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8화 〉 478화. 임솔 (4)
* * *
또르륵
달콤한 초코 라테가 잔에 담긴다. 새하얀 도자기로 만든 고급 찻주전자.
보통 이런 주전자에서는 홍차가 나오는 게 정상이지만, 임솔의 연구실에서는 항상 초코 라테가 나왔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마법이라도 대처법이 있어. 마법사라면 그걸 구별할 수 있어야 해.
그래요?
홀짝.
임솔은 초코 라테를 입으로 가져가며 이호연에게 마법 강의를 이어갔다.
이호연이 아직 임솔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던 시점. 그녀는 스승이자 마법사 선배로서 이호연에게 자신이 보고 느낀 걸 전하곤 했다.
나는 마법사의 눈이라고 불러. 마법은 결국 인간이 사용하는 거니까.
마법사의 눈?
응. 마법에는 목적이 있거든. 살상, 보조, 함정, 방어… 같은 것들 말이야. 그 목적을 알아내면, 대처법도 생각할 수 있어.
이호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임솔의 말을 대충 넘어갔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핵심 술식.'
마법의 핵심 술식에는 마법의 목적이 담긴다.
임솔은 핵심 술식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마법의 본질을 꿰뚫은 것이다.
콰아아아앙!
"이런 씹…."
이호연은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다가오는 빛기둥을 피해 결계를 펼쳤다.
혹시나 이해하지 못했을 까봐 직접 몸으로 재현해주는 모습이 참 고마웠다.
지잉
이호연은 금빛으로 빛나는 개안으로 임솔의 마법을 꿰뚫었다.
'오로지 파괴만 생각하고 있어.'
임솔이 사용하는 마법은 모두 순수한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핵심 술식을 담고 있었다.
마천궁 내부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만큼, 이 이상으로 복잡한 조작이 가능하진 않을 터.
자신의 '작전'이 제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크읍!"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좁혔다.
마천궁을 유지하느라 마력이 물 새듯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천궁을 해제하면 임솔의 공격이 거세질 테니, 룬의 결계에 전력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대신 마력을 온몸에 회전시켰다.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마력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체인 프로즌."
이호연은 아크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푸른 마력 구에서 쏟아지는 냉기가 임솔의 발 밑에 폭발했다.
"너무 느려. 제자야."
마법진을 그리는 공정을 생략하고 쇄도하는 이호연의 마법.
눈으로 따라올 수 없는 속도였지만,임솔은 정확히 마법이 맞을 곳에만 쉴드를 생성했다.
경험에 의거한 정확한 예측.
임솔은 잠시 뒤로 물러나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 우리 제자는 무슨 생각이지?'
서로의 진심을 꺼낸 이후로, 전황은 임솔에게 유리해졌다.
이호연은 수비적으로 임솔의 마법을 피하며 대련장 내부에서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아니, 오지 않으면 내가 가면 돼.'
임솔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련장에 박혀있는 4개의 빛기둥과 수 십 개의 마법진.
이 상태는 자신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임솔의 시선은 다시 이호연을 쫓았다.
'저 마법진들이 더럽게 신경 쓰인단 말이야.'
이호연은 입술을 깨물며 다가오는 빛기둥을 피해냈다.
임솔의 등 뒤에 떠있는 마법진은 여전히 빛을 뿜어냈다.
임솔이 마력을 불어넣기만 하면 마법이 쏟아져 나오는 마법진들.
마천궁이 없다면 그 즉시 무수한 마법이 자신을 강타하겠지.
'생각하자. 어떻게 극복해야 하지?'
임솔은 천재 마법사다. 아니, 천재라는 단어로 설명이 될까. 그녀는 완벽한 마법사였다.
매일같이 마력의 수준이 높아지는 건 물론이고, 싸움을 이어가는 순간마다 강해진다.
이호연은 마법사 협회장인 아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아마 10년이면 솔이를 따라잡을 수 있겠지.
재능 자체는 이호연이 우위였지만,문제는 임솔의 재능이 이호연을 만나며 더욱 개화했다는 것.
그리고 이호연과 임솔은 마법을 접한 기간이 10년 이상 차이난다는 것이다.
본래 지금 당장 임솔을 이기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했기에, 자신만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한다.
이호연은 항상 그의 재능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거나, 적의 약점을 찾아냈다.
임솔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문제인 것은 마법사로서의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
이호연이 자신하던 마천궁은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파훼당했다.
마력의 힘과 마력의 속도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고,사용하는 마법까지 임솔보다 위계가 낮았다.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는 건 아니야.'
중요한 순간에 한 두번은 임솔이 사용하는 마법과 맞먹는 마법을 창조해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이호연이라고 해도 엄청난 마법을 연달아 만들어낼 순 없다.
'… 내 비수는 지옥의 마력이야. 어떻게든 틈을 만들고, 찔러 넣는다.'
레베카를 상대할 때는 마천궁에 지옥의 마력을 섞는 방법을 택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레베카는 룬의 결계를 이용해 마천궁과 직접적으로 영역 다툼을 시도했다.
그렇기에 지옥의 마력이 들어간 마천궁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임솔은 레베카와 달리 마천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임솔이 마천궁을 극복한 이상, 뚫어내야 하는 입장은 임솔이 아니라 이호연으로 바뀌었다.
임솔의 마력은 초단위로 변한다.
마천궁에 지옥의 마력을 추가해봤자, 임솔의 마법을 역산하는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허를 찔러야 해. 아니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든다.'
임솔이 전혀 생각치 못한 타이밍에 지옥의 마력으로 파고든다.
그게 승리 플랜이다.
생각해놓은 방안은 여러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감정 증폭.
이호연은 마천궁을 전개함과 동시에 임솔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자존심. 승부욕. 경쟁심. 공격성….
대련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증폭했다.
본래 진심 모드에 들어간 임솔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
처음에도 그랬고, 두 번째에도 그랬다.
거대한 마력을 휘두르는 데에는 약점이 필요한 법.
평소에 감정을 절제하는 정신력까지 모두 마법에 쏟아붓고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겠지.
공격적으로 바뀌는 만큼, 틈은 늘어난다.
"호연아, 설마 포기하진 않을 거지…? 나도 멈추지 않을 거야!"
"… 네네. 걱정하지마세요."
"응. 조금 더 즐겁게 해줘!"
"기절하기 전까지는요!"
콰이앙!
이호연은 쓴 웃음을 지은 채 바닥을 구르며 임솔의 마력을 피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으니, 임솔도 전력을 다해 부딪힐 거다.
틈을 노릴 기회는 남아있다.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회수한 뒤, 자신의 몸에 갑옷처럼 둘렀다.
'블링크.'
마법사간의 싸움에서 블링크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커다란 틈.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는 상대가 블링크를 할 틈을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임솔의 마법을 피하며 대련장 내부를 구르던 이호연은 대련장 곳곳에 룬의 결계를 설치했다.
'룬의 결계의 극의.'
레베카의 극의를 따라 하진 못하지만, 흉내 낼 수는 있다.
룬의 결계 내부의 마력은 이미 자신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
'블링크.'
스르륵
이호연의 시각이 360도 돌아간다. 온몸이 재구성되는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
방금까지 보이던 임솔의 얼굴 대신 그녀의 뒤통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 번 더. 이번엔 옆구리가 보인다.
한 번 더. 임솔의 당황한 눈이 보인다.
몇 번의 블링크로 감각에 적응한 이호연은 임솔의 사각에서 몸을 숨겼다.
'… 사라졌어?'
임솔은 주변을 살폈다.
이호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의 결계는 저번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습격당했던 기억을 되새긴 임솔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룬의 결계를 이용해 숨은 것이라고 판단하자마자 펼쳐지는 쉴드.
타아아앙
동시에 눈앞에 이호연의 발이 나타났다.
마력이 담긴 발차기는 큰 궤적을 그리며 임솔의 쉴드를 강하게 두드렸다.
'역시 막혔나.'
이호연은 곧바로 쉴드를 박차며 임솔과 거리를 벌렸다.
룬의 결계 내부를 가속하고 있었으니, 임솔의 빛기둥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아… 후우…."
이호연은 숨을 돌리며 임솔을 바라봤다.
임솔은 흥분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틈이 안 보이네.'
"설마 이게 끝이야? 호연아. 자신만만했잖아."
"… 큭."
임솔은 여유로운 듯 웃었고, 이호연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여력이 남아있다.
'쉐도우 디스트로이어.'
이호연의 몸을 중심으로, 수 십 개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파고든다.
동시에 임솔의 빛기둥 하나가 사라지며 등 뒤에 있던 마법진이 작동했다.
오망성진(五???).
임솔의 손끝에서 뜨거운 불꽃이 흘러나온다.
여러 갈래로 갈린 마력은 순식간에 규모를 넓혔고, 빛의 기둥을 중심으로 한 오망성이 그려졌다.
이호연의 그림자와 격돌한 오망성의 불길은 엄청난 충격파를 발생시키며 대련장을 울렸다.
한 사람이 이뤄냈다기엔 턱없이 막대한 중압감.
순식간에 녹아내린 그림자에 눈을 찌푸린 이호연은 마력을 뿜어냈다.
'그래셜 웨이브. '
'다크니스 디멘션.'
이호연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법의 핵심 술식을 아크에 집어넣는다.
핵심 술식을 빨아들인 아크는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호연은 다시 마력을 역류시켰다.
거대한 오망성을 가로지르는 전격의 섬광.
조금이라도 틈이 나오면 서로의 결계를 뚫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수 십의 마법이 오고 갔다.
자신이 마법을 사용하는 건지, 마법에 끌려가는 건 지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집중 상태.
매 순간순간이 위기인 격렬한 마법의 교환이 이어졌다. 물리 법칙을 거절하려는 듯 마력이 치솟았고,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인 마법을 아무렇지않게 쏘아댔다.
콰드드드득!
불꽃이 타오르고 파도가 범람한다.
마력의 구체가 차가운 냉기를 쏟아내고, 시야를 빼앗는 어둠이 서로를 감싼다.
"호연아. 우리의 대련을 모두가 보고 있어."
"… 또 난리가 나겠네요."
"응. 네 가치도 더욱 올라가겠지."
임솔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제자가 고평가를 받는 것.
임솔이라는 사람이 힘들게 쌓아온 명예를 이호연도 공유받는 사실이 행복했다.
이호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유리하다고 말하기 힘든 마력의 격류 속에서, 이호연은 느끼고 있었다.
'… 내가 진다.'
온몸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마법을 쏘아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전투 감각이 극대화된 몸이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블러드 비트의 과부하로 마력을 뽑아낼 때마다 마력 회로의 고통이 심해진다.
지금은 대등하더라도 금방 자신에게는 한계가 온다.
'잠시만 몸을 추스리면…!'
푸확.
잠깐의 방심이었다.
이호연의 룬의 결계에 임솔의 마력이 스며든다.
동시에 룬의 결계가 꿰뚫리고 단단한 마력 화살이 이호연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아아악…!"
불로 지지는 것 같은 아픔.
삐이. 삐이. 삐이.
대련장의 마법진이 위험상태라는 알림을 보냈다.
아마 조금만 더 고통을 느낀다면 강제로 대련이 중지되겠지.
하지만 심각한 몸 상태와 다르게 머리는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솔이 교수 님. 이번에 끝내겠습니다."
"얼마든지. 네 최선을 보여줘."
자신의 유리함을 알고 있는 건 임솔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스러운 우리 제자.'
임솔은 이호연과 눈을 마주 봤다.
아직도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대 이상을 보여준 것으로도 모자라 저런 투지를 보여주는 것이 너무 기뻤다.
임솔은 제자의 마지막 열정을 정면으로 받아내기 위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호연은 몸에 남은 마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높은 자연치유력이 그의 마력 회로를 마지막까지 짜내도록 도와줬다.
손을 앞으로 내민다.
구상하는 것은 검은 태양.
자그마한 불꽃이 떠오르고, 이호연의 손에서 나오는 불길한 마력이 눈앞의 불꽃을 감쌌다.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검은 불꽃은 등장하자마자 존재감을 과시하며 대련장의 공기를 바꿨다.
"… 뭐야?"
임솔은 눈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이호연이 사용하던 마력과 다른, 이질적인 마력.
격렬한 마력이 압축되며 점점 큰 구체가 완성된다. 대련장의 마법진 또한 그 위험함을 알리듯 마구 진동했다.
'인큐버스…?'
이름은 기억나진 않지만, 인큐버스가 쓰던 기분 나쁜 마력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호연이 사용하는 건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저급한 마력이 아니었다.
사나우면서도 순수한 파괴력을 담은 마력을 극한까지 압축한 마법.
임솔은 이호연의 마법에 대응하기 위해 오망성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검게 물든 태양이 떠오른다.
이호연은 자신이 소환한 검은 태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대로 공방을 이어갔다면 먼저 쓰러지는 건 자신이었겠지.
아쉽게도 임솔의 틈을 만드는 전략은 실패였다.
그 대신. 감정 증폭을 이어가며 육탄전을 감행했고, 임솔의 대화를 받아주면서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어깨는 마력 화살에 꿰뚫린 치명상까지 있었다.
마법사간의 싸움은 구도가 무너지는 순간 대부분 끝난다.
서로의 마력은 이미 파악완료.
변수는 없었고,이호연의 체력은 떨어진 상태에 심한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임솔은 당연히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임솔이 보기에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승부를 총력전으로 만든 것이 이호연의 전략이었다.
승리로 가기 위한 비수. 지옥의 마력.
지옥의 마력을 공개함과 동시에 승리를 가져갈 수 있도록.
"… 이클립스."
이호연은 몸을 비틀거리며 검은 태양을 대련장에 풀었다.
동시에 거대한 충격이 대련장의 마법진을 강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