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화 〉 459화. 개학
* * *
눈앞이 흐리다.
몸이 둥둥 뜨는 기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나는 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몸을 맡겼다.
"으음…."
푹신한 소파가 내 몸을 감쌌다.
낮잠자기 딱 좋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여보….
…?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귀를 맴돈다.
살짝 눈을 떠보자, 눈앞에 익숙한 여자들이 나타났다.
슬픈 표정을 한 그녀들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보, 제가 처음이라고 했잖아요...."
"나는 정말로 제자를 믿었는데."
"애기 아빠.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10 명인 건 아이 교육에...."
"역시 쓰레기다운 행동이네요."
백아영이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임솔이 싸늘한 눈으로 뒤돌아선다.
레베카가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문 스칼렛이 레베카를 데리고 사라진다.
"자, 잠깐만. 다들 어디가는거야."
깜짝 놀란 나는 일어나려했지만, 푹신한 소파는 내 몸을 감싼 채 날 풀어주지않았다.
히로인들이 사라진 곳에는 다른 히로인들이 나타났다.
"호연아, 나는 너 밖에 없었는데...."
"호연 씨. 저, 저는 괜찮아요. 너, 너무 슬프지만…. 흑. 흑…."
"무슨 소리야 루미! 저 나쁜 자식."
"호연이 네가 책임져준다고 했으면서…."
남다은이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고, 루시와 루미는 부둥켜 앉은 채 서로를 위로했다.
문수린은 슬픈 표정으로 내 사진을 찢었다.
"다, 다들 왜 그래. 얘들아!"
손을 뻗으려 해도 닿지않는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들을 보며 입을 멍하니 벌렸다.
가슴이 아팠다.
왜.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미안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한계가 있어."
"... 그러니까 내가 들키지 말라고 했잖아. 저렇게 많을 줄은 몰랐지만."
엘리스와 아이린이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본다.
모두의 모습이 흐려지고, 어두운 공간에 나 혼자만 남았다.
"아, 아...."
뭐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떻게든 떠나는 그녀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몸을 묶은 푹신한 소파는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야. 어나... 찮아?
짝. 짝.
양손으로 내 뺨을 때렸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좀만 더 잘했더라면.
아니, 그럼 어떻게 했어야하지...?
더 좋은 방법이 있었나?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11명의 여자를 사귀다니.
내기의 신 이 개새끼.
할 수 있는 일을 줘야할 거 아니야.
그래도 최선을 다했는....
야! 일어나라고!
"으어, 으어억...."
그때,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와 얼얼한 고통에 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똘똘한 보랏빛 눈동자가 날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왜 자다가 혼자 울고 있어. 내가 떠나는 꿈이라도 꿨어?"
"아...."
악몽이구나.
나는 등에 흥건한 식은땀을 느끼며 릴리아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릴리아나는 내 몸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몸을 못 움직이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크크. 놀란 얼굴이 재밌어."
릴리아나는 내 뺨을 찌르다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럽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얼굴.
그 미소를 보니 불안하던 감정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릴리아나를 끌어안았다.
"으응...? 가슴이 두근거려. 주인님, 괜찮아?"
내게 안긴 릴리아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나를 끌어안았다.
생각해보면 꿈에 릴리아나가 나오질 않았네.
... 혹시 어젯밤 릴리아나와 섹스를 해서 그런 건가?
'아니겠지.'
나는 릴리아나의 일정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남자는 태어나서 3번 우는 거라는데, 이런 아무것도 아닌 꿈에 1번을 써버렸으니 엄청난 손해였다.
"크흠. 고마워. 릴리아나."
"악몽을 꿨구나. 미안해요. 주인님. 내가 깨있었으면 좋은 꿈으로 바꿔줬을 텐데, 끙끙대는 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깨운 거거든."
"괜찮아. 그것만으로도 고맙지. 근데 혹시 깨우면서 내 뺨도 때렸냐?"
"응. 잘 안 일어나길래."
"... 고마워."
어쩐지 뺨이 아리더라.
나는 얼얼한 뺨을 느끼며 릴리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안정을 취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어.
"스읍. 후. 스읍. 후."
나는 릴리아나의 품에서 심호흡을 했다.
릴리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뻐했다.
평소라면 버릇없다며 가슴이라도 꼬집으면서 괴롭혔겠지만, 오늘은 봐줘야지.
"빨고 싶으면 빨아도 돼. 아니면 내가 빨아줄까?"
"... 만지기만 할게."
악몽을 꿔서 그런지 아랫도리도 반응이 없다.
나는 릴리아나의 부드러운 몸을 안은 채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릴리아나가 맛있는 아침밥 냄새가 난다고 방을 나갈 때까지 안겨있었으니, 꽤 오래 안겨있었다.
"하아, 꿈이 왜 이리 무섭냐."
보통 꿈은 깨고 나면 잊는 법인데, 방금 꿨던 개 같은 꿈은 잊히지가 않았다.
살다 살다 여자들에게 버림받는 꿈을 꾸다니.
"... 역시 이제는 준비를 해야겠네."
아이린 엘리스 자매와 뜨거운 밤을 보낸 지 일주일.
곧 방학이 끝나고, 아카데미의 새 학기는 내일부터 시작한다.
아카데미가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히로인들이 모이게 된다.
"… 흠."
이호연은 오른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
검은 기둥을 소환할 수 있는 지옥 동화 반지.
일단은, 검은 기둥부터 소환하자.
*
아카데미의 부지에서도 기숙사와 가까운 구석진 곳.
생도들의 산책이나 취미활동을 위해 자연을 보존해놓은 빅토리아 공원.
희귀한 식물은 물론 귀여운 동물들까지 마법으로 보호받으며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아카데미의 명소다.
방학 때는 관리를 위해 출입을 막아놨지만, 이제 신학기가 시작되면 발걸음이 끊기지 않겠지.
그 공원 안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출입금지 현수막이 달려있는 공원의 안에 침입한 이호연은, 천천히 반지를 꺼냈다.
────────────
[지옥 동화 반지]
▶ 전설 등급
▶ 정체불명의 불길함이 담긴 반지.
▶ 사용 시 지옥과 동화를 진행하는 검은 기둥을 소환합니다. 검은 기둥은 지옥의 기운을 내뿜으며 지구의 마력을 빨아들입니다. 기둥의 주변에 있는 인간은 제대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
사실 지옥과 동화를 진행하는 검은 기둥을 직접 소환하는 게 약간 께름칙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수 백개의 기둥이 나타났으니 하나 정도 늘어난다고 눈에 띄는 변화는 없을 거다.
"여기서 지옥의 마력을 넣으면 되겠지."
이 곳으로 정한 이유는 출입 금지 구역인데다가 높은 구조물들이 많아 곧바로 눈치챌 가능성이 적기 떄문이다.
이호연은 반지에 지옥의 마력을 듬뿍 주입했다.
지옥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삼킨 반지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이호연의 손가락을 빠져나왔다.
드득. 으드드득.
불길한 마력을 내뿜으며 바닥에 떨어진 반지는 곧 녹아서 흙으로 흡수되었다.
검은 기둥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크고 두껍다.
공원에 있는 나무와 구조물 덕분에 곧바로 들키진않겠지만, 기둥이 나타난 시점에 출입 금지인 공원에 있는 건 너무 수상하니 곧바로 도망쳐야겠지.
"... 뭐야 이거?"
검은 기둥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만 확인하려 했는데,나타난 검은 기둥을 본 이호연은 걸음을 멈췄다.
땅에서 툭 튀어나온 죽순 같은 무언가.
검은 기둥이라고 부리기 애매한... 굉장히 작은 돌부리 같은 게 소환되었다.
지옥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채 인간의 마력을 억제하는 걸 보면 분명 검은 기둥이 맞지만, 억제량이 너무 적었다.
"생각보다 작네?"
이호연은 마력 탐지를 펼쳤고, 기둥 주변으로 모이는 마력을 확인했다.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성장하는 거구나."
모든 검은 기둥이 이렇진 않을 거다.
아마 반지로 소환한 검은 기둥만 이렇겠지.
"이러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지는데."
검은 기둥에 맞춰서 마법진을 커스텀했으니, 기둥이 성장하지 않았는데 던전을 소환할 순 없다.
그래도 장점을 생각해보자면 아이리스 길드의 조사팀에게 안전하게 맡길 수 있다는 것.
기둥이 나타나자마자 아이리스 길드가 우선 조사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던전의 조사까지 연계할 수 있다.
이호연은 곧바로 공원을 빠져나가며, 아이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몇 시간 뒤.
이호연은 자신의 방에서 뉴스를 확인했다.
아카데미 지부에서 새로운 형태의 검은 기둥 발견. 아이리스 길드가 단독 조사하기로.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정기적인 정찰로 검은 기둥을 선조치한 아이리스 길드에게 조사권을 넘겨....
"좋아 좋아...."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연락을 받은 아이린은 곧바로 조사팀을 파견했고, 아카데미와 협상으로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권을 넘겨받았다.
이대로라면 자연스럽게 던전의 조사도 아이리스 길드가 맡겠지.
"아이린 씨. 어떻게 됐어요?"
응. 네 말대로 아이리스 길드가 제일 먼저 처리했어.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안거야? 저번에 수상한 말도 그렇고 역시 네가 무언가 한 건....
"말했잖아요. 산책하다가 발견했다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검은 기둥을 소환해요. 아직도 아이린 씨가 절 못믿는 걸 보니 좀 서운하네요."
그렇긴 하지.... 미안해. 아이리스 길드에 먼저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아이린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엘리스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날 이후로 엘리스가 연락을 안 받는 바람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내일이면 아카데미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는 어떤 반응이에요? 혹시 학기가 미뤄지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야. 아카데미와 거리가 꽤 있기도 하고, 검은 기둥이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니까.
이것도 예상대로다.
검은 기둥의 위험성은 대부분 증명되었다.
그 주변에서 마력을 사용하기 힘들고, 매스꺼움이나 두통이 일어난다.
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뿐.
검은 기둥의 옆에서 괴한에게 습격이라도 당하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둥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던전을 만들어 억지로 범위에 들게 할 줄은 그 사람들도 몰랐겠지.
이호연은 책상에 정리되어있는 마법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검은 기둥이 성장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준비한 마법진을 사용할 때다.
죽순 정도였던 검은 기둥이, 아이린이 발견한 시점에는 1M 정도로 자라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겠지.
지옥의 마력과 검은 기둥이 생기며 마법진은 처음 계획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히로인들만 끌어들이는 게 아닌, 모든 아카데미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계획이다.
증인이 많으면 그만큼 던전의 신뢰도도 올라갈테니까.
물론 목숨에 위협이 될만한 짓은 절대 안할거지만… 하는 행동만 봐서는 마인이나 자신이나 다를 바가 없다.
"... 역시 아카데미 전부는 좀 심하긴 한데, 하아. 아니야. 마음을 단단히 먹자."
지금은 남을 배려해줄 시간이 없다.
어제의 악몽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않으려면, 정말 확실히 해야한다.
모두를 완벽하게 속여넘겨야만한다.
"그래. 죽이는 것도 아닌데 납치가 뭐 어때."
이대로 가다간 내가 죽게 생겼는데 어떡하냐고.
어차피 자신이 마왕을 못 이기면 다들 죽는 건 마찬가지.
이럴 때 협력하는 게 시민으로서 자세가 아닐까.
"음. 맞아. 확실해."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등교의 준비를 이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