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4화 〉 464화. 개학 (6)
* * *
두근. 두근.
이호연의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푸른 마력 구체가 그를 감싼다.
마천궁을 전개한 채 아크를 소환하는 건 꽤 부담이 되었으니 빨리 끝내야 했다.
파직. 까드드득.
이호연이 손을 들자대련장 내부의 마력 흐름이 바뀌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레베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카앙!
공격을 한 번 걷어냈지만 이호연의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레베카는 억지로 결계를 터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 애기 아빠랑 수 싸움이 안돼.'
애기 아빠가 이렇게 강했던가?
레베카도 자신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룬의 일족이 멸망한 이후로 하루도 편하게 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호연과의 수싸움에서는 시종일관 밀리기만 할 뿐 공격을 시도하기도 힘들었다.
마천궁이라는 불합리한 마법은 둘째 치고, 이호연의 몸 주변에 떠다니는 마력구는 마치 동시에 여러 명의 마법사와 대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애기 아빠. 잠시만. 조금만 천천히 해줘…."
"오해받을 소리 하지 마세요."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공격의 흐름을 잡았다.
콧소리를 섞으면서 부탁해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아잇, 정말…!"
레베카도 공세를 잡으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밀리는 와중에도 결계를 이용해 공격을 이어갔지만 이호연의 마천궁은 너무나 단단했다.
공격이 주가 아닌 룬의 결계로 이호연의 마천궁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는데….'
저런 엄청난 마법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마천궁과 룬의 결계는 유지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
10분만 지나더라도 레베카가 승기를 잡을 수 있을터.
"이래서 도망갔어야 했는데…."
"자꾸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요. 레베카 씨."
"애기 아빠는 진짜 너무해."
하지만 이곳은 장소가 한정되어있는 대련장.
레베카는 아쉬움을 삼키며 무식하게 날아오는 마법을 막아냈다.
어떻게든 빈 틈을 노리고 싶었지만, 이호연은 룬의 결계로 이루어지는 공격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레베카 씨의 마력이 많긴 하네.'
레베카의 룬의 결계는 강하지만 공격 방식이 한정적이었다.
룬의 결계를 알고 있는 데다가 마천궁을 펼친 이호연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콰득. 아드드득.
룬의 결계를 파고드는 빙결 마법이 녹아내리며 이호연의 시야를 가렸다.
공방의 흐름은 이미 이호연이 가지고 있었다.
레베카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서있는 것 같았다.마천궁을 전개한 이호연은 그 정도로 강한 적이었다.
'안 되겠어.'
레베카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로 했다.
마법사로서 이렇게 밀리기만 하는 건 그녀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렇게 밀리다가 추하게 패배를 인정하긴 싫었다.
파악
레베카는 넓게 펼쳐져있던 룬의 결계를 순식간에 회수했다.
룬의 결계가 넓었던 만큼 일순간 거대한 마력이 그녀에게 모였고, 레베카는 룬의 결계를 갑옷처럼 몸에 두른 채이호연에게 달려들었다.
'… 응?'
이호연은 순간적으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레베카가 맨 몸으로 돌격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룬의 결계를 몸에 감싸는 저런 무식한 방법이라니.
"아니, 저게 무슨…."
당황한 시간도 잠시.
이호연은 눈 깜짝할사이에 눈앞에 다가온 레베카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가속.'
사악
레베카의 주먹이 이호연의 옆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운이 좋았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얼굴에 직격타였을거다.
'… 결계 내의 시간을 조정한 건가?'
룬의 결계의 극의에 다다른 레베카는,범위를 자신의 몸으로 한정한다면 남다은의 공간 가속과 비슷한 활용이 가능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위력은 약하지만 빈틈을 찌른다는 점에선 효과가 엄청났다.
정말 위험한 상황에 사용하려고 숨겨놓은 레베카의 비밀 병기였다.
이호연은 천천히 마법진을 전개했다.
당황은 잠시였다.
첫 공격을 피한 순간 레베카의 사지를 봉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퍼억!
레베카가 허리를 비틀며 이호연의 아랫배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지만.
이호연은 코튼 가드를 이용해 가볍게 막아냈다.
까득. 까드득.
레베카의 발을 타고 올라오는 나무덩굴이 서서히 레베카의 움직임을 봉인했다.
발 하나가 잡힌순간 끝.
레베카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눈치챘다.
"으, 으으윽… 애기 아빠… 그만. 아파…."
대련장에서의 대련은 목숨에 지장은 없는 대신 고통은 그대로 느껴진다.
레베카는 온몸을 조이는 나무 덩굴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띠 띠 띠
동시에 대련이 끝났다는 알림이 울렸고, 이호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레베카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마력을 해제했다.
"한 대는 맞아줄 수 있잖아. 애기 아빠."
"죄송해요. 저도 너무 놀라는 바람에…."
"으응,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강한 남편을 가진 건 행운이니까…."
털썩
레베카는 사지를 감싸던 덩굴이 사라지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베카는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얼굴을 붉혔다.
'대체 어디가 부끄러운 걸까.'
이호연은 주저앉은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 긍정적이라 좋네요. 그런데 레베카 씨가 맨 손으로 달려들 줄은 몰랐어요."
"연약한 여자가 주먹질을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잖아. 비수를 찌르기 좋아서 예전부터 몰래 연습했거든."
"이게 레베카 씨의 비밀 병기예요?"
"비밀 병기 중에 하나지. 인터넷을 보니까 비밀이 많은 여자가 좋다고 하더라."
레베카는 일어나자마자 이호연에게 안겨왔다.
비록 상황 때문에 졌지만, 방금 대련은 대만족이었다. 이 정도라면 어디 가서 맞고 오지는 않겠지.
혹시나 남편이 맞고 오기라도 하면 얼마나 슬플까.
레베카는 마법사로서 자존심이 밟힌 것 보다 남편이 강해진 게 기분이 좋았다.
다른 조건이었다면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레베카 씨. 아프진 않죠?"
"다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괜찮아. 대련장에서의 고통은 뇌를 속이는 거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으응. 애기 아빠. 걱정은 고마운데. 일단 애기 아빠 방으로 돌아갈래?"
"제 방은 왜요."
"오랜만에 진심을 냈더니 몸이 뜨거워서…."
"…."
이호연은 내심 긍정했다.
전투 감각을 느낀 뒤에는 언제나 몸이 뜨거웠다.
슬며시 몸을 비비는 레베카의 감촉에 침을 꿀꺽 삼킨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와 대련장을 빠져나왔다.
*
레베카는 침대에 누운 채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호연과 대련은 당연히 재밌었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더욱 진심을 내보였다.
오늘은 무조건 임신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흐응…. 역시 몸에 좋은 음식은 효과가 있다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아."
이호연은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레베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력은 문제가 없었지만, 마력을 전부 사용한 대련이 끝나자마자 몇 번이나 사정하는 건 이호연에게도 부담이었다.
레베카는 지친 기색도 없이 이호연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이호연은 오랜만에 현자 타임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실전이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애기 아빠가 이겨놓고."
"… 저는 모든 마력을 다 써서 힘이 하나도 없는데 레베카 씨는 팔팔하잖아요."
"후후. 그럴지도?"
이호연은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역시 레베카는 침대에 있을 때 훨씬 순종적이다. 남자로서 마음에 들 수밖에 없다.
"저녁 먹을 때까지 누워서 좀 쉴까? 밤에 할 것도 방금 다 받은 거 같아."
"으음… 조금만요. 저도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가짜 던전 계획의 마법진은 거의 완성된 상태지만, 중요한 계획인 만큼 확인은 해도 해도 모자랐다.
쉴 시간에 마법진의 안정성을 확인하는 게 낫겠지.
이호연의 얼굴을 본 레베카는 잠깐 표정을 굳혔다.
계속 마음에 걸렸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의 팔에 매달렸다.
"애기 아빠. 요즘 무리하는 거 아니야? 쉬는 시간도 거의 없고…."
"뭐, 항상 이랬는데요. 그리고 지금도 레베카 씨한테 안긴 채 쉬고 있잖아요."
이호연은 레베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쉬는 시간이 없는 건 익숙하다.
이 세계에 빙의한 뒤, 릴리아나와 기숙사에서 단 둘이 지내던 때가 이호연이 느낀 여유로움의 마지막이다.
지금은 히로인들과의 일정과 가짜 던전 계획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물론 히로인들과 만나는 게 어떻게 보면 휴식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 쉬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인가?
"남편의 멘탈 케어는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야. 요즘 애기 아빠가 너무 힘들어 보여."
"…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레베카 씨가 저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마법진 만드는 것도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이호연은 실제로 레베카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결계에 해박한 레베카가 없었다면 가짜 던전 계획은 실행도 못했을 거다.
"으으음…."
레베카는 입을 다문 채 이호연의 방을 둘러봤다.
항상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이호연이었다. 물론 가끔은 찌질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는 방은 텅 비어있었다.
허전한 방 안에서 가장 많이 공간을 차지하는 건 이 침대.
그 외에는 릴리아나의 옷이나 레베카와 스칼렛의 잡동사니가 구석에 쌓여있는 게 전부.
이호연이 쓰는 물건은 책상과 옷걸이뿐이었다.
이호연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잠들고, 눈을 뜨자마자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간다.
남는 시간에도 마법진을 연구하고 있으니, 그가 보내는 개인 시간 같은 건 없었다.
'… 무언가 뒤틀어졌어.'
레베카는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꽤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호연은 마법진을 만드는 동안,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의미불명의 마법진을 만들며 도움을 요청해놓고 중요한 세부사항은 결국 숨기는 이상한 짓을 했지만,이상할 정도로 다급한 그 감정이 느껴졌기에 레베카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호연의 감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나이대에 맞는 순수함을 가져서 하는 행동마다 감정이 드러나는 귀여운 모습일 때도 있지만, 중요할 때는 감정이 말소된 기계처럼 날카로울 때도 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레베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고, 이대로 자신의 남편이 이상해지는 걸 보고만 있기는 싫었다.
"나는 애기 아빠가 좋아. 애기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다급해하지 마. 애기 아빠가 이상한 판단을 하면 안 되잖아."
"… 레베카 씨."
"고민이 있다면 말해도 괜찮아. 내가 아니라면 다은이나 스칼렛 양이라도 좋으니까."
"…."
레베카는 진심을 담아 이호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레베카의 품에 안긴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항상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호연이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외롭지 않은데 외로운 느낌.
이호연은 레베카의 부드러운 품에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저, 저는…."
이호연의 목소리에 동요가 섞인다.
자신도 이 모든 게 답답했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꼬이도록 설계된 것이겠지.
점점 가까워지는 히로인들의 관계와 많은 여자와 하렘이라는 부담감.
게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마왕 때문에 수련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이호연이라는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너무나 강했다.
"제가, 아…."
이호연은 레베카의 품에 안긴 채 입을 벌렸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조리 있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표현하면 안 된다는 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기에 결국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짜 던전 계획을 레베카에게 고백한다?
어차피 그녀의 도움이 없더라도마법진은이미완성했다.
이제와서는 아무의미없는행동이다.
게다가 레베카도 결국은 여자고 히로인이다.
억지로 상황을 조작해 히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쁜 짓을… 들키기 싫었다.
"… 그래? 애기 아빠가 아니라면 내가 잘못 집었나 봐. 미안해."
"괜찮아요. 레베카 씨 말대로 확실히 요즘 휴식이 부족하긴 했으니까요.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요."
이호연은 머쓱하게 웃었다.
레베카에게 걱정을 끼쳐버렸으니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 응. 애기 아빠."
이호연이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레베카는 차분한 눈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