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7화 〉 467화. 어긋난 것 (2)
* * *
'이런….'
루미의 설명을 들은 이호연은 혼란스러워하는 루시를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입 안에 기분나쁜 피 맛이 퍼졌지만,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상상도 못 했어.'
설마 자신의 섹스 횟수를 알아내는 마법 도구가 있을 줄이야.
그런 마법 도구가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우연히 루시가 사용하게 된 것도 문제였다.
루시가 자신의 경험 횟수를 잘못 아는 건 당연한 일이다.
루시의 첫 경험은 그녀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꽤 시간이 지난 마인 펠릭스 사건.
동아리에 잠입해 루시와 루미에게 매혹마법을 뿌리던 더러운 마인이다.
그가 매혹에 당한 루시를 납치했을 때, 이호연이 발견한루시에게는 발정 마법이 걸려있었다.
다행히 루시가 이상한 짓을 당하기 전에 구해냈지만 그 당시 이호연의 마법으로는 펠릭스가 걸었던 발정 마법을 해제할 수가 없었다.
'그때 루시 몰래 섹스까지 했었어.'
결국 펠릭스를 쓰러뜨린 곳에서 루시의 첫 경험을 가져갔다.
처음엔 죄책감을 느꼈지만, 루시와 사이가 좋아진 이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할 타이밍도 없는 데다가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억지로 한 행동도 아니었고, 굳이 루시와의 관계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가 싫었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차라리 그때 고백했더라면….'
사건 이후 루시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고백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별 거 아닌 일 취급했다가 결국 루시를 슬프게 만들었다.
"루시. 루시… 괜찮아…?"
"루미. 나 머리가 아파…."
"성녀 님, 성녀 님한테 다시 물어보자."
"그, 그렇지만 아니라고 하셨는데…."
"…."
이호연은 입을 다문 채 고민했다.
잠깐 나쁜 사람 되는 게 싫어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솔직히 고백하자.
이호연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루시. 미안해. 나 때문이야."
"어, 으응? 아. 여, 역시 착각이지? 내가 잘 때 건드린 거야?"
루시의 얼굴이 살짝 환해진다.
저렇게 넘어가야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루시가 상처를 받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야한다.
이호연은 표정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아니야. 루시, 솔직하게 말할게."
"어…?"
"잘 때는 아니지만, 네가 모르는 관계가 있었어. 펠릭스한테서 너를 구했을 때야. 그때, 루시에게 발정 마법이 걸려있었어."
"발정 마법?"
"응. 지금이라면 내가 역산했겠지만 그때는 실력이 부족했거든. 결국… 루시의 동의 없이 섹스를 해버렸어. 그래서 루시가 모르는 경험이 있는 거야. 루시는 혼절한 상태였으니까."
이호연은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사실을 고백했다.
루시를 구할 방법은 남자인 자신이 섹스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동의를 구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겨왔다.
루시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낄 지는 루시가 판단해야한다.
"그, 그럼 이호연 네가… 정신을 잃은 나랑 한거야?
"… 응. 그때 고백했어야 했는데… 루시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숨기고 있었어. 정말 미안해."
이호연은 책상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실수를 했으니 어떤 말을 들어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혹시나 루시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하, 하아… 휴우. 다행이다."
"루시이… 깜짝 놀랐어. 호연 씨도, 그런 일을 왜 숨기신 거예요."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가장 의심하던 건 펠릭스.
그 마인이 자신의 몸을 더럽힌 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호연에게 구해지긴 했지만, 그때 루시의 기억은 희미했다. 혹시 그녀가 모르는 방어기제가 발동해 끔찍한 기억을 없앴을지도 모르는 일.
이호연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정조를 허락했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의 섹스 한 번이 이호연이라면, 그녀가 느꼈던 불안함은 모두 사라진다.
"어, 어… 응. 미안."
이호연은 둘의 반응에 당황한 눈초리를 보냈다.
왜… 안심한 목소리를 내는 거지?
"그런 거라면 빨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왜 헷갈리게 하는 거야. 깜짝 놀랐어."
"… 미안해. 루시.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갑자기 말하면 네가 충격받을까 봐 숨기고 있던 거야."
"충격받을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인데… 흑."
"루, 루시. 흑. 루시가 우니까 나도 슬퍼져…."
"루미이…."
이호연은 울먹거리며 서로를 부둥켜안는 쌍둥이를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차라리 화를 내줬다면. 자신의 뺨이라도 때렸다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을 텐데.
루시는 자신이 정조를 지켰다는 것 하나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미안해. 루시. 루미.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
"괜찮아요. 호연 씨…."
"조금만 빨리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나랑 루미랑 이거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루시는 울먹거리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호연은 그런 루시와 루미를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 미안. 미안해."
루시와 루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호연은 안겨오는 루시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루시. 아쉬워도 참아야해."
"으음. 내일은 대련이니까. 어쩔 수 없지."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이 돌아간 뒤에 동아리방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결국 내일 대련을 생각해 섹스는 하지 않았고,이호연은 컨디션이 안 좋다면서 금방 돌아갔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시는 루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루미. …내가 화를 심하게 냈나? 나는 하나도 화나지않았는데."
"아니야. 루시의 잘못은 없어. 그것보단. 으음, 오늘호연 씨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였어…."
"역시 그렇지? 원래 이상하긴 했는데, 오늘은 더욱 심했어."
"응…."
"분명 뭐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우리가 응원이라도 해줄까?"
"호연 씨한테 우리가 모르는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호연의 반응은 분명 이상했다.
항상 하던 쓸데없는 말장난도 줄었고, 대화에도 영혼이 없었다.
물론 루시에게 잘못을 했다지만 루시도 루미도 크게 신경쓰지않았다.
'처녀가 아니었던 건 조금 부끄럽지만….'
루시의 첫경험. 이호연은 첫경험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루시를 속였다.
하지만 그건 루시를 배려한 일이었다.
루시도 그런 일에 화가 나진 않는다.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걸까. 루시…."
"아니야. 루미. 우리, 다은이한테 협력을 구해보자."
"협력?"
"일단은 다은이. … 부족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분명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을 거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거야."
"루시가 그렇다면, 응. 그렇게 할게."
"일단 우리 둘이라도 고민해보자. 혹시 방금 내가 울어서 그런건가?"
"으응. 아니야. 오히려 호연 씨가 화나 보였어."
"그럼 어제 내가 케이크를 뺏어먹어서?"
"호연 씨는 단 걸 별로 좋아하지않아."
루시와 루미는 동아리방에 나란히 앉아 좋아하는 남자에 관한 고민을 이어갔다.
*
이호연의 방.
나 : 먼저 돌아가서 미안해. 오늘 컨디션이 안 좋네. 내일 대련장에서 보자.
삑삑.
쌍둥이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이호연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가 생각보다 나쁘게 살았네."
이호연은 천장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아이린에게도 나쁜 짓을 꽤나 했지만, 그건 엘리스와 이어주면서 갚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루시에게 저런 상처가 있었다니.
"하아…."
변명을 하자면, 그때는 아직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다.
뭐라고 할까. 공략에 미쳐있었다.
히로인들을 사람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효율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효율만 생각하며 움직이고 히로인들을 공략했다.
'… 지금이랑 다른 게 뭐지?'
그렇다면 지금은 히로인들을 배려하고 있는 걸까.
이호연은 히로인들을 전부 사랑하고 있었다.
공평하게 애정을 주고 싶었다.
나쁜 짓은 딱 한번.가짜 던전 계획에서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계속 죄책감이 드는걸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호연은 텅 빈 방의 천장을 보며 고민을 이어갔지만, 혼자서는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 가짜 던전 계획이었다.
더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 헬스 기구라도 갖다 놓을까. 아니면 게임기?"
방이 텅 비어있으니 사람 사는 느낌이 안 든다.
취미라도 시작하면 머리가 덜 아플지도 모른다.
띠링
그때,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아이린 : 오늘 오기로 했다며. 언제 올 거야?
… 맞다. 엘리스한테 가기로 했었지.
원래는 루시 루미를 만난 직후에 갈 생각이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집으로 들어왔다.
이호연은 무거운 팔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나 : 지금 갈게요. 아이린 씨도 같이 있는 거예요?
아이린 : 같이 있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엘리스가 가만히 있으려나."
이호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밀어붙여 아이린이 원하는 3p를 했지만, 엘리스가 3p를 완전히 받아들이기에는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리스가 아이린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은 것일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결과다.
이호연은 생도복을 벗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엘리스는 옆 집에 살고있으니 자주 편한 복장으로 놀러 가곤 했다.
이호연은 금방 준비를 끝내고 집에서 나왔다.
딩동. 딩동.
철컥.
몇 걸음 걷자마자 엘리스의 집에 도착했고,벨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대문이 열렸다.
이호연은 익숙한 마당을 지나 저택의 앞까지 걸어갔다.
끼익.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린이 보였다.
이 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 같았다.
그녀의 금발은 여전히 화사했지만, 표정에는 불만이 엿보였다.
약간 서운한 표정. 역시 계획대로 안 된 모양이네.
"아이린 씨. 어떻게 됐어요?"
"… 거절당했어. 오늘은 너랑 단 둘이 있고 싶대."
아이린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뭐, 그럴 거 같았다.
아직 일주일 밖에 안 됐다. 엘리스에게도 마음의 정리라는 게 필요하겠지.
이호연은 집으로 들어가며 아이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린 씨."
"난 밥보다 빵이 좋아."
"네네. 전 올라갈게요."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아이린이 말을 이었다.
"… 맞아.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조사권은 전부 얻었어."
"네? 아, 검은 기둥 건 말하는 거구나."
"응. 네가 그렇게 하라면서."
"잘하셨어요."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 길드가 조사권을 챙긴 건 뉴스로 알고 있었다.
가짜 던전을 빠르게 조사해줄 수 있겠지.
"… 역시 뭔가 있는 거 맞지? 수상해."
"없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마."
"증거라도 있어요?"
"증거는… 없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이린은 이호연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이호연이 나쁜 놈은 아니지만, 역시 뒷조사라도 하는 게 좋지않을까.
사람은 보기보다 약하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이상한 유혹에 빠지곤 한다.
자신은 몰라도 엘리스를 감당하려면 더욱 강한 남자여야 할텐데.
아이린은 입맛을 다시며 계단을 올라가는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네. 괜히 쓸데없는 의심만 생겼어.'
한편 이호연은 서운한 얼굴을 하는 아이린을 뒤로하며 생각했다.
원래는 아이린에게 가짜 던전 계획을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아카데미에 검은 기둥을 소환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마법진이 너무나 완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쓸데없이 의심만 생겼다.
그래도 엘리스와 연결해준 덕분인지, 아이린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린과 농담 따먹기로 기분이 살짝 나아진 이호연은 엘리스의 방 문을 노크했다.
"엘리스. 들어갈게."
응.
빼꼼.
엘리스의 방 문을 살짝 연 채로 얼굴을 들이밀자, 와인을 준비한 채 소파에 앉아있는 엘리스가 보였다.
뚱한 표정인 걸 보니 여전히 마음 정리가 안 된 것 같았다.
'이것도 나 때문이니 내가 달래줘야겠지.'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