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화 〉 447화. 방학의 끝 (4)
* * *
푹신하다. 잠이 쏟아진다.
… 그 이후로 어떻게 된 거지?
내기의 신을 만난 뒤, 다음 일은 기억이 안 난다.
이호연은 침대의 부드러움과 가슴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몸을 맡겼다.
"호연아. 괜찮아?"
"… 다은이?"
"으응. 일어났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호연은 그제야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고 눈을 떴다.
익숙한 방.
작은 자취방이 아닌, 빙의하고 나서 산 이호연의 집이다.
그 옆에는 남다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하루 정도 지났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지키기로 했는데, 내 차례 때 일어났네. 혹시 아픈 데는 없어?"
남다은은 이게 뭐라고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자기 차례 때 내가 일어난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 근데 하루나 지났다고?'
저번 만남 때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꽤 시간이 지났다.
아직 정신이 멀쩡하진 않았지만, 해야할 일은 알 수 있었다.
이호연은 남다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태창을 열었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호감도 : 100 ] ( + 1.4 )
[ 성욕 : 75 ]
[ 식욕 : 30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혹시 어디가 아픈 건가? 레베카 씨한테 물어볼까.
[호감도 100 달성시 이호연에 대한 사랑이 매우 돈독해짐.]
이호연은 상태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상태창을 봐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어쩐지.
상태창에 모르는 정보가 쓰여있었다.
아마 호감도가 100이 되면 나오는 정보 같았다.
'매우 돈독해짐이라….'
겉으로 보기엔 좋지만 애매한 말이다.
돈독해진 사랑이 11명의 여자를 이해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호연아. 근데… 손에 그건 뭐야?"
"손?"
이호연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을 깨달았다.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검붉은 보석이 박힌 은반지.
내심 왼손 약지가 아니라는 걸 감사하며, 이호연은 반지의 능력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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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동화 반지]
▶ 전설 등급
▶ 정체불명의 불길함이 담긴 반지.
▶ 사용 시 지옥과 동화를 진행하는 검은 기둥을 소환합니다. 검은 기둥은 지옥의 기운을 내뿜으며 지구의 마력을 빨아들입니다. 기둥의 주변에 있는 인간은 제대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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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네."
"으응. 원래 거기 있었나? 아닌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다은을 보며, 이호연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반지가 있다면, 내기의 신이 준 선물도 있겠지.
"…."
하지만, 가슴에서 특별한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 타이밍이 아니라는 건가?
필요할 때가 되면 직접 나오겠지. 선물이라고 했으니 안 좋은 건 아닐 거다.
"으응? 애기 아빠가 일어났구나?"
"아, 레베카 씨. 벌써 교대 시간이었네요."
"응. 근데 애기 아빠가 일어나버렸으니 교대는 안 해도 되겠어."
그때, 방에 레베카가 들어왔다.
교대 어쩌고 말하는 걸 보면 교대할 시간이었나 보네.
레베카는 이호연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나저나 애기 아빠. 몸은 괜찮은 거지? 나랑 스칼렛 양이 봤을 때 위급한 상태가 아닌 거 같아서 일단 쉬게 내버려 뒀는데."
"네. 깨달음을 얻어서 잠시 정신을 잃었어요."
이호연은 레베카를 보며 대충 둘러댔다.
내기의 신을 만났다고 할 순 없으니, 이럴 때 제일 변명하기 쉬운 건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깨달음 같은 걸 얻었다고 하면 된다.
천재 마법사의 특권이다.
"역시 천재들은 다르네. 나는 마법을 연구하면서 한 번도 저런 초집중 상태에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
"초집중… 네. 뭐, 그 비슷한 거예요."
사실 이호연도 밖에서 본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아마 유체이탈 같은 상황 아니었을까.
"설마 자지를 건드려도 안 일어날 줄이야."
"네?"
"아, 실수로 말해버렸네…."
레베카는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니 하루 내내 잠들어있었다고 했고, 각자 순서를 돌아가면서 지켰다고 했지.
그 순서가 설마….
"앗… 생각해보니 김치찌개에 불을 올려놓고 왔어. 금방 갔다 올게~."
"당신 요리 안 하잖아요. 레베카 씨. 야!"
레베카는 자신이 닫은 방문을 다시 열더니 도망쳐버렸다.
잠시만.
레베카가 그랬다면 혹시?
흠칫하며 남다은의 얼굴을 바라보자, 남다은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그래. 다은이는 아니구나.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리와 다은아."
이호연은 남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에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안겨온 남다은은 이호연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레베카와 스칼렛이 괜찮다고 했지만, 내심 이호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남다은의 등을 쓸어내리던 이호연은 스마트 워치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하루나 누워있던 건 예상에 없었는데… 바로 나가봐야겠다."
"일어나자마자 나가려고?"
"병문안 갈 곳이 있거든."
이호연은 스마트워치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기지개를 켰다.
하루나 지났다면, 슬슬 문성민과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수린 누나 : 빅토리아 아카데미 vip병실 103호에 입원 중이야. 병문안은 여기로 오면 돼.
수 많은 메시지가 있었지만, 이호연은 애써 무시하며 병실만을 확인했다.
장인어른과 수린 누나를 뵈러 가야 한다.
*
몸을 감싸는 이상할 정도로 따스한 분위기.
'꿈이구나.'
문수린은 이것이 꿈이라는 걸 금방 인지했다.
요즘 들어 자주 꾸던 꿈이다.
악몽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오는 행복한 꿈.
힘든 업무를 마친 문수린에게 보상 같은 꿈이다.
항상 좋은 가르침을 주시던 가장인 아버지.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지어주시던 어머니.
엄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사랑을 보내주던 할아버지.
모두와 행복하게 사는 꿈.
자신은 그 한가운데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옆에는 사랑하는 남자인 이호연.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둘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평생 행복하게 살아간다.
매일같이 꾸는 꿈의 끝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 꿈은 악몽이 아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괴로웠다.
그립고 슬퍼서, 항상 아침마다 그녀의 볼에는 눈물 자국이 묻어있었다.
"… 아."
문수린은 멍하니 눈을 떴다.
꿈이 끝날 때는 아쉬움이 몰려온다.
얼굴에 묻은 습기를 닦아내고 나니, 이곳이 병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의 여운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병실의 침대에는 자신의 아버지, 문성민이 누워있었다.
마인을 아카데미의 병실에 입원시킨다는 게 웃긴 일이지만… 문수린과 백아영이라면 가능했다.
문성민은 백아영이 전담해 치료하고 있었다.
백아영에게 응급실의 일이 있긴 하지만, 방학이다 보니 잠깐씩 자리를 비우는 정도는 괜찮았다.
백아영은 틈틈이 시간을 내서 문성민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수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있던 건 백아영.
이 병실은 vip용이었고, 다른 간호사들의 출입을 금지했으니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건 백아영뿐이었다.
"아직 주무시는군요."
"… 네."
병실에 들어온 백아영은 익숙하게 문성민의 몸 곳곳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생명에 이상이 없는 건 확인되었지만, 그녀가 하는 작업은 안정화 작업.
마인으로서 몸이 망가져버린 문성민의 몸을 치료하는 작업이다.
마인의 몸을 안정화시키는 건 익어버린 스테이크를 생고기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래 가능하지 않은 일을 성녀의 권능으로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항상 작업이 끝나고 지친 백아영의 모습을 보면 문수린에게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몇 시간 뒤에 다시 상태를 살피러 올게요."
"감사합니다. 성녀 님. … 저희 아버지에 대한 걸 숨겨주시고,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시다니…."
"아니에요. 이호연 생도… 호연이의 부탁이니까요."
"네. 호연이한테도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문수린은 이호연의 이름에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과 이호연이 친한 사이인 건 문수린도 알고 있었다.
방학을 하기 전에는 매일같이 양호실에 들리던 사이였으니, 아마 깊은 관계일 수도 있겠지.
이호연의 사진을 모으던 문수린은 그의 주변에 여자들도 웬만큼은 파악하고 있었다.
'… 근데 그날 있던 여자들은 누구지?'
문수린은 식당에서 본 여자들을 떠올렸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여자도 있었다.
붉은 머리의 미녀와 금발의 미녀.
그리고 맹한 표정의 미녀.
남다은과 그녀의 동생인 남다희.
붉은 머리의 미녀와 금발의 미녀는 누군 지 모르겠지만, 맹한 표정의 미녀는 누군 지 알 수 있었다.
섹시 서큐버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방송을 하던 여생도.
그녀가 이호연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이호연의 기숙사에서 그녀의 속옷을 발견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증거를 봐버렸으니, 이제는 직접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문수린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백아영이 말을 이었다.
"치료는 끝났는데…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성녀 님."
무엇이든 대답하지 못하리.
문수린은 성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학생회장은, 호연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네. 네?"
"솔직한 학생회장의 마음이 궁금해서요. 어때요?"
문수린은 백아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바라봤지만, 백아영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백아영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문수린이 경쟁자인지 아닌지.
그리고 문수린에게 은혜를 입혀놓은 지금이 물어볼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호, 호연이는… 좋, 좋아해요."
"… 역시 그렇죠?"
"네…. 많이 좋아해요."
문수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문수린은 백아영과 다르게 남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처음이었다.
당연히 부끄러울 수밖에.
"으으…."
"성녀님…?"
문수린의 말을 들은 백아영도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아니길 바랬는데, 역시 맞았구나.
많아도 너무 많다.
백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쌍둥이랑 레베카 씨가 경쟁자라는 걸 솔이한테 말해야 하는데… 학생회장까지 있으면…."
"… 네? 누구요?"
"으, 으. 어쩌지…."
백아영은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당장 솔이에게 가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혼자 남은 문수린은 눈을 끔벅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 쌍둥이? 레베카? 솔이? 그게 다 누구야. 아니, 쌍둥이는 루시 루미 쌍둥이고… 솔이는 혹시 임솔 교수님인가?"
문수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백아영과 루시 루미 쌍둥이는 견제하고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더 있는 거지?
똑똑.
그때, 병실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백아영이라면 방금 나갔고, 그녀가 아니라면 이 병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수린 누나. 저 왔어요."
하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대를 알 수 있었다.
"… 들어와."
"죄송해요. 제가 수련 중에 잠이 들어서 메시지를 늦게 봤어요. 근데 여기가 vip병실이구나. 엄청 좋네요?"
내기의 신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병문안을 온 이호연은 문수린의 표정을 확인했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
왜 그러는 거지? 역시 너무 늦은건가?
애교라도 부려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수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호연에게 들렸다.
"… 호연아. 여기 앉아봐."
"…."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다소곳이 의자에 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