인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린이 원하는 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뿐이었다.

자매의 관계가 크게 바뀌지도 않았고, 이호연을 두고 싸울 일도 없었다.

억지로 셋이 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아이린은 엘리스의 허락이 없다면 이호연과 관계를 맺지 않기로 했다.

그렇기에 엘리스도 이 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 이호연이 저 집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아이린이 이호연의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언니…."

자신은 아직도 언니를 좋아했다. 비록 자신에게 품은 사랑은 아직 이해를 못하지만, 언니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호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신도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엘리스는 입술을 앙 깨물며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그 시각, 아이린은 어깨를 축 늘어 뜨린 채 집 현관문을 열었다.

"힘드네…."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인 자신에게도 힘든 일은 있다.

최근 가장 아이린을 힘들 게 하는 것이 저 여자들이다.

이호연의 집에 갈 때마다 진이 빠진다.

특유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느낌.

아이린과 다른 파장을 내뿜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여자들의 세력을 파악한 건 큰 수확이야."

세력이 있다면 다툼도 있는 법.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아이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 엘리스가 돌아오면 오랜만에 같이 와인이라도 한 잔 하자고 해볼까."

"… 언니."

"으응? 엘리스?"

아이린은 2층에서 내려오는 엘리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은 외출한다고 했는데, 벌써 돌아왔구나.

"엘리스, 언니가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거야? 배고파?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아이린은 방긋방긋 웃으며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비록 힘든 일을 하고 왔지만 사랑하는 동생을 보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걸까.

양팔을 벌린 아이린은 그대로 엘리스를 끌어안….

"언니가 왜 이호연 집에서 나오는 거야?"

"… 아?"

엘리스에게 다가가던 아이린은 양팔을 든 채 멈췄다.

마치 건전지가 끊긴 인형 같았다.

몸을 삐걱거리며 팔을 내린 아이린은 짧은 순간 생각했다.

'어, 어떻게 안 거지?'

아이린도 바보가 아니다.

엘리스가 오늘 카페에 간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했다.

이호연의 집에서 엘리스의 집까지 몇 걸음이면 도착하지만, 그 사이에도 방심하지않고 은신을 사용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만 날씨가 더워 엘리스의 계획이 바뀌었고, 룬의 결계에서 나와 은신하는 짧은 틈.

그 사이에 엘리스가 이호연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우연이 겹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 엘리스. 오늘 카페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더워서 그냥 집에 있었어."

"아하. 아하… 그렇구나. 그럼 아직 배고프겠네. 언니랑 오랜만에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눠볼까?"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엘리스의 몸을 뒤로 돌렸다.

일단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끌면….

"언니. 말 돌리지 말고 여기서 말해. 나 진짜 화났거든?"

"응. 말해줄게… 화내지 마."

물론 통할 리가 없었다.

아이린은 고양이에게 잡힌 생쥐처럼 엘리스의 뒤를 따라갔다.

엘리스의 방.

먼저 테이블에 앉은 엘리스는 아이린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

테이블에 있던 와인을 힐끗 쳐다본 아이린은 수사를 받는 용의자가 된 기분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서? 하나도 숨기지 말고 얘기해. 이호연한테도 물어볼 거니까."

"…."

아이린은 엘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이린은 이호연을 만나고 온 게 아니었다.

대신 그 동거녀들을 만났을 뿐이다.

'그게 더 큰일일지도….'

이호연에게 여러 명의 동거녀가 있다는 건 아이린도 작전 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엘리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니?"

"으, 으음…. 대신 다 듣기 전까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모두 솔직하게 얘기할게."

"… 알겠어. 그러니까 말해줘."

엘리스는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의자에 붙였다.

그래.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하아… 빅토리아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일을 의뢰했는데…. 아니다. 얼마 전에 이호연이 우리 집에 왔을 때야…."

아이린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천천히 얘기했다.

이호연에게 수상한 비밀이 있다는 걸 안 동거녀들에게 협력을 요구받았고, 몇 번이고 이호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

오늘도 그 일환이었고, 이호연은 만나지 못했다는 것까지.

"정말이야?"

"… 응. 숨겨서 미안해."

"동거녀가 넷……?"

아이린은 표정이 급격하게 굳는 엘리스를 보며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다.

'이럴 줄 알고 말 안 한 건데.'

당연한 결과였다.

엘리스가 조진심이 강한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호연의 동거녀가 넷이나 있다는 걸 말하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오겠지.

"에, 엘리스. 으으…. 어떡하지."

아이린은 눈을 감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아이린도 충격을 받았다.

엘리스라면 더욱 심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호연을 실드 칠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인간 쓰레기라고 같이 욕을 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 때.

"언니. 궁금한 게 있어."

"내가 아는 건 대답해줄게…. 하지만 너무 충격받지 마. 엘리스. 원래 나쁜 놈인 건 알았잖아."

"아니, 그거 말고. 이호연에게 수상한 비밀이 있다면서."

엘리스는 아이린의 걱정과 다르게 뭔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저주'.

이호연의 사정은 엘리스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정체불명의 저주 때문에 여자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엘리스도 그런 엄청난 바람둥이 기질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사귄다고 공언한 사이는 아니지만… 내버려 두는 건 맞아.'

성인 남녀가 서로의 알몸을 보고 할 거 다 했으면 공언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호연도 양심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튼, 그 저주 때문에 엘리스도 굉장히 골치 아픈 상태였다.

'매일같이 검은 기둥에 가고… 실제로 그 마력을 흉내 냈어."

이호연의 저주는 판데믹, 혹은 마왕이 건 것이라고 추정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가 검은 기둥의 마력을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

그 저주는 남들에게 말 할 수 없는 것 같았으니, 수상한 비밀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저주를 해결하기 위한 건가?'

잠시 고민하던 엘리스는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어찌할 줄 모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엘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주."

"응?"

"언니한테 이호연이 걸린 저주에 대해서 말한 적 없지?"

"저주…?"

"이호연과 있을 때 한 번. 말한 적 있어."

엘리스가 아이린과 이호연의 관계를 알게 된 뒤.

화를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버린 적이 있다.

"음…."

아이린은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저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바로 3P를 했던 날이다.

엘리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때, 저주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결국 모든 게 잘 풀렸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저주라는 단어를 기억에서 지웠다.

"어쩌면… 언니가 찾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엘리스는 언니에게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을 공유했다.

*

환자 생활을 끝내기로 한 날.

이호연은 찌뿌둥한 몸을 움직였다.

역시 사람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

며칠 쉬자마자 몸이 더 쉬고 싶다는 신호를 엄청나게 보내온다.

억지로 집 밖으로 나온 이호연은 멍하니 거리를 걸었다.

'아카데미를 쉬니까 이건 좋네.'

시간이 훨씬 자유롭다.

애초에 아카데미의 수업은 이호연에게 필요가 없었다.

이론부터 실전까지.

임솔 정도를 제외하면 이호연에게 가르침을 줄만한 교수는 없으니까.

'이따가 교수님한테도 가봐야지.'

병문안을 가기로 했으니 꼭 들려야한다.

이호연은 동아리 건물로 걸어갔다.

목적지는 17층에 있는 학생회.

지금 시간에는 학생회장인 문수린만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학생회장이자 이사장의 손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필요 없는 수업은 자주 빼곤 한다.

마침 이호연도 시간이 있었으니, 오늘 같은 날에 놀러 가지 않으면 화내겠지.

"근데 수린 누나한테도 일이 많지 않으려나."

일이 많아서 수업을 뺐는데 놀러 오라고 하다니.

그것도 좀 이상한 거 아닌가? 혹시 자신을 만나려고 억지로 시간을 낸 걸까.

문수린이 그럴 사람은 아닌데.

이호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띠링.

17층에서 내리자 텅 빈 학생회가 보였다.

구석에 홍보부 부실도 있었는데, 저기도 안 들어간 지 진짜 오래됐다.

꾸준히 청소해주는 학생회에게 감사하자.

이호연은 조용히 학생회장실로 향했다.

학생회장실에는 당연하게도 이호연이 찾던 사람이 보였다.

문수린.

그녀는 자리에 앉아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혀로 입술을 핥는 걸 보면 안 풀리는 모양.

이호연은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수린 누나."

"아, 호연아!"

문수린은 이호연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고,이호연은 다가온 문수린을 살짝 안아줬다.

이렇게 반가워하는 걸 보니 역시 오길 잘했다.

"실전 대련 이후로 처음 보네요."

"으응. 보고싶었어."

가슴에 머리를 부비는 문수린을 보며 미소를 지은 이호연은 문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 바쁘다면서요. 오라길래 오긴 했는데 일은 괜찮아요?"

"호연이도 환자잖아. 놀 생각은 없었어."

"네?"

돌돌돌돌.

문수린은 학생 회장실 구석에 있던 고급 의자를 자신의 업무석 옆으로 끌고 왔다.

대충 봐도 비싸 보이는 의자.

어쩌면 원래 학생 회장실에 있던 것 보다도 좋을지도 모른다.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은 문수린은 이호연의 팔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거기 앉아서 쉬고 있어. 눕고 싶으면 옆에 레버를 내리면 돼. 맞다. 안마 기능도 있어."

"… 그냥 앉아만 있어요?"

"응. 그거면 돼. 나 일하는 동안에 같이 있자. 스마트 워치를 해도 되고 졸리면 자도 괜찮아."

문수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환자인 이호연이 놀러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자신과 놀다가 회복 중인 그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얼마나 슬플까 상상도 할 수 없다.

대신 외로운 학생 회장실에서 같이 있어주길 원했다. 문수린은 이호연과 같이 있는 거 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고, 업무 능률이 좋아진다.

"으음…. 네. 그럴게요. 누나가 편하다면."

이호연은 문수린의 배려에 감사하며 의자에 앉았다.

사실 오랜만에 보는 문수린이었으니 하고 싶은 건 맞춰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배려를 받을 줄이야.

의자에 앉은 이호연은 문수린이 일하는 걸 구경했다.

단순한 서류작업인데도단정하면서 절제된 동작.

학생회장으로서 기품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문수린의 옆얼굴을 보던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문수린의 몸을 훑었다.

바로 옆이라 그런지 아슬아슬하게 가슴골이 보인다.

새하얀 피부에 대비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골짜기.

손이라도 집어넣어 보고 싶다.

학생회장이 저런 야한 옷을 입어도 되는 걸까.

물론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학생회장의 가슴골을 보는 놈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라는 게 있다.

"왜 그래?"

"네? 뭐가요?"

"이 쪽을 보고 있는 줄 알았어. 착각이었나 봐."

고개를 갸웃거린 문수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일에 집중했다.

'… 역시 누나는 감이 좋네.'

가속까지 사용하며 고개를 돌린 이호연은 부끄러워하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시선이 들킬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다니. 너무 쪽팔린다.

이게 다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렇다.

"누나, 말 걸어도 괜찮아요?"

"심심하면? 하지만 쉬어야 하지 않아? 와준 것도 고마운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음, 맞아. 이사장 님이 고맙다고 메시지를…."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이호연은 서류 작업을 하는 문수린과 스몰토크를 시작했고, 학생회장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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