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8화 〉 468화. 억울한 아이린
* * *
이호연이 도착하기 직전,엘리스의 방.
아이린은 엘리스의 방을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스. 언니, 들어갈게?"
"응. 들어와."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사과 깎아왔어. 귀여운 토끼야."
아이린은 테이블에 귀여운 사과와 포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놨다.
생글생글 미소를 지은 아이린은 엘리스를 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엘리스는 오늘도 아름다워.'
자매의 근간을 뒤흔드는 엄청난 고백이 있었는데도, 의외로 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래도 집에 있을 때 먼저 다가오는 건 항상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은 그때의 고백이 없던 일인 것처럼 엘리스를 대했고, 이상한 행동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경계하던 엘리스도 아이린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 귀엽긴 하네."
"응. 언니가 깎았으니까."
콕.
엘리스는 귀엽게 생긴 토끼 모양 사과를 포크로 찍었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귀엽게 하기가 힘들던데,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잘 깎는지 신기했다.
'… 이것도 나 때문이랬지.'
엘리스는 아이린이 해줬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13살 때라고 했었나.
훈련 중 다친 엘리스가 입원하고, 언니에게 토끼 모양 사과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대한 열심히 깎아온 사과를 본 자신이 못생겼다고 울어서, 그날 이후로 매일 연습했다고 했었지.
"예전 생각나네. 엘리스가 토끼 모양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해서 언니가 깎아줬었거든. 그때 못생겼다고 울어서 얼마나 상처였는데."
"…그 얘기는 그만해."
엘리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언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끼도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구나.'
친언니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 '사실'은 이해했지만, 납득 하지는 못했다.
엘리스는 아직까지 낡은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으니까.
'이게 낡은 마인드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린이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의 언니와 똑같았다.
하는 행동도, 말투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똑같았다.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엘리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맞아. 엘리스. 오늘 호연이가 놀러 오는 날이잖아."
"…응."
"언니가 차라도 내올까? 아껴놨던 고급 찻잎이 있어. 같이 마시면 좋을거야."
"아니. 오늘은 나 혼자 만날 거야."
"어, 음. 그럴래…?"
"응. 언니가 그때 말했잖아. 다 들어준다면서."
"그, 그럼. 당연하지. 언니는 엘리스만 있으면 돼."
아이린은 엘리스의 미소를 보며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동생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 걸까.
딩동 딩동
"언니. 이호연 왔어."
"으응, 알겠어. 언니는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호연이랑 싸우면 안 돼?"
엘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했던 와인을 테이블에 올렸고,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하아…."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스가 일주일간 이호연과 연락을 안 했으니, 자신도 이호연과 몸을 겹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지 못하다니. 너무 아쉬웠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이린은 힘들게 아쉬움을 삼켜냈다.
엘리스도 금방 마음을 열겠지. 모든건 시간문제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닌데.'
지금까지 엘리스와 이뤄놓은 관계에서 아주 조금씩만 나아가고 싶었다.
아침인사도 하고, 가끔 밥도 같이 먹고, 요리도 해주고, 가끔씩은 사랑을 담아 껴안아주고, 또 아주 가끔씩 같이 자기도 하고, 마사지도 해주고, 서로의 소중한 부분까지 공유하는….
'조금' 친한 자매가 되고 싶을 뿐이다.
쩝. 아이린은 입맛을 다셨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고난의 연속인 법이다.
이것도 엘리스와 자신이 너무나 아름답게 태어난 탓.
이 업은 언니인 자신이 지고 걸어가야 한다.
또각또각.
아이린은 현관으로 내려가 이호연을 맞이했다.
이호연은 언제나처럼 가벼운 소리를 해댔는데, 오늘따라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엘리스를 만나서 긴장하는 건가?'
그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이린도 엘리스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살피곤 했다.
"집 밖에 나오긴 했는데…. 오늘 할 일이 있나."
아이린은 집을 나와 멍하니 거리를 걸었다.
엘리스와 이호연을 위해 집을 나왔지만 막상 할 일이 없었다.
한국 지부에 가서 일하기는 싫었고, 산책을 하기엔 날씨가 별로였다.
"아…. 이호연 뒷조사라도 해볼까?"
그러고 보니 이호연의 상태가 이상했었지.
혹시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바람둥이지만 보기보다 순수한 남자다.
남에게 말하기 힘든 사기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여자관계라도 조사를….'
"아이린 님. 오랜만입니다."
"히익."
잡념에 빠져있던 아이린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뒤에는 익숙한 얼굴인 스칼렛이 보였다.
"스, 스칼렛?"
"예. 저번에 우연히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 인사드리네요."
"어, 으응. 그렇지. 오랜만이네."
아이린은 갑자기 나타난 전 직장 동료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스칼렛.
얼마 전까지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원이었던 그녀는꽤나 재능이 있는 길드원이었다.
한국 파견 임무가 끝나면 1팀으로 승급할 예정이었지만…갑작스러운 사표를 제출해 의아했었다.
물론 아버지가 허락했으니 아이린이 할 말은 없었고, 그대로 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전, 스칼렛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났다.
학생회장 문수린을 도와 마인 문성민 생포 작전을 펼치던 중, 우연히 전투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그때 이호연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지.'
그때 조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한국 지부장을 닦달해서 이호연과 스칼렛이 꽤 깊은 관계라는 건 알아냈다.
아쉽게도 그 이상은 도저히 알려줄 수 없다고 하길래, 개인적인 조사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하필 그때 검은 기둥하고 던전의 이상현상 조사에 대한 허가를 구하느라….'
이호연의 일을 돕다 보니 스칼렛의 조사는 점점 미뤄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엘리스와 관계가 급변하는 바람에 일 따위에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결국 흐지부지한 상태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아이린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스칼렛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찾아오고."
"갑작스러운 방문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이호연 님의 일입니다."
"이호연?"
아이린은 살짝 경계심을 높였다.
이호연은 자신과 엘리스를 이어주는 소중한 존재다.
엘리스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여러모로 1.5등급 정도는 되는 남자다.
"네. 최근 이호연 님과 자주 함께하셨는데, 혹시 이호연 님에게 무언가 수상한 점이나 의심스러운 행동은 없었습니까? 중요한 일입니다."
"…."
있었다.
마침 이호연에 대한 생각을 하고있던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분명히 수상한 행동은 존재했다.
검은 기둥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학자보다 깊은 조사.
던전의 이상 현상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관련 논문까지 파악하는 것.
그리고, 아카데미에 나타난 검은 기둥에 대한 의구심까지.
이호연이니까 가만히 내버려 둔 거지,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그 원인을 확실히 조사했을 거다.
아이린은 스칼렛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1 팀장으로서 아이린의 감각이 곤두섰다.
시선 처리와 숨소리, 떨리는 동공과 미간.
무표정인 스칼렛에게서도 정보는 수없이 새어나왔다.
'이미 알고 찾아온거야.'
스칼렛은 아이린에게 무언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아이리스 길드의 전 에이스 다운 능력.
자신과 같이 다니며 한 행동들이 수상하다는 걸 깨달은 거다.
아이린은 실제로 이호연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예상은 적중이다.
…하지만.
"내가 그걸 안다고 쳐도... 너한테 말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칼렛. 알면서 왜 그래. 아이리스 길드에서 나간 뒤로 현장 감각이 떨어진 거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정보는 무엇보다 귀중하다.
아이린은 정보 길드인 아이리스 길드의 1 팀장.
다짜고짜 찾아와 정보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가만히 내놓을 리가 없다.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아이린 님이 원하는 금액을 제시하시면…."
"미안하지만, 거절이야. 딱히 아는 것도 없고, 돈이 필요하지도 않아."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호연에 대한 조사는 개인적으로 이어갈 생각이다.
굳이 목적도 모르는 남에게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니까.
그때, 스칼렛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이린에게 들려왔다.
"당신이야말로 현장 감각이 많이 죽은 모양입니다. 방학 내내 데이트만 다녀서 그런 걸까요."
"…뭐? 다, 당신이라니. 스칼렛. 너 지금…."
"그럼 너라고 부를까요? 저희 동갑이잖아요."
"……."
아이린은 스칼렛의 당당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스칼렛은 이제 아이리스 길드원이 아니다.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그건 스칼렛의 마음이겠지.
"…그래. 호칭은 뭐, 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 네 발언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혹시 정보를 안 준다고 억지로 빼앗을 생각이야?"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아이린 님이 대가를 지불하고 정보를 제공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 거짓말은."
스칼렛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린도 스칼렛에게 대응해 몸에 마력을 둘렀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칼렛의 수준은 자신도 알고있다.
뛰어나지만 자신보다는 아래.
만약 스칼렛이 더욱 강했다면 그녀가 1 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지.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어?"
마력을 끌어올린 아이린은, 그제서야 몸을 덮은 이질감을 느꼈다.
"…결계?"
결계. 그중에서도 최고급.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마력이라면 엄청난 실력자다.
게다가 아이린은 이 마력을 경험한 기억이 있었다.
켄타우로스 추적 작전에서 만났던 이호연의 지인. 레베카의 마력이었다.
아이린은 자신의 몸 전체에 가해지는 압력에 이를 악 물었다.
"크윽…큽."
또각. 또각.
동시에, 텅 빈 공간에서 여자 3명이 나타났다.
"역시, 애기 아빠가 강한 거지. 내가 약한 게 아니라니까."
"레베카. 그 얘기는 이제 지루하니까 그만 얘기해."
"저, 저기…정말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요? 아무래도 위험한 게…."
아이린은 다가오는 여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식당에서 봤던 여자들이다.
중심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레베카.
켄타우로스 생포 작전에 나타났던 이호연의 지인이다.
그 옆의 순하게 생긴 생도는 1학년인 남다은. 엄청난 유망주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마지막은 왠지 야한 분위기를 풍기며 지루한 듯 하품을 하는 여자. 유일하게 정보에 없는 여자다.
아이린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곧바로 결계를 탈출하려 했지만, 바로 옆에 서있던 스칼렛이 아이린의 움직임을 막았다.
"가만히 있으세요. 아이린 씨."
"으읍…."
"스칼렛 씨…이래도 괜찮은 거 맞죠?"
남다은은 아이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오자마자 다른 여자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표물이 나타났다며 모두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일단 따라오긴 했지만, 정말 이래도 괜찮은걸까?
"예. 괜찮습니다. 이 분은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아요."
"읍읍! 읍!"
아이린은 자신의 입을 막은 스칼렛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둥거렸다.
몸을 누르는 고통스러운 압력과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섭긴 했지만, 억울함도 있었다.
안 그래도 엘리스에게 쫓겨나서 서운했는데, 이호연에게도 놀림받고, 전 직장 동료라는 여자는 오랜만에 보자마자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당하는걸까.
아이린은 억울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