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 445화. 방학의 끝 (2)
* * *
지하에서 올라온 이호연은 거실로 돌아갔다.
거실에는 TV를 보고 있는 남다은과 릴리아나가 보였다.
예능을 보는 걸 보니 오늘은 릴리아나가 보고 싶은 걸 보는 날인가 보네.
뉴스를 좋아하는 남다은과 달리 릴리아나는 뉴스나 드라마보다 순수 재미를 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지옥에서 보던 거랑 느낌이 비슷하다나.
평소처럼 릴리아나를 괴롭히러 다가갔는데, 갑자기 TV가 지지직 거리더니 화면이 전환되었다.
뛰어다니던 개그맨들 대신 다급한 표정의 기자가 나타났다.
긴급 속보입니다. 중국 베이징을 거대한 싱크홀이 강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현장의 영상을 지금 틀어드리겠습니다.
"뭐야 이거! 야! 무모한 도전 다시 틀어! 속보 치워!"
삑. 삑.
릴리아나가 화를 내며 채널을 돌렸지만, 다른 채널도 모두 속보를 틀고 있었다.
이호연은 베이징 싱크홀이라는 익숙한 단어에 TV 앞으로 다가갔다.
"… 베이징 싱크홀? 릴리아나. 잠깐 가만히 있어봐."
"아니, 오늘 내가 보는 날이라고! 왜 이런 날에… 읍읍으븝."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뉴스 전문 채널로 채널을 돌렸다.
베이징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 싱크홀이 엄청난 피해자를 내고 도시의 중심을 가라앉혔다는 뉴스였다.
화면에는 이호연의 기억 속에 있는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있었다.
도시 한가운데가 가라앉는싱크홀.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다.
원작에서도 나오는 스토리니까.
다만 적어도 몇 년 후에 나타날 일이라, 그때까지 힘을 키운 후에 공론화시켜 피해자를 줄일 생각이었다.
… 이렇게 일찍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아무리 말해봤자 피해자를 줄이진 못했겠지.
이호연이 눈을 찌푸린 건 기자의 다음 말을 듣고 나서였다.
다, 다음 속보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 거대한 기둥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어두컴컴한 기둥은 일반인이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두통과 구토를 유발하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는 소식입니다. 현재 전 세계의 헌터들이 조사를….
"저건 뭐야?"
이호연은 화면을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바다한가운데에꽂혀있는기둥은 기자의 말대로어두운기운을내뿜고있었다.전세계곳곳에기둥이생겨났다는말이거짓말은아닌듯,카메라는기둥이꽂힌여러곳을비췄다.
베이징의싱크홀은알고있었고,슬프지만어쩔수없는일이라는걸인지했다.
하지만,기둥이라니?
저런기둥은이호연의기억에없는이벤트였다.
"애기아빠.저게뭔지알고있는거야?"
"…저도몰라서문제에요."
예능을바라는릴리아나의바람과다르게뉴스가끊임없이흘러나왔다.
화면에서는전문가들의토론이이어졌다.
제 생각에 이건새로운던전의종류입니다.최근에나타나던이상현상의연장선으로보고있으며….
아니요. 신의분노입니다. 무책임하고무질서한인간들의자연파괴에분노하신겁니다!
어쩌면 새로운 기회가 될 지도 모릅니다. 조사팀 중에서 엄청난 아티팩트를 찾아낸 팀이 있습니다.
"이상현상…."
이호연은눈을찌푸린채TV에시선을고정했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지구가지옥과동화되는과정에서던전에이상현상이일어나긴하지만,저런기둥은나타나지않는다.
"판데믹에서무언가한건가?아니면…."
이호연이불길한기둥을보며고민하던그때.
눈앞에빛나는문장들이생겨났다.
『스페셜퀘스트』
오른손을앞으로뻗으세요.
제한기간:30일
보상:내기의신과긴급면담기회.
"…?"
이호연은눈앞에나타난의미불명의문장들을보며눈을끔벅거렸다.
저기둥이대체뭘까고민하고있는데,요즘도통보이지않던퀘스트가나왔기때문이다.
'손을뻗으라고?'
내기의신과긴급면담은또뭐야.
무언가떨떠름하긴했지만,지금이타이밍에긴급면담이라면당연히저기둥에대한일이다.
어쩌면생각보다심각한상황일지도모른다.
빙의하고얼마안되어서,내기의신과대화를해본적이있었다.
히로인3명의처녀를가져갔다는이유로눈앞에나타났었지.
그때내기의신이원작의히로인이아닌여자들을공략할수있도록만들어줬다.
다음에는 모든 게 끝나고 보기로 했었는데 지금 다시 나타났다는 건, 그 때와 다르게 내기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 저기, 다은아. 내 몸 좀 지켜줘."
"으응? 무슨 소리야?"
"혹시 몰라서 그래."
이호연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스윽.
파아앙!
칠흑같은 어둠과 강한 바람이 온몸을 강타했고,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잠잠해진 바람에 서서 눈을 뜨자,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방금까지 서있던 이호연의 집은 없었다.
익숙한. 아니, 이제는 어색한 풍경이다.
빙의하기 전 세상.
이호연의 자취방이다.
먹다 남은 물병과 비타민 영양제가 널려있는 책상.
책장에 꽂혀있는 전공책과 만화책.
나름 꾸미려고 샀던 왁스와 헤어스프레이.
'이호연'이 아닌 '김진호'의 방.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진 저번 삶의 이름이다.
이호연은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를 바라봤다.
여유롭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 또 나타나셨네요?"
"그러게. 오랜만이네. 나도 이렇게 보기는 싫었는데."
금발의 남자, 내기의 신이 미소를 지었다.
*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헌터 교육기관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남녀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는 곳.
효율적인 싸움을 하는 법을 세상에서 제일 잘 가르치는 곳.
물론 모든 생도들이 전투 특화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생도들은 입학하자마자 마수와 마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운다.
한창때의 젊은 남녀가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배운 이론과는 다르다.
마법이든 검술이든, 결국 목표로 하는 건 전투를 이기는 것이다. 실제로 살아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생도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아카데미에는 상담 프로그램이 잘 구성되어 있다.
전문 상담가는 물론, 생도와 친분이 있는 교수나 조교도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왔다.
생도들과 직접 접촉하는 만큼 상담사보다 마음의 벽을 허물기가 쉽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모든 교수들은 생도들과 상담을 자주 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인기가 가장 많은 교수는 당연히 백아영이었다.
'성녀'라는 모든 고민을 해결해줄 거 같은 신성한 이명.
고민을 들어주는 자애한 미소와 따듯한 목소리.
물론 남생도들이 별일 없어도 찾아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여생도의 상담만 해주고 있지만… 그녀의 상담은 응급실에 들어온 지금도 인기가 많았다.
"응응. 그랬군요. 채윤 생도도 힘들었겠네요."
"… 네. 하,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럴 의도가…."
"힘들면 울어도 괜찮아요. 자. 제가 채윤 생도의 길을 응원할게요."
"성녀 님…!"
백아영은 눈물을 흘리며 안겨오는 여생도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마인을 처음 죽인 생도들은 보통 이런 감정을 겪곤 한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들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백아영은 그럴 때마다 익숙하게 생도들을 위로해줬다.
응급실에 배정된 이후로 사실상 교수라는 타이틀은 내려놓았다.
이런 상담도 그만해도 괜찮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용기를 받는 생도들이 있었으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눈물을 그친 여생도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마음이 심란해지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백아영은 생도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저런 모습을 보면 과거의 자신이 생각난다.
처음 치유 능력을 각성하고 성녀라고 불리기까지. 백아영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생을 하며 올라왔다.
그동안 겪은 경험은 지금의 백아영을 만드는 양분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좌절과 아쉬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백아영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어린 학생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백아영의 천성 자체가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하다 보니, 상담이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감정이 생겼다.
똑똑똑.
"성녀 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백아영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신이 여유로워야 생도도 마음을 여는 법.
백아영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명의 여생도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성녀 님."
"아, 안녕하세요. 성녀 님…."
"네. 후후. 둘이 같이 오는 건 처음이네요. 편히 앉아요."
백아영은 익숙하게 과자를 내오며 루시와 루미의 앞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루시와 루미.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쌍둥이다.
헌터로서의 능력도 좋지만, 둘이 유명한 이유는 당연히 외모다.
작은 체형에서 나오는 귀여운 분위기. 그리고 상반되게 어른스러운 몸매.
비슷하게 생긴 두 명이 걸어 다니는 것만 봐도 힐링이 된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호연과 같은 클래스고, 이호연과 친한 사이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만큼 깊은 사이는 아닐거라고 생각했기에, 백아영은 웃으며 루시와 루미를 맞이할 수 있었다.
"으, 으으음…."
"루시. 루시가 말하기로 했잖아…."
"그, 그럴 거야. 잠시만…."
백아영은 루시와 루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담을 하러 와서 말을 고민하는 건 익숙했다. 자신들의 고민을 남에게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다.
"루시 양. 괜찮아요. 다른 곳에 말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성녀 님… 네. 그럼…."
루시는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아영에게 찾아오기 전.
루미와 이야기는 끝내 놨다.
먼저 섹스 테스트기에 대한 걸 묻고 그다음에 이호연의 연애 상담을 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는 게 부담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 님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백아영은 순간 두통이 오는 걸 느꼈다.
... 설마 이런 상담일 줄이야.
꽤 많은 생도를 상담한 백아영이지만, 이런 상담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섹, 크흠. 성관계 테스트기가 틀린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는 거군요?"
"네에… 맞아요. 절대 11번이 아닌데… 11번이라고 나와서요."
백아영은 스마트 워치로 측정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그 측정기는 백아영도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기기였다.
혹시나 해서 찾아본 논문에서도 마찬가지.
기기의 성공률은 99.9%.
백아영은 루시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골랐다.
"루시 양이 무언가 헷갈린 거 아닐까요? 그 측정기는… 크흠. 사정 횟수가 아니라 같이 관계를 가진 횟수를 세는 거예요. 즉 한 번 할 때 많이 해도…."
"아, 네. 그건 알고 있어요. 만약 그랬다면 훨씬 많이 나왔을 거예요."
"훠, 훨씬…."
"네. 그래서 혹시 제 건강이나 다른 게 문제는 아닐까 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루시를 보며 백아영은 고민을 이어갔다.
저 기기가 틀릴 가능성은 없다.
건강? 성관계 횟수를 조사하는 데에 건강은 상관이 없었다.
아마 그녀가 모르는 성관계가 있었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 사실을 전하는 건 상담자로서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거짓말을 해야 할까.
이 소녀의 걱정을 늘려줘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백아영은 최대한 돌려서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런 걸지도 모르죠. 루시 양이 자는 동안 남자 친구가 몰래 했다거나…?"
"아… 그럴 수도 있을까요?"
"네. 그럴 거예요."
백아영도 잘 때 몰래 한 것까지 측정되는지는 모른다.
아마 될 거 같긴 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래도 눈앞의 소녀가 고민하는 것보단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루시는 백아영의 말을 듣자마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백아영은 자신의 대처에 만족하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루미. 역시 성녀 님에게 오길 잘했어."
"으응. 루시 아이디어였잖아. 그런데 정말 잘 때 그랬을까? 아무리 호연 씨라도…."
"이호연 걔가 얼마나 짐승인데. 분명 내가 잘 때 건드린 거야."
"그런가? 호연 씨가 변태긴하지만…."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을 생각하며 몇 마디 잡담을 이어갔다.
역시 상담을 오길 잘했다.성녀님은 언제나 고민을 해결해주신다.
루시가 진짜 고민인 연애 상담을 위해 앞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푸흡…!"
"꺄악!"
둘의 대화를 듣던 백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