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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86화 (486/648)

〈 486화 〉 486화. 추리 (4)

* * *

이호연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이 날카로운 감각에 덕을 본 적이 매우 많았다.

사소한 일부터 크게는 목숨을 구원받은 적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

스윽­

이호연은 마음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찜찜함에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몸을 숨기자. 루시와 루미에게는 잠깐 옷가게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조금 이따 돌아오면 된다.

이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옷가게를 빠져나왔다.

아니, 정확히는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으응? 호연아! 여기서 뭐해?"

"... 수린 누나?"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다가온 문수린을 본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수린 누나였구나.'

이호연은 의외로 여러 가지를 신경 쓰며 움직였다.

특히나 주의하던 것이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 다른 여자에게 들키지 않는 것.

지금까지는 밖에서 하는 데이트를 자주 하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백아영은 의료팀.

문수린은 학생회실.

임솔은 연구실.

루시와 루미는 동아리 방.

엘리스와 아이린은 옆 집.

여자들을 만나는 곳이 정해져 있었기에 데이트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하필 오늘.

루시 루미와 데이트 중 문수린을 만나버렸다.

"누나는 어쩐 일이에요?"

"근처에 마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어서 잠깐 들렸어. 아카데미 직원이 습격을 당했다고 해서."

"아하...."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동선이 겹쳤나 했는데 판데믹 놈들이 문제인가.

그 개 같은 새끼들.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호연이는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음, 잠깐 옷이나 살까 해서요."

이호연은 괜히 앞에 있던 옷을 만지작거렸다.

이 얇은 티는 수린 누나한테 어울리겠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깐 데이트라도 할까?"

"... 아카데미 직원이 습격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호연이랑 만나는 거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들도 많으니 빠져도 큰 문제는 없을걸? 아마 괜찮을 거야."

"... 어.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이래서 항상 일정을 조정했던 거다.

데이트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났다가는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

이호연은 침을 삼키며 문수린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 커피 한 잔 할 시간도 없어?"

"어.... 그게요. 누나."

이호연은 서운해하는 문수린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문수린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서 만났을 때는 대부분 맞춰주는 편인데... 하필 루시 루미와 데이트 중일 때 만나버렸다.

'일단은... 루시 루미한테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야겠네.'

나중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면, 이게 낫겠지.

둘이 떡볶이라도 먹고 있으라고 말한 뒤 나중에 합류하면 된다.

"알겠어요. 그럼 잠깐만...."

드르륵­

이호연이 입을 염과 동시에.

뒤에 있던 탈의실의 커튼이 격하게 열렸다.

"호연 씨. 이건 어때요?"

"루미, 이게 이쁘다니깐. 어디가."

"저는 이 쪽이 좋은데 루시가... 응?"

"아...?"

"어?"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에게 붙어있는 문수린을 보며 눈을 크게 떴고, 그건 문수린도 마찬가지였다.

화사한 옷들을 입은 채 탈의실에서 나와 이호연에게 다가오는 둘은 누가 봐도 데이트 중인 커플이었다.

"너희들...."

"학생 회장님...."

'좆됐다.'

이호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임솔과 대련이 가장 힘들었다는 건 취소. 지금이 제일 부담이 크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정 안되면 당장 빅토리아 공원으로 달려가서 가짜 던전 계획을 폭주시켜야....

"안녕하세요. 학생 회장님."

"안녕하세요...."

"응. 셋이 놀러 온 거야?"

"네. 이호연이 퇴원했다고 해서...."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에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

쌍둥이와 문수린이 별 거 아닌 듯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 수린 누나. 루시랑 루미하고 아는 사이예요? 어쩌다가 알 게 된 거예요?"

"음... 글쎄? 우연히 얘기해봤는데 좋은 애들이더라고."

"맞아요. 이번 주에 같이 동아리실에서 놀기로 했어요."

"... 동아리 실에서?"

이호연은 방긋방긋 웃는 루미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동아리 방에 부를 정도면 엄청나게 친한 사이잖아.

아니, 친해진 건 그렇다 쳐.

왜 자신이 그걸 몰랐지?

왠지 소외감이 느껴진다.

요즘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여자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난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호연이랑 놀고 있었구나...."

"넵. 옷 사고 있었어요. 회장 님."

"퇴원 직후라 힘든 줄 알았는데. 나도 먼저 말할걸 그랬네... 아쉬워."

문수린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녀도 이호연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워낙 시간이 부족해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갑자기 마인의 습격 보고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학생회장인 문수린은 현장에 나가야했다.

"그럼 회장님도 같이 노실래요? 저희 이제 떡볶이 먹으러 갈 거예요. 루미가 좋아하는 맛집이 있거든요."

"부, 분명 맛있을 거예요.... 아마도."

"나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일 때문에 나온 거라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고 쓴웃음을 짓는 문수린을 보며, 이호연은 생각했다.

'아까는 문제없다고 했으면서.'

역시 무리한 거구나.

저 누나는 왜 볼 때마다 일이 많은 건 지 모르겠네.

"대신 동아리 방에는 꼭 놀러 갈게."

"네. 아, 거기 보드게임도 많아요."

"제가 케이크도 사놓을게요."

"응. 그럼 그때 같이 놀자. 호연이 너도 올래?"

"... 네. 당연히 갈게요. 그리고 오늘 못 놀았으니까 내일 제가 보러 갈게요."

"고마워. 호연아."

이호연의 말을 들은 문수린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고, 이호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다행히 별 일은 없었네.

"루시, 루미. 수린 누나하고는 언제 친해진 거야?"

"으음...... 얼마 안 됐어."

"어쩌다가 친해졌는데?"

"같은 취미가 있어서... 저희랑 마음이 잘 맞았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아이린처럼 다이나믹한 이유로 친해진 게 아니라 다행이다.

이호연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옷가게를 빠져나온 이호연은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거리로 나왔다.

다음은 루미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을 생각이었다.

카페. 쇼핑. 식사까지.

'이렇게 정석적인 데이트를 한 건 거의 처음 같기도 하고.'

이호연은 다시 양손에 꽃을 잡은 채 거리를 걸었다.

루미가 좋아하는 떡볶이 집애는 금방 도착했고, 주문을 위해 카운터에 다가갔다.

"호연 씨. 이거 보세요. 커플 세트가 있어요."

"커플 세트! 좋다. 이거 먹자."

"그래그래. 커플 세트로 주세요."

"커플 세트 주문이세요~? 두 분 중 어느 분하고 커플이세요?"

"... 네?"

"저희가 이벤트로 떡볶이에 마력 이름을 새겨드리거든요. 그러니까 남자분이 두 분 중 누구 하고...."

"죄송해요. 그냥 이거랑 이거 주세요."

이호연은 급하게 눈에 보이는 다른 메뉴를 골랐다.

떡에 이름을 새겨준다는 듣도 보지도 못한 이벤트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 상 이대로 대화가 흘러가는 건 좋을 수가 없다.

이쯤에서 끊어야지.

"자자. 내가 주문했으니까 저기 가서 앉자."

"나, 나랑 커플 세트를...."

"루시. 굳이 따지자면 내가 먼저...."

"스읍. 조용히 해. 둘다 이리 와."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를 양 팔로 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주문한 메뉴는 금방 나왔고, 티격태격하던 둘은 떡볶이를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 맛있어. 루미. 한 입 먹어봐."

"고마워 루시. 아, 으으응... 맛있어."

다행이다.

이호연은 한 숨 돌리며 떡볶이를 집어먹었다.

저 둘이 싸우는 건 상상도 안간다.

"호연 씨. 이거 한 입 드세요...."

"아, 고마워. 루미."

루미는 자신이 내민 포크를 입에 무는 이호연을 보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꼈다.

이 순간이 좋았다.

루시와 함께 이호연을 공유하는, 아무도 불행하지 않은 지금이 너무나 소중했다.

"루미. 너도 하나 먹어."

"으응. 루시. 고마워."

"이호연 너도 먹고."

"아."

루시도 마찬가지.

이호연에게 떡을 먹인 루시는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은 이호연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루미. 가고 싶은 곳 있어? 아, 맞아. 방탈출 카페! 가고 싶다고 했었잖아."

"루시... 오늘은 힘들어."

"벌써 힘들다구?"

"그치만 몇 시간이나 걸었는 걸. 호연 씨도 피곤할 거야."

식사를 마치고 바깥에 나오자 데이트를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옷가게도 가고 카페도 가고 밥도 먹었으니 지칠 만도 하지.

마음만 먹으면 더 둘러볼 곳이 있겠지만, 이호연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활발한 여자 둘의 데이트를 감당하기에는 정신력이 부족했다.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힘들면 슬슬 돌아갈까? 오늘 많이 놀긴 했어."

"에... 헤어지기 싫은데. 오랜만에 밖에서 봤잖아."

"저도요...."

루시와 루미는 서운한 표정으로 이호연의 양팔에 매달렸다.

... 루시는 그렇다 쳐도 루미는 방금까지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호연은 양 쪽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에 미소를 지으며 둘의 어깨를 감쌌다.

"그럼 너희 기숙사로 갈까? 오랜만에 기숙사에도 가보고 싶네."

"기숙사...? 데이트 더 하고 싶은데."

"저는 쉬는 것도 좋아요...."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에게 딱 달라붙었다.

사실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 데이트도 좋지만, 대련 전 날에 못했던 거 해야지."

"대련 전날... 앗."

"아...."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해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대련 전 날.

이호연의 컨디션을 이유로 섹스를 하지않고 헤어졌었다.

그날 못 한 걸 채워줘야겠지.

'미안한 것도 있고....'

이호연은 그날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루시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닌 것 같았지만, 자신은 계속 신경쓰였었다.

루시의 첫경험.

루시가 기억의 이상함을 깨닫고나서 얼마나 고민했을까.

잠깐이지만, 그 기억이 조금이라도 상처가 될까 계속 걱정이었다. 차라리 그 때 고백할 걸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 지 모른다.

오늘이라도 감사해야지.

"들어가는 건 안 들킬 자신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음... 네가 오고싶다면야."

"저도 호연씨라면 괜찮아요...."

"그럼 내 방말고 루미 방으로 가자."

"루시 방은 안돼?"

"어... 음, 보통 루미 방에서 지내거든.거기 귀여운 인형도 많아."

기숙사는 1인 1실이었지만, 루시와 루미는 대부분 같이 지내고 있었다.

보통 루미 방에 있었는데 루미의 방이 더 깨끗하기도 하고... 루시가 청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셋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호연은 원래도 유지하던 인식저하 결계를 더욱 두껍게 펼쳤다.

"진짜 오랜만이네."

방을 구한 뒤에 이 근처에도 오지않았으니,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익숙한 길과 익숙한 가게들.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여기숙사로 들어갔다.

"이 방이에요."

띠리링­

루미는 스마트워치로 문을 열었고, 루시와 이호연은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인형.

이호연은 커다란 토끼인형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호연 씨. 기억하시네요...."

"당연히 기억하지."

루미와 데이트에서 땄던 인형.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구나.

인형 옆에는 친구들처럼 귀여운 인형들이 서있었다.

"그 옆에 있는 아이는 루비고, 얘는 다이아에요."

"귀엽네. 나도 하나 사볼까."

"이호연. 빨리 여기 와. 루미 기숙사에 귀여운 게 많거든."

이호연은 귀여운 가방을 들고있는 루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할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잊자.

이호연은 오랜만에 편안한 감정을 느끼며 루미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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