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화 〉 450화. 아이리스 자매
* * *
엘리스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벌컥 열었다.
아이린의 방.
그 안에는,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 언니?"
"으응. 엘리스. 뭐야? 연락도 안 하고 왔네. 언니한테 서프라이즈?"
엘리스는 눈을 깜박거리며 아이린이 앉아있는 침대를 바라봤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린의 모습.
아이린은 엘리스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응. 혹시 집에 들어온 거 몰랐어? 언니가 마중을 안 나오길래 이상해서."
"아, 아… 언니가 방금 깼거든. 한국 지부의 일이 늦게 끝나다 보니까…. 엘리스도 언니의 마중이 그리웠구나? 맞아. 이럴 때가 아니지. 피곤하지 않아?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 잠시만."
엘리스는 아이린을 보며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여자에게는 특유의 감이 있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
자신의 감에, 아이린이 걸리고 있었다.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인 아이린은 표정 관리에 능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 정도는 쉬운 일.
엘리스는 천천히 방 내부를 둘러보다가 아이린이 앉아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구김 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
먼지 하나 없는 러그와 말끔하게 접혀있는 아이린의 잠옷.
"엘리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잠시만. 언니."
엘리스는 조용히 방을 살폈다.
옷걸이에는 아이린의 제복이 걸려있었다.
자동으로 옷을 빳빳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옷걸이.
하지만, 아이린의 제복은 그 이상으로 깨끗했다.
마치 클린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 같았다.
… 마법의 옷걸이에 걸린 옷에 클린 마법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엘리스의 저택은 당연하게도 클린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집의 모든 부분을 커버하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린의 방도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이 침대와 바닥.
엘리스는 침대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스윽.
"… 언니. 침대에 클린 마법을 썼나 보네?"
"어, 어응. 방금 음료수를 쏟았거든."
아무리 마법진이 설치된 집이라지만 직접 사용하는 마법과는 효과가 다르다.
엘리스는 클린 마법의 흔적을 확인했다.
프랑스에서 진행한 특훈으로, 엘리스의 실력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감각.
마법과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엘리스는 특히나 감각이 좋아졌는데, 원래라면 비교할 수 없을만한 차이도 이제는 비교할 수 있었다.
본래 클린 마법에 흔적이라는 건 없지만, 엘리스는 뛰어난 감각으로 미세한 차이를 파악알 수 있었다.
침대에서 창문으로 이어지는 조금 더 깔끔한 바닥.
한 달 전의 엘리스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린의 호흡.
엘리스는 아이린의 숨소리와 눈짓을 읽었다.
조금 빨라진 숨소리와 눈짓.
당황한 티가 나진 않지만, 아이린은 엘리스가 바라보는 클린 마법의 흔적을 계속 흘겨보고 있었다.
'… 엘리스는 왜 창문을 보고 있는 거야? 흔적은 완벽하게 지웠는데.'
아이린은 자신의 표정과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만, 하필 상대가 친동생인 엘리스였다.
한 달만에 본 엘리스는, 이호연과 섹스 도중에 갑자기 집으로 들어왔다.
어떻게든 이호연은 내보냈는데, 엘리스가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다.
혹시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린은 표정과 감정을 확실하게 관리하며 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바닥하고 창문이 왜?"
"으응. 그런 거 아니야.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우리 밥은 조금 이따가 먹자. 나 이호연한테도 인사를 해야할 거 같아. 한 달만에 왔으니까."
"아, 아… 응. 알겠어. 친구 얼굴도 봐야지."
아이린은 서운하면서도 내심 기뻤다.
엘리스가 이호연보다 자신을 먼저 보러 왔다.
드디어 인정받은 거겠지.
'이 마법은….'
엘리스는 마검사.
검을 위주로 사용하지만, 어느 정도 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마법사가 아니다.
엘리스가 집중해야 알아차릴 정도의 클린 마법은, 아이린이 쓸 수 없다.
적어도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여야한다.
그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 이호연?'
이호연이라는 물증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상 가장 먼저 의심되는 건 이호연이다.
미녀와 관련 있는 사건은 대부분 이호연과 연관되어 있었다.
엘리스는 아이린의 방 밖으로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실 이호연을 의심하기는 싫었다.
분명히 그는 아이린을 먼저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쁜 놈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먼저 건드리지않겠다는 말은, 아이린이 다가왔을 때 거절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이호연에게 여자와 관련 있는 저주가 걸린 건 알고 있다.
만약 자신이 없어서 저주가 심해진 동안, 아이린이 이호연에게 다가갔다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호연이 허락했다면?
"언니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긴 하지만…."
이해가 안 되긴 한다.
아이린이 이호연과 관계를 가진다?
남녀 사이에 감정이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친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이린이다.
동생을 사랑해주는 언니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사람.
자기를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항상 어떻게든 잘해주려고 하는 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호연에게…?
"역시 쓸데없는 고민인 것 같네."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를 실행했다.
일단… 이호연에게 연락을 해보자.
보기보다 순수한 이호연은,아이린과 다르게 이호연은 표정관리를 못하는 편이다.
만약 쓸데없는 의심이라면 오히려 좋다.
오랜만에 본 이호연과 사랑을 나누면 그만이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은 대비 해놔야겠지.
나 : 나 한국에 돌아왔어. 지금 당장 볼 수 있을까?
*
"와. 씨. 큰일 날 뻔했네. 쟤는 왜 말도 안 하고 여기까지 오는 거야."
아이린의 방 창문을 타고 빠져나온 이호연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룬의 결계를 치고 있어서 다행히 걸리진 않았는데,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가 창문을 타고 빠져나오는 건 만화에서나 봤다.
이걸 실제로 하게 될 줄이야.
"살다 살다 별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설마 여자의 집에서 창문으로 탈출하는 경험까지 하다니. 감회가 새롭다.
집에 들어온 이호연은 한숨 돌리며 지하실로 들어갔다.
아이린의 도움으로 기둥이나 던전에 갔다 와서는 항상 마법진을 보수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
이제는 연구를 끝낼 때였다.
이호연은 지하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레베카를 보며 말을 걸었다.
"레베카 씨. 여기 있었네요?"
"응. 애기 아빠는 이제 왔네. 오늘도 검은 기둥을 보고 온 거야? 수정할 점은?"
"네. 그렇죠. 이제 고칠 곳도 없으니 슬슬 완성해도 될 거 같아요."
"드디어 끝이구나. 흐으응. 힘들었어."
마법진이 완성 단계에 들어간 후, 레베카의 개인 시간도 많이 늘어났다.
개인 시간의 대부분을 지하실에서 보낼 때는 굉장히 미안했는데, 이제 좀 쉬게 해도 되겠지.
이호연은 레베카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스읍.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다 보니 아이린과 섹스를 멈추고 온 게 떠올랐다.
아래에서 반응이 올 것 같기도 했는데,지금은 참자.
오늘은 마법진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도 길게는 몇 년까지 봤는데, 몇 달밖에 안 걸렸어요."
"다 애기 아빠 덕분이지. 이걸 만드는 동안 내 마법적 성취도 꽤 늘었어. 역시 좋은 유전자야."
"...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완성할게요."
"알겠어. 나는, 으으. 릴리아나랑 놀러 가야겠다. 당이 부족해."
"네네. 거실에서 초콜릿 먹고 있을거예요."
레베카는 편안한 표정으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현재 가짜 던전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레베카뿐이다.
그만큼 보안이 중요한 일이다.
이호연은 마력을 일으키며 마법진을 가동했다.
레베카에게는 완성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추가적인 작업을 조금 더 해야 한다.
가짜 던전의 계획은 단순했다.
먼저 아카데미의 히로인들이 모여있을 때 가짜 던전을 펼친다.
그리고 던전의 안에서 이호연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을 증폭시킬만한 이벤트를 만들면 끝.
이벤트는 환영이 될 수도 있었고, 이호연이 직접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공통점은 이호연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것.
자세한 사항은 마법진을 완성해가면서 효율이 좋은 쪽으로 정할 생각이었는데, 얼마 전에 특이 사항이 생겼다.
바로 [지옥 동화 반지]
이게 있다면 던전에 검은 기둥을 소환할 수 있고, 검은 기둥이 있는 이상 던전에서 마력을 사용하기는 극히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사건 자체를 편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던전의 스케일도 더 늘려도 되겠지.
"범위는… 아카데미 전부."
본래 던전 내부의 마력을 제한하는 기능은 검은 기둥이 대체할 수 있다. 게다가 검은 기둥이 있다면 던전의 조사도 힘들어질 테니, 보안 부분까지 조금 덜어도 되겠지.
대신 던전의 크기를 늘리고, 자신의 권한을 늘린다.
이호연 자신도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검은 기둥이 있다면 마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그러니 던전 자체의 마력을 이호연에게 유리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방학이 끝나고… 모두 아카데미에 모이는 시점에 쓰면 될 거 같은데."
이호연은 마법진의 구상을 끝낸 뒤 천천히 작업에 들어갔다.
지옥의 마력을 섞어 만든 마법진은 이제 완전히 불길한 빛을 뿜고 있었다.
"지옥의 마력을 섞길 잘했어."
처음은 보안을 위해서였지만, 마법진에 지옥의 마력이 많이 섞여있어서 검은 기둥이 있어도 제대로 발동한다.
여러 번의 실험으로 확인한 점이니 확실했다.
띠링
한창 마법진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스마트 워치가 울렸다.
엘리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엘리스 : 나 한국에 돌아왔어. 지금 당장 볼 수 있을까?
"엘리스구나."
쩝.
이호연은 입맛을 다시며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현자 타임에 느끼는 죄책감.
일단 작업을 끝내고 답장할까.
지금 바로 봤다가는 왠지 미안해서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을 거 같다.
딩디링딩. 딩디링딩딩.
"…."
이호연은 전화벨이 울리는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화면에는 엘리스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메시지를 안 받으니까 전화를 해버리는구나.
"여보세요. 엘리스?"
[지금 당장 와달라니까. 왜 답장이 없어?]
"미안. 한국에 돌아온 지 몰랐네. 으음, 사실 지금 연구 중인 마법이 있거든. 너도 알다시피 마법 연구는 멈추기가 힘들잖아. 하필 지금 딱 좋은 타이밍…."
[한 달만에 보는 나보다 마법이 더 소중하다는거지?]
"… 아니. 마법 연구 때문에 메시지를 못 봤지만 지금 당장 가겠다는 뜻이야."
[아하.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 호연아. 그럼 내 방에서 기다릴게. 바로 옆 집이니까. 3분 만에 와 줘.]
"응. 바로 갈게."
크흠.
전화를 끊은 이호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나.
한 달만에 보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
방금 그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보고싶어하는 엘리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나도 보고싶긴하네."
… 아이린과 멈춘 섹스를 엘리스와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꼴리기도 했다.
이호연은 곧바로 마법진을 정리하고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