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75화 (475/648)

〈 475화 〉 475화. 임솔 (1)

* * *

"하아…."

루시퍼가 사라진 후, 스칼렛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입 안에서는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일단은 남다은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다은 양. 괜찮은가요? 눈을 크게 뜨세요. 제 손가락이 몇개죠?"

"네, 네. 하나요. 괜찮은 것 같아요."

"음, 스칼렛. 저 남자는 누구야? 저렇게 강한 사람이 아카데미에 왔다는 말은 못 들었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외부인인 건 확실한데…."

스칼렛은 우울한 표정인 릴리아나를 슬쩍 확인했다.

고개를 든 릴리아나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는 지옥의 마력을 사용하며 릴리아나의 이름을 계속 불러댔다.

과연 릴리아나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 그녀가 말해주기 전까진 스칼렛은 알 수 없었다.

"릴리아나. 모르는 사람맞지? 상대는 널 아는 거 같던데."

"응. 정말 몰라. … 믿어줘."

"당연히 믿지. 걱정하지 마."

레베카는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릴리아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릴리아나다.

어른인 자신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걸 느낀 건 스칼렛도 마찬가지.

스칼렛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린과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린의 뒤에는 수많은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서있었다.

"아이린 님, 설마 한국 지부의 길드원을 모두 데려온 건가요?"

"응. 혹시나 해서. 사람들의 흐름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역시 1 팀장님의 판단력은 대단하십니다. 저번에 제가 저지른 무례는 릴리아나 님과 함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사과받을 일이었구나…."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을 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자. 너희는 의료팀에도 들려야 하잖아."

"맞아. 릴리아나, 배고프지 않아?"

"… 응, 닭꼬치도 못 먹었어. 나 배고파."

릴리아나는 절 반 정도 먹고 바닥에 떨어진 닭꼬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몇 번 씹자마자 루시퍼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린은 릴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플만하지. 이미 오후 대련이 시작되었으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구? 애기 아빠 경기가 시작하진 않았겠지?"

"그 정도는 아니고… 앗, 큰일이야!"

"아이린 님, 왜 그러십니까?"

"엘리스의 대련 시간이잖아. 이럴 시간이 없어. 이미 시작했을 거야. 사진을 찍어야 해. 빨리 돌아가자."

"엘리스 양의 대련이 시작했다고요?"

아이린은 스마트워치를 보며 다급하게 달려갔고, 남다은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엘리스의 다음이 바로 자신의 차례였기 때문이다.

"다은 양. 일단 의료팀으로 가는 게 좋아 보여요. 대련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남다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강하게 검을 쥐었는지, 손바닥에는 붉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핀다.

느껴지는 피로는… 없다.

오히려몸은 가벼웠고, 머리는 맑았다.

이대로 계속 검을 휘둘러도 전혀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싸우고 싶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남다은의 몸을 가득 채웠다.

"괜찮을 것 같아요. 바로 대련을 해도."

"… 다은아. 정말 괜찮겠어?"

"네. 제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지금 싸울 수 있어요."

레베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남다은을 바라봤다.

'… 러너스 하이.'

극한까지 다다른 몸에서 엄청난 엔도르핀이 나오며 고통 대신 희열이 느껴지는 상태.

레베카도 저 느낌을 알고 있다.

저 상태에 다다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취감과 행복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몸이 극한까지 몰린 상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속일 뿐, 과한 출력을 내고 있는 게 사실.

지금 상태를 길게 유지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 일단 돌아가면서 생각하자."

러너스 하이를 처음 겪는다면, 자신이 말해도 듣지 않겠지. 뒤에 찾아오는 후폭풍을 한 번은 경험하게 만드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상황만 막으면 된다.

레베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린의 뒤를 따랐다.

*

대강당에 있는 대련장.

관객들로 둘러쌓인대련장의 내부엔 뜨거운 불길이 가득했다.

화려한 대련을 보는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집중했고, 잠시 후 불길 한 가운데에 있던소녀의 목에 검이 도달했다.

[그만! 김진혁 교수의 승리입니다.]

심판의 판정과 동시에, 불길로 둘러쌓였던 대련장의 마법진이 꺼졌다.

"아악! 억울해!"

"루시…! 고생했어."

"루미만 있었어도… 으으."

"으응. 아니야. 너무 멋있었어."

루시는 대기실에서 나온 루미에게 안기며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대련을 관람하던 관람석은 박수를 치며 방금 대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와… 저거 뭐야. 불화살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데?

­ 핵심술식이라고 했었지? 자기가 쓰는 마법의 이해도가 엄청나.

관객석에 앉은 이호연은 대련장에서 내려오는 루시를 보며 아쉬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스읍… 좀 아쉽네. 질 거 같긴 했지만."

본래 루시와 루미는 한 팀이어야 강한 설정이다.

공격을 담당하는 루시와 방어를 담당하는 루미.

대련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화력은 넘쳐났지만, 루시 혼자서 김진혁 교수의 공세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대련 중에 제일 잘했네."

교수들이 설렁설렁 하긴 했지만, 교수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인 생도는 루시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직접 강의한 핵심 술식 덕분에 루시의 마법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루미와 함께라면 좋은 듀오가 되겠지.

"… 근데 다들 어디 있는 거야?"

이호연은 오후 대련이 시작하기 전까지 백아영과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의료팀으로 향한 뒤, 이호연은대강당에 자리를 잡았다.

누구라도 같이 볼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왜 혼자 경기를 보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자.

루시와 루미는 경기 직전까지 안 보이다가,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잠깐 인사만 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엘리스는 한국 지부장과의 경기를 무조건 이겨야 한다며 계속 대기실에 있었고, 문수린도 쌍둥이와 비슷한 순간부터 안보였다.

상대인 임솔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실에 박혀있다가 경기 직전에 나타날 생각인 것 같았다.

'… 나 왕따인가?'

설마 관객석에서 혼자 앉아있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릴리아나 쪽으로 가볼 걸 그랬나?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도 보이지않았다. 이제 슬슬 대련장으로 와야할텐데.

[바로 이어지는 경기는 엘리스 생도와 강효린 박사의 대련입니다. 프랑스 아이리스 길드의 정식 후계자가 된 엘리스 생도의 실력을 이번에 공개합니다!]

짝짝짝­

이호연은 진행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둥근 대련장에는 엘리스와 강효린이 올라왔다.

­ … 잘 부탁드립니다. 강효린 박사님.

­ 네. 엘리스 생도와 대련이라니 영광이네요.

이호연은 엘리스의 불편한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한국 지부장과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을 구경하는 건 굉장히 재밌었다.

저 사람은 사람을 살살 긁는 제주가 있다.

"누가 이기려나."

이호연은 엘리스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기대하며 대련을 지켜봤다.

시작 신호가 울리자마자 엘리스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 결계.

차가운 얼음 결정이 엘리스의 몸을 덮었다.

오른손의 검에도 푸른 결정이 얼어붙는다.

프랑스에서 특훈을 한 엘리스의 마력은 몇 배로 성장했다.

선천적 마력 장애가 치료된 후, 막혀있던 성장이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효린은 엘리스의 얼음 송곳을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엘리스 니, 아니. 엘리스 생도. 차가워요!"

"강효린 박사 님. 선공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배려가 아니라… 으앗!"

엘리스가 만들어낸 얼음 창이 파괴적으로 쇄도했다. 날아드는 얼음 창의 틈으로 엘리스의 날카로운 검까지 파고들었다.

무서운 공세에 강효린은 마력을 흐트러트리며 저항하려 했지만, 엘리스의 마력은 강효린의 생각보다 정교했다.

엘리스의 검이 스칠 때마다 강효린은 점점 뒷걸음질 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대체 한 달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여러 가지 있었네요."

Wild gladiator와 함께했던 한 달은 기억하기 싫은 시간이었다.

엘리스는 손가락을 움직여 술식을 그렸다.

얼음 결정이 엘리스의 발 주변으로 퍼지며 대련장을 가득 채웠다.

강효린이 발을 구르며 마법을 깨트렸지만, 엘리스는 얼음과 함께 강효린을 압박했다.

"읏…."

강효린은 표정을 찌푸리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얼음을 털어냈다.

방어 술식을 그리며 마력을 흐트러트렸지만, 조여 오는 엘리스를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콰과광!

결국 강효린의 등 뒤가 얼음으로 막히고, 엘리스에게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 항복."

"고생하셨습니다. 강효린. … 박사님."

강효린은 자신의 목 앞에서 멈춘 검을 보며 두 손을 들었다.

봐주면서 할 생각이었지만, 설마 질 줄이야.

"하아…. 말도 안 돼."

"봐주신 거 다 알아요. 감사합니다. 강효린. … 박사님."

"네네. 고생했어요. 엘리스 생도."

그나마 엘리스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줘서 다행일까.

강효린은 터덜터덜 걸으며 대련장을 내려갔다.

와아아아! 관객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처음으로 교수를 압도하는 생도가 나왔으니 당연히 뜨거운 반응이 나올 수밖에.

이호연 또한 박수를 치며 엘리스의 경기력에 감탄을 보냈다.

"진짜 엄청 강해졌네."

한국 지부장인 강효린 박사도 약한 편은 아닌데, 저렇게 압도할 정도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

수백 명의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다음 경기는 떠오르는 유망주인 남다은 생도와 아카데미 최고의 검술 교관과의 대련인데요… 잠시만, 뭐? 아. 죄송합니다. 아직 남다은 생도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 다은이는 어디 간 거지?"

곧 경기가 시작되는데, 남다은은 아직도 대기실에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릴리아나나 스칼렛, 레베카와도 이때쯤 합류하기로 했는데… 다들 어디있는거야?

­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때, 남다은이 대련장으로 뛰어올라갔다.

아슬아슬하게 도착.

땀에 머리가 젖은 걸 보면 열심히 뛰어온 모양이다.

'… 근데 뛰는 거 만으로 저렇게 젖을 수 있나? 심하게 땀을 흘린 것 같은데.'

이호연이 의문을 느끼자마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기 아빠. 여기 있었구나?"

"아, 레베카 씨. … 어?"

레베카의 뒤에는 릴리아나와 스칼렛이 서있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린까지 함께 있었다.

... 당신이 왜 거기 있어?

"아이린 씨? 뭐야. 서로 아는 사이에요?"

"으응.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이웃이잖아."

"엘리스의 경기… 역시 끝났구나…. 대기실로 가야겠어."

아이린은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린이 엘리스의 경기를 놓칠 정도라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도 있던 걸까.

이호연은 빠르게 계단으로 내려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들이 언제 알게된 건지 궁금하긴했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자. 당장은 왜 늦었는 지가 궁금했다.

"어디 있다 온 거예요?"

"그게… 읍. 읍."

"아무것도 아니야. 애기 아빠. 재밌는 일이 있었거든. 경기가 끝나면 알려줄게."

"뭐예요. 그게."

레베카는 릴리아나의 입을 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혹시 서프라이즈라도 하는 걸까.

이호연은 스칼렛과 릴리아나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남다은뿐만 아니라 다른 세 명도 모두 지쳐 보였다.

상태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정말 심각한 일이라면 먼저 말하겠지.

그리고 지금은 할 일이 있다.

'다은이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네.'

곧 남다은의 경기가 시작한다. 이호연은 시선을 대련장으로 집중했다.

"잘 부탁한다. 남다은 생도."

"… 네. 잘 부탁드려요. 교수 님."

남다은은 자신을 가르치던 검술 교수와 마주 섰다.

두근. 두근.

심장이 두근거린다.

눈앞의 교수가 적은 아니었지만, 남다은은 끌어 오르는 투지를 잠재우지 못했다.

마력을 끌어올렸다. 공간을 지배하는 남다은의 마력이 대련장 전체를 휘감았다.

"음?"

아카데미의 검술 교수인 서정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다은 생도가 1학년 생도 중에서 최상급인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기운이 약했다.

게다가 겉보기에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남다은 생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요?"

"… 괜찮습니다. 너무 좋아요."

[자, 다시 한번. 떠오르는 유망주 남다은 생도와 아카데미 최고의 검술 교수 서정원 교수가 맞붙습니다!]

삐이이이­!

서정원 교수는 남다은을 걱정했지만, 시작 신호는 이미 울려버렸다.

그는 검을 든 채 남다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시작 신호를 들은 남다은은 심호흡을 반복했다.

서정원 교수는 감사하게도 자신의 선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도인 자신에게 핸디캡을 주겠다는 뜻이겠지.

"… 후우."

남다은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사실, 검술을 그렇게 좋아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감금당한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 후에는 이호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훈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남다은은 어깨를 떨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가득 채우는 상쾌한 감정을 한껏 즐기며, 검을 쥐고 휘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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