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화 〉 466화. 어긋난 것
* * *
화요일 오전.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A클래스는 오늘도 활기가 넘쳤다.
생도들은 곧 있을 실전 대련을 기대하며 들떠있었다. 몇몇 교수들이 수업 중 실전 교수 대련에 관한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학생회 주도로 엄청 크게 열린다는데?
우리도 다 구경할 수 있는거잖아. 나는 마지막 경기만 보고 싶어.
비록 수업이라도 다른 사람의 대련을 보는 건 재미있는 이벤트다. 생도들은 삼삼오오 모여 내일 있을 대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시끌시끌한 A클래스의 한가운데.
"음… 분명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호연은 눈을 감은 채 어제 레베카와 있던 대련을 복기했다.
오늘은 루시루미 쌍둥이가 늦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불안함이나 긴장감… 아니면 조급함 같은 걸 증폭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랬다면 좀 더 쉽게 이기지 않았을까.'
결과는 결국 승리였지만, 두발 뻗고 잘만큼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임솔은 분명 완벽한 패배를 바라겠지.
어제 레베카와의 대련은 그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았다.
'가진 걸 모두 못 사용한 느낌이야.'
물론 레베카도 최선의 상황이 아니었다지만, 이호연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특히 내기의 신에게 받은 선물인 감정 증폭.
'감정 증폭을 활용할 수가 없었나.'
감정 증폭은 공간 내의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하는 스킬.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지가 이호연의 고민이었다.
'부정적인 감정….'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한다라.
이호연은 허공을 바라보며 쓸만한 감정을 떠올렸다.
부정적인 감정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끝없이 나온다.
분노, 우울함, 슬픔, 걱정, 증오, 실망, 원망, 질투, 짜증, 억울함, 불쾌함, 공포, 불안감, 열등감, 걱정, 절망, 두려움.
이런 감정을 활용할 곳이 어디 있을까.
"두려움, 공포, 절망, 불안감…."
하아.
이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능력을 사용할 곳은 전투가 아니다.
'가짜 던전 계획.'
이호연이 감정 증폭을 쓸 곳은 가짜 던전 계획뿐이다.
던전 마법을 사용한 직후.
던전 내부에서 아카데미 인원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증폭시킨다면, 혼란이 생기는 만큼 이호연의 계획의 성공률이 올라간다.
아수라장이 될수록 범인인 이호연이 행동하기 쉬워진다.
게다가 이호연의 계획은 던전 내부에서 히로인들을 속여 자신을 더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 던전에 있는 동안 히로인들의 절망과 불안감을 증폭시킨다면 히로인들을 속이는 난이도가 줄어든다.
내기의 신도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었으니, 그런 의도로 선물한 게 아닐까.
"으음…."
톡. 톡. 톡.
이호연은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했다.
가짜 던전 계획이 쓰레기 같은 행동인 건 이호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딱 한 번만 나쁜 짓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하렘을 위해서 감정 증폭을 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11명의 여자를 공략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제 레베카와 대화 이후로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났다.
나는 애기 아빠가 좋아. 애기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다급해하지 마. 애기 아빠가 이상한 판단을 하면 안 되잖아.
레베카가 한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그녀의 말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안감과 초조감을 제대로 찌르고 들어왔다.
"내가 다급해서 이상한 판단을 하는 건가? 역시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걸까."
어제 그녀의 품에 안겼을 때, 이호연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호연이 가진 특전, [뚜렷한 정신력].
이것은 이호연의 마음을 항상 굳건하게 유지해준다.
그럼에도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이호연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호연 씨.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호연의 입장에서는 가짜 던전 계획을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단체 최면이라도 거는 게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호연 씨. 괜찮으세요?"
"응, 으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역시 임솔 교수님과의 대련 걱정?"
그때, 이호연의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호연은 어느새 다가온 루미와 루시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너무 집중한 탓일까. 둘이 가까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 미안. 근데 임솔 교수님과의 대련이라니?"
"개인 스마트워치에 내일 예정인 대련 리스트가 나왔던데, 못 보셨어요?"
이호연은 루미의 말을 듣자마자 스마트워치를 실행했다.
내일은 실전 대련이 있는 날이다. 드디어 대련 정보가 나온건가?
아카데미에서 보낸 공지에는 내일 대련에 나오는 생도와 교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지막 경기 : 임솔 VS 이호연]
"하필 마지막이네."
"학생회에서도 제일 재밌는 대련을 뒤로 미뤄놓고 싶은가 봐. 구경꾼들도 많대."
"맞아요. 교수 실전 대련은 대강당에서 진행한다고 했어요."
공지의 가장 아래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마지막 경기라.'
너무 시선을 받는 건 싫지만, 어쩌면 임솔을 이기기에 그만큼 좋은 무대는 없을지도 모른다.
마도관 구석에 있는 훈련장에서 이기기에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니까.
스승님을 너무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슬슬 보답해줄 시간이 왔다.
*
동아리 건물 내부. 동아리방.
이호연은 언제나처럼 소파에 앉은 채 쌍둥이와 떠들고 있었다.
"드디어 교수한테 복수할 수 있을 거야."
"호연 씨. 루시를 응원해주세요."
"김진혁 교수님이 그렇게 싫어? 우리 교수님 정도면 꽤 착하지않아?"
"생리적인 거부감이라고 해야 하나… 매일 보니까 좀 그래."
약간은 공감할 것 같다.
왠지 교수라고 하면 학생의 적 같은 느낌이니까.
루시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일 있을 대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호연하고 임솔 교수님의 대련이 역시 하이라이트겠지?"
"으응. 호연 씨랑 임솔 교수님은 유명인이니까."
이호연은 둘의 말을 들으며 임솔과의 대련을 상상했다.
'일단은… 싸워봐야 알겠지.'
레베카와 임솔의 전투 방식은 전혀 다르다.
특히 마천궁과 아크의 조합은 레베카보다는 임솔에게 더욱 효과적일 터.
이호연의 전투 감각까지 합쳐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에 지옥의 마력도 있고….'
레베카와 대련에서는 지옥의 마력을 빠르게 꺼냈지만, 그 효과를 알았으니 임솔과의 대련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비수로 사용해야 한다.
질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호연은 이번 기회를 잡고싶었다.
"아무리 호연 씨라도 임솔 교수님을 이기기는 조금 힘들겠지?"
"그렇지만… 으으, 저는 호연 씨를 응원해요."
"나도 응원은 할 거야! 안 되겠어. 내일 대련을 위해서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평소에 항상 훈련하잖아. 따로 준비할 게 있어?"
"사랑이지 사랑. 최고의 준비는 사랑의 힘인 게 당연하잖아."
"…."
이호연은 오른팔을 끌어안는 루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준비 인가 했더니 그런 소리였구나.
동시에 왼팔에도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 내일 루미는 참여 안 하지 않아?"
"저, 저는 호연 씨랑 루시를 응원할게요…!"
이호연은 양 쪽에 달라붙은 쌍둥이에게 포근한 감정을 느꼈다.
루시와 루미는 항상 밝은 미소를 보내주고, 이호연이 불편하지 않도록 둘이 함께 만나준다.
그 배려에 감사해야겠지.
"…."
이호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둘의 해맑은 미소를 보니 또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한다.
이호연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루시와 루미에게 집중해야지.
"이리 와. 루시."
"으, 으응…."
이호연은 잡념을 지우기 위해 루시의 몸을 끌어안으며 올라간 입꼬리를 자신의 입으로 틀어막았다.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는 키스.
방금까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던 루시는 이호연의 키스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 하아…."
"호, 호연 씨. 으."
짧은 키스를 멈춘 이호연은 남은 한 팔로 루미를 잡아당겼다.
'… 역시 곧바로 키스하는 건 좀 그런가?'
잠시 고민한 이호연은 루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격렬한 섹스 중에는 마구잡이로 키스하곤 했지만, 역시 모두 맨 정신일 때는 어느 정도 배려를 해야겠지.
"이호연… 침대로 갈까?"
"응. 올라가자."
눈이 풀려버린 루시가 이호연을 잡아당겼다.
평소대로 루시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기려던 이호연은, 루미의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자, 잠시만… 루시. 역시 내일이 대련인데 오늘은 참는 게 좋지 않을까?"
"어…?"
"호연 씨도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하는데 너무 무리시키는 건…."
"으, 으음. 그럴지도. 나 때문에 네가 무리하는 건 싫어."
이호연은 갑작스러운 대화에 진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섹스 몇 번 정도로 자신의 체력이 부족할 일은 절대 없다.
"아니야. 루미. 이 정도는 괜찮아."
"안돼요. 호연 씨. 내일은 중요한 대련이잖아요."
"물론 중요하긴한데…."
사실 루시루미 쌍둥이를 안는 건 이호연에게 꽤나 힐링이었다.
3p라는 경험은 해도 해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가슴이 무려 4개인데.'
이제 엘리스와 아이린 자매도 가능성이 생겼지만, 아직 그 둘은 루시 루미만큼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루시루미와 섹스 기회는 소중했다.
"루미. 한 번은 괜찮지 않을까? 이호연의 성욕은 루미 너도 잘 알잖아. 오히려 성욕을 못 풀어서 답답한 상태로 대련을 하는 게 더 신경 쓰일지도 몰라."
"그,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호연 씨라도 그 정도는…."
"루시. 나를 너무 짐승 취급하지는 마."
아무리 그래도 성욕을 못 풀어서 답답하다니, 누굴 원숭이로 아는 건가.
루미와 이호연의 말에 당황한 루시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맞잖아. 저번에 내가 잠든 동안에도 덮쳤었지? 다 알고있다구."
"… 응?"
웬만한 장난은 받아주는 이호연이지만, 지금 루시의 장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든 동안에 덮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덮쳤다는 게 무슨 뜻이야?"
"저번에 루미랑 데이트하고 숙소에서 잤을 때 말이야. 그렇게 하고도 부족해서 내가 자는 동안 밤에 일어나서 몰래 더 했잖아."
"…?"
혹시나 해서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이호연이 잘못 기억할 리가 없었다.
루시와 같이 잠든 적은 있어도 자는 루시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섹스를 한 적은 없다.
"그런 표정 지어도 안돼. 다 아는 방법이 있거든."
"음, 루시.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그런 적 없어? 아니, 잠들 때가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때 섹스한 적. …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이유도 없고."
"어,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루시의 표정이 점점 굳고, 이호연은 대화의 핀트가 많이 어긋난 걸 깨달았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루미도 깜짝 놀라 이호연의 팔을 붙잡았다.
"호, 호연 씨. 정말인가요…? 루시 몰래 관계를 한 적이…."
"당연하지. 그 정도로 짐승은 아니야."
"아… 어, 언제. 언제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이호연은 루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서야 상황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저 반응은 장난이 아니었다.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호감도 : 100 ] (+ 1.4 )
[ 성욕 : 80 ]
[ 식욕 : 40 ]
[ 피로도 : 45 ]
현재 상태 : … 펠릭스? 역시 펠릭스인가? 이호연이 구하러 오기 직전에 어쩌면….
'펠릭스…?'
이호연은 루시의 상태창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루시의 반응을 보면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펠릭스라니.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놈이 왜 튀어나오는 거야.
"으, 으음… 아닌데. 분명 아닐 거야. 이호연. 다시 생각해봐…."
"… 루미.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어?"
"아, 네에… 실은 루시가…."
이호연은 혼란스러워하는 루시 대신 루미에게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사정을 들을수록 이호연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고, 곧 그 때의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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