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 454화. 아이리스 자매 (5)
* * *
도둑고양이 같은 년이라니?
엘리스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살짝 고개를 들어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는 아이린을 노려보며 적의를 뿜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호감도 100이 이 정도로 엄청나다고?'
호감도 100이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준다면, 자신이 준비하던 가짜 던전 계획 같은 건 전부 쓸모없는 게 아닐까.
사실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호연의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엘리스의 분노를 이호연이 아닌 아이린이 감당한다면 둘의 사이는 회복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걸 자신이 감당한다는 의도 자체는 좋았다.
문제는 이호연과 엘리스의 서로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이호연에 대한 엘리스의 인식은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처음 프랑스에서 아이린의 공략에 대해 고민할 때만 해도, 엘리스에게 이호연은 쓰레기라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호연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쓰레기인 상태로 호감도를 올려놨으니 좀 더 쓰레기 짓을 해서 호감도를 약간 낮추더라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자매의 관계를 회복시킬 생각이었는데, 많이 꼬여버렸다.
시작은 엘리스가 이호연을 저주에 걸렸다고 오해했을 때부터였다.
이호연이 여자를 건드리는 행위에 당위성이 생긴 것이다.
그가 여자를 쫓아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저주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바라봐야 하는 삶이다.
그때부터 엘리스의 마음속에 이호연이 쓰레기라는 생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스가 자신감을 되찾았을 때.
언니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낸 엘리스는 이호연에 대한 호감도가 점점 올랐고, 이호연에게 더욱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바람둥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삐뚤어진 가정교육은 남자의 바람을 당연한 것처럼 취급하게 만들었다.
엘리스는 '남자라는 생물은 결국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호연의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언젠가는 이호연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의 바람도 여자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다르게 저주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한 거라면?
어느 순간부터 엘리스는 이호연을 쓰레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높은 호감도와 이호연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면서 생긴 신뢰.
그 두 가지가 이호연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엘리스는 이호연의 생각보다 이호연을 믿었고, 엘리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생긴 저주의 빈 틈을 찌른 게 아이린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린을 의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린이 엘리스에게 잘해주기 시작한 시점은이호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아이린은 엘리스를 아끼다 못해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이린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며칠만에 태도가 180도 뒤집어진 것이다.
'내가 너무 순수했어.'
엘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아이린은 그때부터 이호연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이린은 쓸데없이 이호연과 접촉하려고 했고, 자신과 이호연의 사이를 계속 막으려 했다.
게다가 한국으로 파견까지.
1팀장인 그녀가 어째서 한국으로 파견을 왔을까.
아직도 의문이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퍼즐은 금방 맞춰졌다.
엘리스는 놀란 표정의 아이린을 노려보았다.
'… 어째서 저 남자가 나를?'
한편 아이린은 눈을 크게 뜨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호연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다.
평소에 이호연이 아이린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다.
항상 이상한 이유를 대며 자신을 이용하는 건 아이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 모두 들어줬는데…
이런 곳에서 대신 나서 주는 걸 보니 이호연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원래 착한 사람이 한 번 잘못하면 나쁜 놈이 되는 거지만, 나쁘던 놈이 한 번 착한 짓을 하면 괜찮은 놈이 되는 법.
아이린은 이호연이 그렇게 까지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이호연은 엘리스와 아이린을 보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했다.
다행히 아이린은 엘리스의 중얼거림을 못 들었지만, 엘리스의 적대적인 시선을 보면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호감도 : 97 ] ( + 1.0 )
[ 성욕 : 80 ]
[ 식욕 : 20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도둑고양이. … 다 도둑고양이 때문이야.
'97?'
이호연은 떨어진 호감도에 살짝 놀라며 엘리스를 바라봤다.
초반에는 호감도가 내려갔다 올라갔다했는데, 궤도에 오른 이후로는 이렇게 떨어진 적이 없었다.
특히 100까지 찍었는데도 떨어지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 그래도 대비는 잘했네.'
호감도 100이 되어도 떨어진다는 걸 몰랐을 때부터 가짜 던전을 준비한 건 다행이었다.
아니, 일단 그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겠지.
이호연은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스는 모든 걸 아이린의 잘못으로 착각하고 있다.
사실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말은 했지만, 전부 아이린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를 보지말고 솔직하게 말했어야했나.'
책임을 질 거였으면 단 둘이 있을 때부터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린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게 안 좋은 수였다.
"엘리스. 내가 정말 미안해. 차라리 나한테 화를 풀어."
지난 일을 후회할 시간에, 이호연은 어떻게든 엘리스의 시선을 돌리고자 했다.
아이린과 엘리스의 관계가 망가지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다.
엘리스는 아이린과 이호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둘이 뭐 하는 거야? 로미오과 줄리엣이라도 찍어? 한 명은 감싸주려고 하고 한 명은 감동받고. 나 놀리는 거지?"
엘리스는 눈을 찌푸린 채 둘을 바라봤다.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이호연을 좋아한다지만 자신의 앞에서 이러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아이린이 엘리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 엘리스. 그런 게 아니야. 언니는…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언니. 나를 생각했다면 이호연한테 다가가지 말았어야지.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
"도, 도둑고양이 같은 년?! 엘리스. 어떻게 언니한테 그런 말을…."
"하. 내 말이 틀렸어? 어쩐지 이상했어. 처음부터 이호연이 목적이었지? 그래서 나한테 잘해주기 시작한 거잖아!"
"무, 무슨 소리야. 엘리스. 이호연이 목적이라니? 그건 정말 아니야!"
엘리스가 고함을 지르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아이린은 차마 엘리스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저 둘이 싸우는 거지? 내가 방패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호연은 무서운 대화가 오가는 자매의 사이에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엘리스가 무서웠다.
도둑고양이 년이라니.
그런 천박한 말이 엘리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이호연은 엘리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엘리스,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아무리 그래도 도둑고양이 같은 년은…"
"너 지금 내 탓하는 거야? 사랑한다며. 좋아한다며!"
"아니, 그건 맞아. 좋아하지. 하지만 그. 친언니한테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해서…."
"언니가 먼저 날 배신했잖아! 보나 마나 저주 때문에 방어가 약해진 너한테 꼬리 쳤겠지.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네가 먼저 언니를 건드린 거야? 절대 먼저 안 건드린다며. 설마 너까지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이호연은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대화를 하면서 대충 상황 파악은 했다.
엘리스는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호감도가 높은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린이 잘못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아…. 아이린 씨 말고 차라리 나를 욕해줘. 내 잘못이 커. 정말이야.."
엘리스는 아이린은 너무 적대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엘리스가 이호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내가 못할 거 같아? 이 개새끼야. 내가 언니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이 나쁜 새끼! 원인을 제공한 게 언니여도 너도 나빠!"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호감도 : 94 ] ( + 1.0 )
[ 성욕 : 80 ]
[ 식욕 : 20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나쁜 새끼. 내가, 내가 다 해준다고 했는데도….
'…또 떨어졌네.'
호감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떨어졌는데도 94나 된다. 아직 이호연을 좋아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호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엘리스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연인 관계는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
미친듯이 이호연의 머리를 쥐어뜯던 엘리스는 이호연의 생각대로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감정을 쏟아내다보니 금방 지치게되고, 조금 더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엘리스는 이호연의 머리를 잡은 손을 살며시 풀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손에 붙어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엘리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 일에 대한 짜증보다 아프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약한 마음이 움직였다.
"… 미안. 머리를 뜯고 싶지는 않았는데. 남자는 그런 거에 예민하잖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일단… 내 행실이 문제였던 것 같아. 사과할게. 엘리스."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엘리스는 이호연의 머리를 정돈하며 사과를 받았다.
다행히 외모에 문제는 없었다.
엘리스는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쳐다봤다.
아이린은 아직도 슬픈 눈으로 엘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스가 작전 중에 다쳐서 병실에 입원했을 때 걱정하며 바라보던 그 눈 그대로였다.
정말 언니가 문제인걸까.
그럼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걸까.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진 엘리스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 그래. 알겠어. 내가 없는 동안 잠깐의 불장난. 그런 거잖아. 언니, 안 그래? 언니는 예쁘니까 이호연의 눈이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언니도… 잠깐의 실수겠지."
엘리스는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관계.
좋은 언니와 적당히 나쁜 남자 친구.
그 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자. 내가 왔잖아. 설마 이렇게 됐는데도 언니는 이호연을 노리는 거야?"
이호연과 아이린이 자신 몰래 관계를 가진 것에 화가 난 건 맞다.
남자 친구와 친언니가 바람이라니. 당연히 화를 내야겠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호연이 남다은을 만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대상이 자신의 친언니일 뿐.
어차피 잠깐의 바람은 지금도 피우고 있다.
'… 언니는 아름다우니까.'
엘리스는 이호연과 아이린을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 마음에는 괘씸함도 있지만, 불안함도 섞여있었다.
이호연이 아이린을 좀 더 좋아할까 봐.
자신보다 예쁘고 성숙한 언니에게 마음이 좀 더 갈까 봐.
엘리스는 그 정도로 이호연에게 빠져있었다.
불안한 감정을 가슴 깊은 곳에 숨긴 엘리스는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언니도그건싫잖아.나랑똑같은남자를만날수있어?나는지금당장엄마아빠한테이호연과사귄다고할거야.설마언니도엄마아빠한테얘기할건아니잖아.동생이랑같은남자랑만나게되었다고얘기할수있겠어?"
"…."
아이린은 눈을 감았다.
자기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제일 잘아는 법.
아이린을 절대 엘리스를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엘리스는 이호연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지.
지금의 대화로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로 원하는 걸 다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동생에게 미움받는 게 두렵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겠지.
평생 다가가지 못하는 것 보단 도전하는 게 낫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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