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5화 〉 465화. 여담
* * *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은 불길하게 연기를 내뿜었고인간과는 생김새가 다른 생명체들이 두 발로 걸어 다녔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않은 스산한 분위기가 흐르는 이 곳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네네. 민원입니까. 지금 갑니다!
여기 눈알 국수 1인분이요!
소위 말하는 사람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지옥에도 지적 생명체는 있었고, 마왕의 통치 아래 사회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옥의 마수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삶을 살아갔다.
이 거대한 지옥을 다스리는 존재가 마왕.
지금의 마왕은, 휴식기라는 명명하에 은둔한 상태였다.
지옥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왕성은 지옥에 있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늘 높게 솟아있었다.
저택의 방에서 마왕성의 꼭대기를 노려보던 루시퍼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하에게 말했다.
"마왕성은 여전하겠지?"
"… 예. 마왕성의 문을 걸어 잠근 채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단하군. 역시 마왕을 믿는 게 아니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의 계획은 완벽했다.
아니, 계획이라는 말도 틀렸다.
마왕의 자리는 당연히 루시퍼의 것이었다.
마왕의 후계자 중 루시퍼의 세력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와 대등하게 설 수 있던 건 단 한 명.
서큐버스인 릴리아나 칼리오페.
'…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다.'
릴리아나 칼리오페는 루시퍼의 유일한 경쟁자였다.
그녀는 서큐버스인 주제에 매혹을 사용하지 않는 돌연변이.
강한 무력으로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릴리아나는 서큐버스라는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고 악마인 루시퍼에게 대항했다.
악마라는 종족으로 태어나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었던 루시퍼에게 그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큐버스는 뛰어나 봤자 창녀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릴리아나에게 흥미가 생겼다.
지루한 인생을 환기하는 존재.
루시퍼는 그녀와 마왕의 자리를 두고 하는 경쟁이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날.
릴리아나 칼리오페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이루었던 강력한 세력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와해되었고 마왕이나 서큐버스 퀸도 그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만한 강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건 지옥에서 흔한 일이지만, 루시퍼는 진한 이질감을 느꼈다.
릴리아나 칼리오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그렇게 사라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흐르고.
가장 큰 위협이 사라진 루시퍼는 누구나 인정하는 마왕의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너무나 지루했지만, 마왕이 되면 모두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루시퍼가 마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 마왕인 아버지가 갑자기 은거하기 전까진.
"설마 이제와서 돌발행동을 할 줄이야."
갑작스러운 1년의 휴식기.
마왕은 아무 사정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모든 마력을 이용해 마왕성을 봉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인가…."
루시퍼의 마안이 빛났다.
마안은 그가 가진 강력한 힘이었다.
루시퍼의 마안은 모든 걸 꿰뚫었고, 원하는 정보는 모두 알 수 있었다.
"… 될 리가 없나."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저 마왕성은 루시퍼의 마안에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예 보이지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뚫리지않는 느낌.
거대한 벽이 서있는 감각이었다.
마왕조차 피할 수 없었던 마안이 벽을 느낀다면, 대체 저 마력은 정체가 무엇인가.
루시퍼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몸을 맡겼다.
루시퍼는 권태감에 빠져있었다.
4명이었던 마왕의 후계자 중 남은 건 자신뿐.
케이론과 알베도도 마왕이 휴식기를 가진 타이밍과 비슷한 때에 돌연히 사라졌다.
취미로 즐기던 인육도 이제는 즐기지 못했다.
요즈음 지옥으로 흘러들어오는 인간이 많아지면서 인육의 공급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인육이 희귀할 때는 직접 유통에 관여하며 즐겼지만, 누구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해진 지금은 흥미가 떨어졌다.
'차라리 릴리아나와 경쟁하던 때가 재밌었다.'
루시퍼는 몸을 채우는 지루함과 공허함을 받아들였다.
마왕이 되어 지옥을 통치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마왕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지루한 일상이 끝을 고하기 직전에 마왕성이 폐쇄되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저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루시퍼는 마왕성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역시 마왕이 자신을 배신한 건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1년이라는 봉인이 끝나고 나면 모든 마력을 소모한 마왕은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왕의 자리는 자신의 것.
마왕이 자리를 넘기기 싫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인정하지도 않았겠지.
"음?"
루시퍼가 끝나지않는 고민을 이어가던 그때.
그의 눈앞에 마력의 빛이 나타나며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받으면 네 고민이 모두 해결될 거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는거지?"
루시퍼는 자신의 귀에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며 마법을 확인했다.
지옥의 강자인 루시퍼도 이런 마법은 처음이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진이라니.
감히 누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루시퍼는 마안을 빛내며 마법진을 읽었다.
"… 보이지 않아."
마왕성과 똑같았다.
자신의 마안이 통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힘.
불길함에 마력을 지워버리려던 루시퍼는, 마력에서 흐릿한 지구의 향을 느꼈다.
그리고… 흐릿한 향 사이에 루시퍼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구의 마력인가. 아니, 이건…."
마왕의 후계자만이 느낄 수 있는 동족의 향.
익숙한 형제의 마력이었다.
"형제…. 그것도 매우 강한 음기."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진과 지구의 향. 그리고 형제의 마력.
자신의 형제 중에 강한 음기를 가진 건 단 한 명 뿐이다.
"릴리아나 칼리오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었지만, 루시퍼는 자신을 이끄는 마력을 피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
화요일 오전. 레베카의 방.
이호연과 남다은이 아카데미로 향한 뒤.
레베카는 릴리아나와 스칼렛을 자신의 방으로 소집했다.
"하으. 무슨 일이야? 졸린뎅."
"레베카 님이 이렇게 부르는 건 오랜만이네요."
"으응. 둘 다 여기 앉아봐."
레베카는 자신의 고민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 했다.
남편을 내조하는 건 아내인 자신의 일이지만, 레베카는 이호연이 좋아하는 여자는 모두 받아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불렀다.
여기 남다은까지 있었다면 완벽했겠지만, 다급한 사안이라 남다은에게는 나중에 공유할 생각이었다.
"먼저 하나 고백할게. 최근 애기 아빠랑 숨어서 마법을 만들었거든…."
이호연의 부탁으로 레베카는 가짜 던전 마법진에 대한 걸 모두에게 숨겼다.
물론 같은 집에 사는 이상 아예 비밀로 할 순 없었기에 마법 연구라고 둘러댔다.
집안의 다른 여자들은 레베카와 이호연이 무언가 진행하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굳이 캐묻지않았다.
하지만 오늘, 레베카는 자신이 아는 걸 숨기지않고 공개했다.
이호연의 부탁으로 마법진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마법진이 완성되는 동안 이호연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것.
고민을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찾아내는 수 밖에.
레베카는 모두가 아는 정보를 취합해 이호연의 고민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몰래 애기 아빠랑 가짜 던전 소환 마법을 만든거야."
레베카의 설명을 들은 릴리아나와 스칼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레베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레베카하고 이호연이 가짜 던전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만들었다는 거지. 음. 이해했어."
"그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긴 한데, 던전이라. 과연 무슨 용도일까요."
"나도 사용처는 몰라. 하지만 중요한 건 용도가 아니야. 요즘 애기 아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 음. 생각해보면 약간 그런 것 같기도하고."
"저는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릴리아나는 애매하게 동의했고, 스칼렛은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호연은 조금 더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었고, 더 여유로워 보였다.
물론 지금도 그런 분위기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졌다.
"분명 심각한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물어봐도 말해주지 않거든."
"그의 고민인가요…. 사실 뻔하긴 하네요."
"응. 스칼렛 양은 짐작 가는 게 있어? 나는 던전으로 대체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
"결국 여자 문제겠죠."
스칼렛은 여자 문제라고 확신했다.
이호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대부분이 여자였다.
"여자 문제? 이호연은 원하는 여자는 다 따먹을 수 있잖아."
"릴리아나. 남편에게 그런 말투는 좋지 않아."
"미안행."
"릴리아나 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바람둥이지만, 모든 여자에게 신경을 써주려고 합니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스칼렛은 이호연의 일을 처리하며 그의 사생활을 잘 알게 되었다.
이호연은 하루 종일 여자와 만난다.
누가 봐도 가벼운 바람둥이의 삶.
솔직히 여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좋지않은 모습이다.
스칼렛도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둥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호연은 정도가 꽤 심했다.
바람둥이라 함은 본래 상대의 감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몸이 혹사당하는 데도 계속 여자를 찾는 바람둥이는 없다.
이호연은 특이하게도 자신보다 다른 여자들의 감정을 먼저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여자 문제…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애기 아빠는 여자가 많으니까."
"네. 이상할 정도로 여자를 신경쓰죠. 사실 성욕 해소를 위해서라면 집에 있는 여자들로도 충분할 텐데요."
"스카웃. 그건 나 혼자도 충분해!"
"그가 애정을 바라는 성격은 아니니, 저희가 모르는 그의 비밀이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여자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잖아. 나는 던전 마법진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해. 만드는 동안 애기 아빠의 상태가 정말 이상했다니까."
레베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짜 던전 마법진은 분명 중요한 정보다.
스칼렛과 릴리아나가 가진 정보를 합치면 답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레베카 님. 가짜 던전 마법진이라는 걸 더 자세히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가짜 던전을 구성하는 마법진이야. 실제와 비슷한 던전을 만들어낼 수 있어. 애기 아빠가 마지막 과정을 숨겨서 완성은 못 봤지만… 아. 마법진에 지옥의 마력을 많이 섞는다고 하긴 했어."
"잠시만요. 지옥의 마력과 가짜 던전….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스칼렛은 익숙한 단어에 눈을 찌푸렸다.
지옥의 마력.
이호연이 지옥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있다.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방학 내내 이호연이 큰 관심을 가지던 곳이 있다.
'던전의 이상 현상과 검은 기둥.'
이호연은 아이리스 길드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에 몇 번이나 현장 탐사를 갔다.
허가를 받아야하는 귀찮은 작업인데도 허가가 나왔다는 말이 들리면 곧바로 움직였다.
핑계는 마법 연구.
하지만 이호연이 마법 연구를 할 시간 따위가 없다는 건 스칼렛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던전의 이상 현상'과 '가짜 던전 마법'.
'지옥의 마력'과 '검은 기둥'.
연관점이 있다.
분명 저 곳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 아이린."
이호연은 검은 기둥과 던전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아이린과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늘었다.
어쩌면 그녀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린은 이호연과 만난 시간이 적지만, 그렇기에 나눌 수 있는 비밀도 있다.
"아이린? 그 사람이 애기 아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물어볼 가치는 있겠죠. 그녀만 아는 비밀을 저희가 알게되면 또 다른 정보가 나올 지도 모르니까요."
"그 여자는 나도 프랑스에서 본 기억이 있엉. 어떻게 물어볼거야?"
"일단 다은 양이 오면 천천히 얘기해보죠."
"응. 맞아. 다은이한테도 의견을 물어야지."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풀리고 있었다.
역시 모두에게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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