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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70화 (470/648)

〈 470화 〉 470화. 실전 대련

* * *

아이린이 이호연의 집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엘리스의 방 앞에 서있던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봐도 예쁘네.'

예쁜 여자는 삐진 모습도 귀여운 법이다.

이호연은 뾰로통해있는 엘리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엘리스. 잘 지냈어?"

"응. 생각보다 늦었네."

"미안해. 일이 있어서."

"어차피 다른 여자랑 놀고 있었으면서."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스는 틱틱거리면서도 새로운 잔에 와인을 따라 자신의 앞자리에 내려놨다.

'여기 앉으라는 뜻인가?'

분위기가 어색하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 지 모르겠네.

왠지 혼나는 자리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이호연은 다소곳이 엘리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엘리스는 와인이 담긴 잔을 이호연의 앞으로 밀었다.

"마셔."

"옙."

홀짝.

와인잔을 들자 달콤한 과일의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맛있네.'

매끄럽게 입 안을 감싸는 와인은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물론 전문가가 아니니 뭐가 어떻게 뛰어난 와인인지 평가는 못하겠지만, 비싼 와인인 것 같았다.

엘리스는 이호연이 와인을 삼키자마자 입을 열었다.

"맛이 어때?"

"엄청 맛있어. 달콤하고 부드러워"

"그게 끝?"

"음…."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걸까.

이호연은 손으로 와인잔을 빙빙 돌리는 엘리스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95 ] ( +1.1 )

­ [ 성욕 : 7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기껏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했는데. 왜 반응이 없어. …그 사이에 좋아하는 게 바뀐 건 아니겠지?

'좋아하는 와인?'

이호연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다행히 엘리스와 했던 와인에 관한 대화를 하나 씩 떠올리다 보니 금방 생각해낼 수 있었다.

'분명 그런 대화가 있었지.'

엘리스의 취미에 맞는 대화 주제를 선택하다가 와인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다.

그때 좋아하는 와인이 뭐냐는 질문에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와인 이름을 댔었다.

고맙게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호연은 신기한 듯 와인잔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거 내가 좋아하는 와인인데, 알고 있었어? 내가 얘기했었나?"

"아니. 우연이야."

"아하. 그렇구나. 난 또 혹시 일부러 준비한 줄 알았지."

"… 네가 뭐가 이쁘다고."

엘리스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돌리고 와인을 마셨다.

혹시나 해서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와인을 메모해놨는데, 다행히 틀리진않았다.

'이거 구하는 데 얼마나 귀찮았는지 알기는 할까.'

일주일만에 보는 이호연이었으니, 그녀도 준비를 했다.

세바스 찬을 닦달해 주류 매장을 전부 돌았고,그걸로 모자라 자신도 엄청나게 돌아다녔다.

이 정도 반응은 나와줘야 한다.

홀짝.

이호연은 와인을 마시며 엘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이런 것까지 준비한 걸 보니 많이 삐지진 않은 모양이다.

'뭐라도 말을 꺼내볼까.'

고개를 슬쩍 내려보니 테이블에는 안주대신 귀여운 토끼 모양 사과가 있었다.

혹시 와인은 과일과 즐기는건가.

"이건 네가 깎은 거야?"

"아니. 언니가."

"아하…."

생각해보면 저번에 입원했을 때도 아이린이 깎은 사과가 있었지.

다른 건 몰라도 사과는 잘 깎는 신기한 사람이다.

이호연은 마침 나온 아이린에 대한 말을 꺼냈다.

"아이린 씨랑 현관에서 만났는데, 표정이 안 좋더라."

"… 너 때문이잖아."

"나?"

"너 때문에 언니랑 사이가 이상해졌어.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하아…."

엘리스는 답답함과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모든 게 이호연의 탓은 아니다.

아이린의 마음은 이호연을 만나기 전에도 똑같았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이호연의 존재로 일이 귀찮아진 건 사실이다.

"미안해. 엘리스. 그렇지만 나도 사정이 있었어. 엘리스 넌 알잖아."

"… 그 저주랑 상관이 있는 일이야?"

"아무것도 없는데 그럴 이유는 없지. 너한테 미움받으면 어떡해…."

아무리 이호연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너도 좋았잖아.' 같은 말을 할 생각은 없다.

다행히 엘리스는 자신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해줄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진실을 섞어 말해도 된다.

이호연은 엘리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그럼 이해는 되지만… 아니, 그래도 짜증 나."

"알겠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 내가 맞아줄게."

"안 때릴거야. 그리고 정말 미안했으면 찾아와서 사과라도 했어야지."

"연락을 안 받길래 화가 많이 난 줄 알았어."

"하아…."

엘리스는 이 답답한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는데 어떻게 여자가 계속 꼬이는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스윽.

고개를 젓던 엘리스는 어깨에 느껴지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다가온 이호연이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뭐야?"

"그냥 오랜만에 어깨나 주물러주려고. 내일 대련 준비는 했어? 누구랑 하는 거야?"

"강효린 박사."

"한국 지부장도 참여하는구나."

"보나 마나 자기가 나랑 하고 싶다고 했겠지. 이상한 사람이야."

이호연은 엘리스의 어깨를 주무르며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대련 리스트 확인은 했지만, 실전 대련이 대화 주제로는 딱 좋다.

"그러고 보니 내일 기자들도 엄청나게 많이 온다던데."

"아카데미에서 이런 이벤트를 하는 건 처음이니까. 이번 대련에 점수가 걸렸으니 진심을 다하는 생도들의 전투력을 확인할 수도 있고."

"나름 큰 의미가 있구나."

"으응. 음…."

엘리스는 조금씩 진해지는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호연은 자신의 뒤에서 실소를 짓고있었다.

"방금까지 미안하다고 했던 사람의 눈이 아니야."

"미안하니까 더 열심히 하는 거지. 예전에는 이런 마사지도 자주 했었잖아. 그치?"

"… 응."

엘리스와 이호연의 관계는 첫 마사지를 했을 때 보다 더욱 깊어졌다.

그 뒤로 몸은 많이 섞었지만, 엘리스의 선천적 마력 장애가 고쳐진 이후로 마사지는 거의 없었다.

"으흐읏…?"

"예전에도 여기를 좋아했는데, 지금도 똑같네."

"이, 이런 걸로 잘못을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알겠어?"

"당연하지. 이건 그냥 미안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고 보니 아이린 씨는 몇 시에 돌아온다고 했어?"

"… 언니는 안 와. 오늘은 단 둘이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럼 시간은 많겠네."

"으응, 흐으…."

엘리스는 이호연의 손길에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

이호연의 손길에 온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 이러면 안 되는데.'

엘리스는 몸의 긴장을 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판데믹의 본부.

마에스트로가 지내는 공간은 언제나 조용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4번째 사도를 소환한 지금은, 얼마 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호오… 이건 인간이 괴수형으로 바뀐 건가? 맛은 없어 보이는군."

"끄읍, 으으으윽…."

처음 보는 마인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마인중에 가장 괴상하게 생겼으니, 루시퍼의 흥미를 끌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못생긴 탓일까. 힘 조절을 실패해버렸다.

꾸우욱. 콰드득.

마인의 머리를 뜯어낸 루시퍼는 잠시 죽은 마인을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시체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흥미를 잃은 루시퍼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앉아있는 인간을 바라봤다.

악마라고 주장하는 동물이 형상화되어있는 조각상에 무릎꿇고 있는 인간.

진짜 악마인 자신이 보기엔 전혀 악마로 보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기도 중인 마에스트로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그 계시라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건가?"

"… 예. 방금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조각상에서 계시를 받는다니, 정말 놀랍군."

마에스트로는 죽어있는 마인을 내려다보고, 대기하던 다른 마인을 불러 시체를 치웠다.

사도 루시퍼가 나타난 뒤로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뇌가 통하지 않았다.

물론 마에스트로의 마법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억지력이 있었지만,가끔씩 나오는 흥미위주의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사도님과 협력해 지옥의 동화를 앞세우라는 계시입니다."

"그렇겠지. 이 세상에 있는 기둥에서 지옥의 마력이 느껴진다. 내가 인간 세상에 온 이유는 역시 지옥의 부흥인가?"

"그리고… 사도님을 도와 이 남자를 죽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건?"

마에스트로는 인물의 정보를 루시퍼에게 내밀었다.

한 남자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어있는 자료였다.

이호연.

마왕을 소환해 지구를 멸망시켜야하는 운명인 자신과 다른 운명을 가진 상대였다.

마에스트로는 자료를 확인하는 루시퍼를 보며 찝찝한 감정을 느꼈다.

… 지금까지 이런 계시는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 남자가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건 마왕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는 힘과 마주칠 때부터 두근거리는 심장.

다른 인간과 다른 자신만만한 태도까지.

모든 것이 마에스트로가 직접 알아낸 정보다.

마왕과의 소통은 일방통행이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마왕은 자신이 이호연과 만난 것을 몰라야한다.

하지만 오늘, 마왕이 직접 계시를 내렸다.

'루시퍼를 도와 이호연을 죽여라.'

그 계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이질적이고, 수상했다.

그는 자신이 지구에 소환되는 걸 바랬을 뿐, 특정한 누군가를 죽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

계시란 중요한 일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에 불과했다.

이번 계시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마에스트로는 오랜만에 내려온 계시에 불신을 느끼고 있었다.

'불쌍한 인간이구나.'

루시퍼는 자신의 마안을 빛냈다.

눈앞에 있는 인간도 평범하진 않았다. 자신의 마안이 반응하다가도 안 보이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특히 그 세뇌능력이라는 건 굉장히 특이했다. 인간 주제에 비범한 건 사실.

하지만 루시퍼는 그의 감정을 완벽하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어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굉장히… 흥미롭군."

루시퍼는 마에스트로에게서 눈을 떼고, 이호연이 찍힌 영상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 인간을 죽이는 게 마왕의 계시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마왕… 마왕이라."

루시퍼는 피식 웃었다.

지옥의 마왕인 자신의 아버지는 지금도 마왕성에 틀어박혀있다.

그는 모든 마력을 마왕성 봉인에 사용했다.

인간 세상에 계시 같은 걸 내릴 여력은 없겠지.

'대체 누구인가.'

자신을 인간 세상으로 보내고, 마왕이라며 계시를 보내고 있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흐음…."

루시퍼는 고민을 멈추고 이호연의 영상을 확인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마왕이라는 놈이 궁금하긴 하지만, 이호연이라는 인간에게도 호기심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와 같은 감각이다.'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정체불명의 마력에 가려진 마왕성을 봤을 때.

루시퍼는 자신의 마안이 처음으로 무력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하찮은 인간에게 그때 느꼈던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이 인간 세상에 온 이유는 지옥의 동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이 인간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이호연이라는 인간. 그에게 정체불명의 '마왕'과 같은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당장 출발하지. 아카데미라고 했었나."

지옥에도 교육기관은 있다.

인간들의 교육기관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게 있겠지.

어쩌면 자신의 형제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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