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2화 〉 482화. 달콤한 승리 (2)
* * *
아카데미의 vip 병실은 입원실 최상층에 위치해있다.
최상층 위에는 옥상이 있는데, 당연하게도 여러 사건사고를 위해 막아놓은 상태였다.
살면서 옥상 근처에도 가본적이 없던 이호연은 침을 삼키며 임솔에게 물었다.
"… 진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나 아카데미 교수야. 설마 옥상에서 바람 좀 쐬었다고 징계까지 당하겠어?"
끼이익.
임솔이 억지로 연 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사람 키만큼 솟아있는 안전펜스.
곧바로 옥상을 가로지른 임솔은 펜스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게 설치되어 있으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호연은 임솔을 따라 펜스 앞에 섰다.
"사람들이 잘 보이지?"
"… 네. 그렇네요."
임솔은 펜스에 손을 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은 15층이나 됐으니, 아카데미 내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이 몸에는 고소공포증이 없는 모양.
이호연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개미 같네요."
"응. 가끔씩 중요한 고민이 생기면,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곤 해.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걸 보면 내 고민이 엄청 작아 보이곤 하거든."
"교수 님 연구실은 2층이잖아요."
"… 마법을 이용하면 17층의 시야까지 볼 수 있어. 이상한 지적 하지 마."
"넵."
이호연은 임솔을 따라 아래를 보는 것에 집중했다.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생도들.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달려가는 남자.
자식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부부.
각자의 삶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한 번도 이렇게 본 적이 없었으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 이게 기분 전환인가.'
이곳에 루시퍼가 왔다 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
나름 분위기가 좋긴한데, 왜 여기로 자신을 데려온걸까.
이호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임솔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응."
"그럼 제가 들어드릴게요."
"당연히 네가 들어줘야지. 우리 일이잖아."
"아…."
이호연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얘기라면 더욱 집중해야지.
"대련도 끝났으니까 확실히 정해야지."
"… 넵."
임솔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는 제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련 전에는 뭐든지 시킬 거라면서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막상 이기고 나서 저렇게 귀여워지는 건 뭘까.
"왜 그렇게 긴장한 거야. 이기고 싶던 거 아니었어?"
"그 전에…. 제가 이긴 거 맞죠?"
"당연하지. 덕분에 입원까지 했는데."
"아. 다행이다. 그거로 엄청 고민했거든요."
"고민 할 게 있어?"
"마지막까지 방심 안 했으면 이겼다거나, 제대로 된 승부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중요한 건 마지막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냐는거야.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않아."
임솔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뭘 하고 싶은 지 정해야지. 이기면 뭐든 지 다 해준다고 했잖아. … 너무 심한 건 안 했으면 좋겠지만."
임솔은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 어쩌지.'
고민하는 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였다.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본래 계획은 단순했다.
내가 이겼으니 이리 와라. 쿠헤헤.
꺄, 꺄악….
…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좀 힘드네.
게다가 하필 둘 다 입원 중이라 곧바로 뭘 할 수도 없다.
자신은 괜찮아도 임솔은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않았다.
"교수 님. 제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죠?"
"정말 좋아해?"
"사랑하죠.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노력을 하는 남자가 어딨어요."
"몇 번째로 사랑하는데?"
"…."
이호연은 임솔의 눈을 피했다.
가슴을 찌르는 임솔의 말에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다시, 아래를 바라본다.
개미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은 뒤, 입을 열었다.
"… 당연히 첫 번째죠."
"나랑 있을 때는 내가 첫 번째고, 아영이랑 있으면 아영이가 첫 번째고?"
"저기, 임솔 씨. 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당신 이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렇게 갚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으음. 그렇지만… 크흡."
콜록. 콜록.
임솔은 말을 하다 말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찬 바람을 너무 맞았을지도 모른다.
"몸도 안 좋으면서. 참…."
겉옷이 있었으면 겉옷이라도 벗어줬을 텐데.
이호연은 임솔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여자가 되면 좋잖아. 나는 호연이 너 밖에 없거든."
"… 일단 몸부터 낫고 생각해요."
슬픈 이야기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사정 상 누구 한 명을 우선할 수는 없다.
가짜 던전 계획으로 모두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끼익.
그때, 임솔이 억지로 열었던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백아영은, 안에 있는 둘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솔이 너. 내가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아영아… 콜록."
"아니, 여… 호연이도 여기 있었네. 다들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뭐 하는 거야."
"잠시 바람이라도 쐬려고요."
이호연의 말에 백아영은 눈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치료에 관해서는 백아영도 화를 냈다.
"… 다들 빨리 병실로 돌아가."
"넵."
"응…."
*
'솔이도 빨리 나으면 좋겠네.'
아무리 이호연이라지만 환자한테 야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고생한만큼 보상은 있어야지.
임솔이 낫자마자 연구실로 쳐들어갈 생각이다.
주르륵.
이호연의 이마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호연아. 온도는 괜찮아?"
"괜찮긴한데….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없다니까. 애초에 감기가 아니라 물수건은 안 해도 돼."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도 환자잖아."
"아니야. 나는 다 나았어. 봐봐."
"나도 다 나았으니까 퇴원한 거지…."
이호연은 자신의 이마에 올라와있는 물수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침대 옆에서 자신을 간호하는 건 남다은.
남다은은 자신의 건강함을 알리기 위해 허공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호연이 집에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퇴원했기 때문.
임솔과 옥상에서 데이트를 즐기다가 백아영에게 걸린 후,몸이 다 나았다는 이유로 퇴원했다.
아직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있어도 됐을 것 같은데.
물론 백아영에게도 생각이 있었겠지.
설마 백아영이 임솔과 놀고 있었다는 이유로 퇴원시키진 않았을 거다.
… 아마도.
"집에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
"… 그래. 해주면 고맙긴 하지."
괜찮으니까 그만하라고 해봤지만, 울상을 짓는 걸 보니 말리는 자신이 미안해진다.
하지만 물수건은 좀 그렇네. 계속 물이 흘러내린다.
이호연은 양 팔을 든 채 남다은에게 말했다.
"다은아. 나 추워. 몸 온도가 떨어지는 느낌이야."
"어, 어… 수건 온도를 올려줄까?"
"아니. 내 옆에 누워줘. 힐링이 필요해."
"음…?"
"감기도 아니잖아. 안 옮아."
"으응. 알겠어."
남다은은 이불 사이로 꾸물꾸물 들어와 이호연의 옆에 누웠다.
"음… 힐링이 되는 거 같아."
"호연이가 좋다면야. 뭐…."
남다은은 이불 사이로 꾸물꾸물 들어와 이호연의 옆에 누웠다.
"음… 힐링이 되는 거 같아."
"호연이가 좋다면야. 뭐…."
이호연은 물수건을 마법으로 이마에 붙인 채 옆으로 누워 남다은을 끌어안았다.
치료보다 이 편이 더 빨리 나을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몸을 만지다보면 정신적으로 안정이 된다.
"으, 으응. 호연아. 이따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잠깐 프랑스 아이리스 길드 하고 연락을 해보려고. 거기 생포해놓은 인큐버스한테 루시퍼에 대해 물어볼 게 있거든."
"아…. 맞아.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어. 호연아. 루시퍼에 관한 일이야."
"오, 생각난 게 있어?"
"생각난 건 아니고… 릴리아나 씨가 있어서 못 말했어. 레베카 씨의 기억엔 없었지만, 분명히 그랬거든. 릴리아나 씨한테 금제가 걸려있다고…."
"금제…?"
금제.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이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했지만,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본다.
"릴리아나 씨의 몸에 금제가 걸려있다고… 눈치채지 못하는 거냐고 했어. 그것도 전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몇 번이나…."
"… 음."
릴리아나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제라니.
단어부터 너무 불길하잖아.
도대체 릴리아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알아갈수록 점점 꼬이는 것 같다.
"호연아…. 릴리아나 씨는 괜찮은 거지? 모두 걱정하고 있어."
"응. 괜찮아. 내가 있잖아."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찡그리던 얼굴을 풀고 남다은을 끌어안았다.
날 생각해서 말해줬는데 걱정시키면 안 되겠지.
"그 말을 들으니까 빨리 나가봐야겠네. 말해줘서 고마워. 다은아."
"으응. 괜찮아."
이호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남다은을 한 번 끌어안아주고, 방을 나왔 나왔다.
확실히 힐링을 했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한다.
나 : 아이린 씨. 저 지금 갈 건데 프랑스하고 연결 좀 해주세요.
아이린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집 밖으로 걸어갔다.
바로 옆 집이니 확실히 편하긴 하네.
아이린:5분이따가와.금방준비할게.
"음…5분."
다시집에들어가긴애매한시간.
이호연은엘리스의집앞에서서마력을사용했다.
임솔이말해준것처럼.
하늘에서아래를내려다본다.
마치 먼지같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딱히달라지는건없는데."
하지만 무슨감정인지는알것같다.
이호연이이렇게고생하는이유는자기자신을위해서도있지만이세상을위해서도있다.
물론아무도몰라주지만,이세계를좋아하는건맞으니까.
도시의다크히어로.이호연.
"… 지랄.배트맨도아니고."
이호연은헛웃음을지으며큭큭댔다.
다크 히어로가 되고 싶진 않다. 충분히 보상은 받아야지.
적당히 시간을 떼운 이호연은 익숙한대문과정원을지나열려있는현관으로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아이린은 이호연을 반겼다.
"왔구나? 준비는 끝났으니까 이쪽으로와."
"네.엘리스는어딨어요?"
"잠시외출."
이호연은아이린의뒤를따라아이린의방으로들어갔다.
방학동안자주왔으니첫경험은아니었다.
"여기.마력구에마력을불어넣어.WildGladiator하고Strangenightmare한테도다전해놨으니까."
"…누구요?"
"네가데려온인큐버스.이름이Strangenightmare라던데?"
"아."
지옥의네이밍센스에깊게파고들고싶지는 않았다.
이호연은푸른마력구앞에앉아마력을불어넣었다.
스르륵.
마력을빨아들인마력구는눈앞에화면을띄웠고,곧케이론과알베도의얼굴이보였다.
오랜만이군.인간.
…아,안녕하십니까.
음?뭐지.StrangeNightmare.왜저인간에게존댓말을하는건가?
…닥쳐.
이호연은미소를지었다.
잘지내고있는걸보니뭔가신기하네.
알베도도 표정이 많이 좋아졌다. 친구랑 있어서 그런걸까.
"오랜만이야.케이론,알베도.물어볼게있어서연락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