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화 〉 474화. 실전 대련 (5)
* * *
루시퍼는 눈앞의 인간을 노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저 눈.
릴리아나와 비슷한 눈이다.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찍어 눌러 버리겠다는 차가운 눈.
"나쁘지 않아…."
공간을 뛰어넘는 검을 휘두르는 저 여자는 루시퍼에게도 흥미로운 소재였다.
그녀의 공격은 자신에게도 위협적이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즐거운 오산이었다.
마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버러지라고 생각했건만, 자신의 힘이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탓일까.
릴리아나가 아닌 버러지를 상대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유흥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루시퍼는 붉은 머리 인간의 뒤에 서있는 릴리아나를 보며 물었다.
"릴리아나 칼리오페. 네가 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자신에게 걸린 금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거냐?"
"닥쳐.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른다니까? 미친 스토커 자식아!"
콰드드득!
릴리아나의 마력이 루시퍼의 몸을 강타했고, 동시에루시퍼가 쏘아낸 마력이 남다은이 서있던 곳을 꿰뚫었다.
남다은은 몸을 가속해 공격을 피해냈다. 저런 공격은 스치기만해도 치명상이었으니, 집중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에잇!"
마력을 움직여 지옥의 마력을 털어낸 릴리아나는 다시 레베카의 뒤에 숨었다.
루시퍼를 상대하는 전형은 간단했다.
정면에는 남다은과 스칼렛.
후방에 레베카와 릴리아나.
두 명이 루시퍼를 상대하는 동안 레베카와 릴리아나가 방어를 담당한다.
마력에 흠뻑 젖은 대검을 들고 있는 루시퍼를 상대하기에는 이런 전형이 알맞았다.
"이해는 안되지만… 재미있군. 여전히 나에게 흥미를 가져다주는구나. 칼리오페."
루시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검을 들었다.
휘몰아치는 검격.
눈앞의 소녀를 향한 검은 날카로웠지만, 레베카의 결계 내부에서는 루시퍼도 전력을 낼 수 없었다.
카앙!
남다은과 스칼렛은 동시에 루시퍼의 공격을 받아냈다.
지옥의 마력을 두른 루시퍼의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온몸이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릴리아나가 조금씩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는 것.
그녀가 지옥의 마력을 약화시켜주지 않았다면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항이 계속될 순 없었다.
지친 숨소리를 들은 남다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아. 하아…."
"스칼렛 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아직 버틸만… 해요."
남다은의 고유 능력인 [공간 지배]
그녀는 가속과 공간 지배를 통해 루시퍼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스칼렛은 루시퍼의 공격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
남다은은 스칼렛의 입에 피가 고여있는 걸 확인하고 손에 힘을 줬다.
'… 더 버티기는 힘들어.'
남다은은 눈을 부릅뜬 채 루시퍼를 노려봤다.
어찌어찌 전황이 유지되고는 있지만, 이미 모두에게 피로와 데미지가 누적되었다.
언제 쓰러져도 모를 것 같은 상황.
그에 비해 상대는 아직 여유로워 보였다.
방심하는 건지 신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황이 유지되는 지금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해내야 할 것은… 자신 뿐이다.
남다은은 이호연이 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루시퍼의 몸에 있는 상처는 대부분이 남다은이 해낸 것이다. 스칼렛과 레베카의 공격은 저 지옥의 마력에 대부분 파훼되었다.
그나마 통하는 자신의 공간 절단으로 해내야 했다.
꾸욱.
남다은은 마력을 일으켰다.
남은 마력의 전부를 사용하더라도, 단 한 방에 끝내야 한다.
남다은은 뒤를 돌아보지않고 조용히 속삭였다.
"레베카 씨. 제 주변으로 마력을 지원해주세요. 더 시간을 끌 순 없어요."
"… 응."
레베카는 앞으로 나서는 남다은을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 약해.'
눈앞의 괴인은 이호연과 같은 지옥의 마력을 내뿜었다.
이호연과의 대련에서 지옥의 마력의 무서움은 확실하게 느꼈다.
그 이질적인 마력은 일반적인 마력과 달랐다. 그렇기에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아직 대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호연은 자신의 편이었고, 검은 기둥은당장 눈앞에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최근에 이호연이 하는 일을 알아내기 위해 연구에 들어갔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날부터 곧바로 대책을 생각했다면, 이렇게 무력하진 않았을 텐데.
"재밌어. 약해졌으니 느낄 수 있는 감각이야. 마왕이 된다면 힘을 봉인한 채 지옥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군."
"크읍…!"
시커먼 어둠을 집어삼킨 검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남다은은 물러서지 않고 루시퍼의 검을 받아냈다.
검은 턱시도가 가볍게 흔들린다.
남다은은 몇 번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자신에게는 아득한 차이가 있다.
혼자서는 절대 극복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남다은은 혼자가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문 스칼렛이 남다은의 옆에서 검을 휘둘렀다.
릴리아나는 루시퍼의 지옥의 마력을 어떻게든 뜯어냈고, 레베카는 룬의 결계로 루시퍼에게 압박을 가했다.
'뚫을 수 있어.'
루시퍼의 공격이 조금씩 느려진다.
남다은의 검로를 모두 예상해 막아내던 루시퍼의 공격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날카롭게.
조금 더… 치명적이게.
남다은은 자신의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격이, 지금은 가능할 것 같았다.
공간참.
남다은의 검에서 자주색 빛이 반짝였다.
희미했던 빛이 점점 강해지고, 공간을 넘은 검이 순식간에 루시퍼의 가슴을 찔렀다.
"… 크읍?"
순식간에 느껴진 강한 충격.
루시퍼는 검을 회수한 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깊은 자상(??).
가슴 깊은 곳까지 들어온 마력의 검이 가슴 전체를 관통해있었다.
"… 대체 언제지?"
이 마력은 분명 눈앞의 인간 여자의 것.
하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다.
파악!
뒤늦게 남다은의 마력이 사라지고, 동시에 루시퍼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치명상을 입은 게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슴에서 피가 쏟아지며 극심한 고통이 루시퍼를 강타했다.
"다은 양!"
"나, 남다은. 괜찮아?"
"… 괜찮아요. 금방 일어날 수 있어요."
"미안해. 다은아.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레베카 씨가 없었더라면 저도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남다은은 레베카에게 감사를 전하며 정면을 노려봤다.
가슴에 크게 뚫린 상처. 아니, 상처라기보다는 구멍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루시퍼는 가슴의 구멍을 손으로 막은 채 피를 쏟아내며 무릎 꿇고 있었다.
'… 그건 뭐였지?'
남다은은 방금 자신이 해낸 공격에 침을 삼켰다.
일종의 각성.
남다은은 자신의 경지가 몇 단계나 성장한 것을 느꼈다.
릴리아나는 침을 삼키며 정면의 루시퍼를 노려봤다.
"저, 저건… 죽은 건가?"
"치명상입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어요."
"그럼 빨리 죽여야지!"
"… 응. 그럴 거야."
레베카는 마력을 일으켰다.
결계를 구성하던 마력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루시퍼에게 쇄도했다.
확실하게 목숨을 끊기 위한 공격.
부족한 마력을 짜낸 공격이었다.
이것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레베카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시퍼의 주변에 퍼져있던 검은 마력이 그의 몸으로 모였다.
형체를 이루지 않은 마력이 루시퍼를 감싸고,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시작한다.
쯔릅. 쯔릅.
꾸물꾸물.
어둠이 루시퍼의 몸을 잠식했다.
레베카의 공격은 무기력하게 튕겨 나왔다.
"릴리아나!"
"나도 하고 있어! 하지만, 떨어지지가 않아!"
릴리아나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단단하게 뭉친 지옥의 마력은 릴리아나 혼자서 무너뜨릴 수 없었다.
꾸드득.
잠시 후.
어둠의 잔해 속에서 루시퍼가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살과 근육이 검은 어둠에 덮여있었다.
몸을 마력으로 대체하는 능력.
루시퍼가 가진 건 마안뿐만이 아니다.
그를 지옥의 최강으로 만들어 준 것은 이 무지막지한 신체능력.
단순히 마력으로 상처를 봉합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은 거뜬히 움직일 수 있었다.
루시퍼는 어둠으로 가득 찬 자신의 가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대단하군. 이 능력을 사용하는 건 몇십 년 만이다. 비록 약해졌다지만, 지옥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너희에게 경의를 표한다."
"말도 안 돼…."
스칼렛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전의가 꺾였다.절망스러운 상황.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물러날 순 없었다.
스칼렛은 남다은의 앞을 막고 검을 꽉 잡은 채 의지를 불어넣었다.
"레베카 님. 마력은 얼마나 남았나요?"
"아주 조금? 노력하면 공격 한 번은 가능해."
"스, 스카웃. 도망쳐야 해."
"… 등을 보이는 게 더욱 위험합니다. 게다가 다은 양이 움직이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요."
"으, 으아…."
릴리아나는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상대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게 자신 탓 같았다.
과거의 자신이 한 잘못.
그게 모두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건 아닐까.
릴리아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정면을 노려봤다.
"준비는 끝이다."
마력을 갈무리한 루시퍼는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 더욱 커진 어둠은 검을 집어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이 타오르듯 일렁였다.
당하기만 하는 건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눈 앞의 인간을 모두 찢어죽여야만 올바른 교환이다.
루시퍼가 자리를 뛰쳐나가려던 그때,루시퍼의 마안이 빛났다.
동시에 그의 미소가 지워졌다.
수많은 인간의 마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버러지나 마찬가지였지만, 그중 몇 명은 꽤 짙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눈앞의 인간들에게 합류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 여흥은 여기까진가."
하필 자신의 상태도 완벽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전투는 루시퍼도 좋아하지만, 힘을 되찾기도 전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가 분명해…! 그 쓸데없는 놈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1 팀장 님! 혼자 앞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 아이린 씨?"
가쁜 숨을 내쉬던 남다은은 다가오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목소리.
얼마 전에 우정(?)을 나눈 아이린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루시퍼는 다가오는 인간들을 보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도망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다.
그대로 싸웠다면 모두 죽여버렸을 테니, 자신의 승리나 마찬가지.
'아직 흥미로운 것은 더 남았다.'
릴리아나 칼리오페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호연 말고도 흥미로운 인간을 발견했다.
하지만 루시퍼가 흥미를 느꼈던 지옥의 마법은, 아직 조사하지 못했다.
조금 더 조사할 여지가 있다.
"봐봐. 여기 있네. 다들 괜찮아?!"
한국 지부 전부를 데려온 아이린은 레베카와 스칼렛, 릴리아나. 그리고 남다은을 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상태가 좋지 않다. 다행히 치명상은 없어보이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앗다.
"아이린 님이 어째서 여기에…?"
"아… 마침 너희를 찾아다니고 있었거든. 운이 좋았어. 저 자식은 뭐야?"
루시퍼의 마안으로 상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상가를 떠났다.
마안에 당한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다. 잊었던 일정이 생각나거나, 없었던 일을 만들어 상가를 떠났다.
아카데미에서도 상가는 신경 쓰지 못했지만, 마침 아카데미에 잠입해있던 정보 길드는 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 타이밍.케이론에게 전언을 받은 아이린은 스칼렛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도저히 보이지 않으니, 수상했던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설명을 들은 스칼렛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린 님."
"… 애기 아빠의 정식 여자 친구로 허락할게. 아이린이라면 환영이야."
"나는 납치했던 걸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그, 그렇게 감사할 일이야? 고개 들어도 되는데."
얼마 전까지 싸가지없다며 욕을 하던 릴리아나가 울상을 지은 채 연신 사과한다.
아이린은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릴리아나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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