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 448화. 방학의 끝 (5)
* * *
판데믹의 지배자. 마에스트로.
조용한 방 안에서 그는 어둠에 몸을 맡겼다.
"… 어째서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는 거지."
그는 섬뜩한 악마를 닮은 조각상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중얼거렸다.
계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불안해하진 않았을 거다.
원래 마왕의 계시는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할 때는 항상 나타났다.
며칠 전 갑자기 전 세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검은 기둥.
그 때문에 마에스트로는 긴장과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대체 뭐지?'
이미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는 끝났다.
조사 과정에서 마인들의 희생이 있긴 했지만, 그 기둥이 마왕의 소환을 도와주는 구조물이라는 건 파악했다.
즉, 판데믹의 행보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게 문제였다.
자신이 판데믹의 수장 자리에 있는 동안. 그는 종종 마왕의 계시를 받아왔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떻게 해야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지.
모든 건 아니지만, 중요한 일은 모두 계시대로 했다.
던전의 이상현상도 마찬가지였다.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계시가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에스트로가 모르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운명의 상대인 이호연의 등장.
정체불명의 검은 기둥.
점점 빨라지는 일의 진행속도.
이제 자신이 필요 없어진 건가?
어째서?
평생 당신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마에스트로는 고개를 숙인 채 조각상에 기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밀려오는 흉한 모습의 악마 조각상.
마에스트로는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눈을 끔벅거렸다.
문득 직감했다.
이제 더 이상 조각상에 기도를 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
… 자신이 알던 '그분'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넌 대체 누구냐…."
마에스트로는 조각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소환하려던 마왕이 아니다.
지금 인간을 노리는 존재는… 마왕이지만 마왕과 다른 존재였다.
그 이질감에 공포를 느끼던 마에스트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어릴 때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은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다.
지극히 평범했던 이호연의 부모님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이호연을 훈육했고, 그 결과 다른 세상에 떨어졌는데도 올바른 가치관으로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바닥의 무늬를 세 본 경험이 있는가.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바닥의 무늬나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정세가 어찌나 흥미로운지.
'여기 세공이 잘 되어있네. 타일 퀄리티도 좋고… 역시 vip 병실인가?'
이호연은 병실의 바닥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분위기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물론… 물론 이해해. 호연이 네가 처음부터 이기적일 거라는 건 알았어. 나도 모든 걸 알고 받아들인 거니까… 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솔직히 나는 많아봤자 세 명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거기서 봤던 여자들은 누구야? 레베카는 누구고 그 방송하는 여자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호연이를 조, 좋아하지만… 호연이 너도 나를 선택했으면 그런 태도를 보여야 하잖아. 나, 나는 억울해. 아니, 억울하다는 말은 취소할게. 정말 미안해…. 그, 그래도 조금은…."
이호연은 문수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바닥 타일 세기도 슬슬 힘들었다.
'…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저 병문안을 왔을 뿐이다.
내기의 신을 만난 후.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된 걸까.
이호연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수린이 하는 말은 요약하자면 자신에게도 사랑을 더 달라는 것.
횡설수설하는 걸 보면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듣기는 꽤 힘들었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호감도 : 100 ] ( + 0.8 )
[ 성욕 : 80 ]
[ 식욕 : 45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 너무 나만 말했나? 다른 여자가 많은 건 알았지만… 슬퍼.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에 대한 의존이 심해짐.]
'… 의존?'
문수린의 상태창을 본 이호연은 새로운 단어에 눈을 찌푸렸다.
호감도가 100이 되면 당연히 모든 히로인들의 사랑이 돈독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마다 호감도 100이 되었을 때 심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문수린은 의존이었다.
이호연은 다시 문수린의 얼굴을 살폈다.
책망하는 게 아니다.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호연이 너무 멀어질까 봐.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의존.
'생각해보면 수린 누나가 원래부터 내게 의존하는 느낌이 있었지.'
스토킹 사건부터 문성민 사건까지. 문수린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호연이 위로해줬다.
이호연은 문수린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했고, 문수린은 그런 이호연에게 의존했다.
문수린이 왜 폭주한 것인지는 감이 온다.
처음에는 이호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던 문수린도 사건이 점점 해결되면서 이제 긴장이 풀린 거겠지.
조금 더. 조금 더.
욕심이 나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비난할 생각은 당연히 없다.
이호연 자신도 매일같이 생각을 바꾸는데, 날 더 좋아해달라는 여자를 욕할 순 없지.
차라리 내기의 신이 준 선물이 튀어나와 상황을 해결해주면 안 될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선물은 대체 어디에 쓰라는 거야.'
하아.
한숨을 쉰 이호연은 말을 쏟아내는 문수린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을 버리라는 말은 아닌데… 으음…. 나도 조금은 더… 지금 신경 써주지 않는다는 건 또 아니고…."
문수린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얼굴.
누가 보면 내가 가스라이팅이라도 한 줄 알겠네.
이호연은 양팔을 벌린 채 문수린을 바라봤다.
"수린 누나. 이리 와요."
"지, 지금은…."
"일단 안아주는 게 먼저. 그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으응…."
이호연은 문수린을 안은 채 등을 쓰다듬었다.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울먹이는 걸까.
이호연은 피식 웃으며 문수린의 얼굴을 뻔히 쳐다봤다.
안기자마자 댐이 무너지듯 흘러나오는 눈물.
몇 번이고 말하지만, 이호연은 여자가 우는 상황에 약하다.
겪어도 겪어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난 이상 감내해야 할 일인 걸까.
"미안해. 호연아…. 나도, 나도 다 알고 있었는데 혼자만…."
"… 아니에요. 제가 표현을 못 한 탓이겠죠. 사랑해요. 수린 누나."
"아, 아음. … 나도."
문수린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빨개진 것도 모른 채 이호연에게 안겼다.
이호연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슬쩍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장인어른 몸상태는 어때요? 제가 아영 씨한테 부탁하긴 했는데…"
"응… 성녀 님이 잘 봐주고 계셔."
이호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를 바라봤다.
문성민은 오히려 예전보다 혈색이 더 좋아져 있었다.
백아영에게 최대한 신경 써주라고 말했는데, 대체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 거야?
설마 인간으로 되돌리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 완전히 컨디션을 되찾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조용히 일을 묻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기도 해. 사람은 참 이기적이잖아. 네 여자관계를 시작부터 알았는데 떼를 쓰는 나처럼…. 아빠가 살인마인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문수린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고민이었다.
삶을 포기한 아버지의 목숨을 억지로 연장하고 있는 주제에,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무책임하게 죽는 게 나쁜 일이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선택이다.
그걸 자신이 막아도 되는 걸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사장님한테는 말씀드렸어요?"
"… 아니. 할아버지한테 말했다가 그대로 쓰러지실까 봐. 비밀로 하고 있어."
"계속 숨길 수는 없잖아요. 일단 의견을 물어보세요."
"그렇긴 하겠지…?"
쩝.
이호연은 쓸데없는 참견은 멈추기로 했다.
그저 문수린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문수린의 백금발이 이호연의 손을 간지럽혔다.
역시 서로 피부가 닿아야 마음이 전해진다.
몸이 가까워져야 마음도 가까워 지는 법.
"수린 누나."
"으응."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내가 있으니까요. 응? 힘들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게요."
"음, 으응. 그래도 내가…. 으읍."
문수린은 말을 멈췄다. 이호연이 이끄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이호연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짧은 키스.
감정을 교환하기엔 충분했다.
이호연은 입술을 떼고 문수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가 대하기 어려운 건 맞지만,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이호연은 애정을 담아 문수린의 몸을 쓰다듬었다.
물론 장인어른이 있는 곳에서 끝가지 갈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애정을 교환한 후. 문수린은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도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끝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걸로 감정을 정리했다.
"다음에는… 모두 이야기해줘. 아빠가 일어난 뒤에."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호연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들을 얘기하는 거겠지.
그래. 언젠가는 모두 얘기해야 한다.
그날을 미루고는 있지만, 점점 다가오는 게 피부에 와닿도록 느껴졌다.
내기의 신이 준 선물이 도움이 되기를 빌며.
이호연은 문수린의 손을 잡았다.
*
불길한 검은 기둥이 나타난 지도 몇 주가 지났다.
정보 길드인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아이리스 길드에 있던 엘리스도 마찬가지.
그녀는 정보가 없는 검은 기둥보다 자기 자신의 수련에 집중했다.
"… 소녀에게 나 Wild Gladiator와 친우를 맺을 권리를 주도록 하지. 지옥에서도 탐낼만한 인간이구나."
"됐어요."
엘리스는 다가오는 케이론을 무시하며 훈련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 미친 켄타우로스는 지겹지도 않은 지 친한 척을 해왔다.
특훈도 이제는 거의 끝.
엘리스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대련으로 모두 꺾었고, 밤의 황제인 길드장 아이작과 대등하게 몇 수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아이작의 진심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낮의 아이작과 대련이 가능한 것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오만해도 될 정도의 재능.
같은 나이대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만약 엘리스가 이호연을 보지 못했다면, 꽤 우쭐해졌을 거다.
훈련장에서 나온 엘리스에게 비서인 세바스 찬이 다가왔다.
"엘리스 님."
"응. 세바스 찬."
"한국으로 돌아갈 일정은 어떻게 잡아놓으면 되겠습니까?"
"아…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네. 여기서 더 할 것도 없고."
"예. 이제 학기가 시잘될테니까요. 아이작 님이 최대한 늦춰달라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그럼 내일 돌아갈까?"
"저는 엘리스 님의 의중에 따르겠습니다."
아이작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한 달간 아버지의 얼굴은 충분히 봤다.
이제 남자 친구와 친언니의 얼굴을 보러 가야지.
'… 한 달이나 못 했어.'
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성욕이 쌓일 때는 운동으로 풀라는 말이 있다.
신체 활동이나 사교활동으로 에너지를 풀어야 성욕을 억제할 수 있다는데….
엘리스는 한 달간 프랑스에서 지내며 그 말들이 전부 개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매일 엄청난 강도로 훈련을 했는데도, 밤에 자위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호연에게 개발당한 몸은 엘리스 혼자서 잠재우기가 힘들었다.
프랑스에서의 수면부족은 사실상 이호연 탓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응. 세바스 찬. 내일 바로 돌아가자. 언니한테 연락은… 하지 마."
안 해도 되겠지.
오랜만에 보는 언니와 이호연인데,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키득. 엘리스는 내일 볼 이호연과 아이린의 얼굴을 생각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