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444화 (444/648)

〈 444화 〉 444화. 방학의 끝

* * *

세상에 게이트가 생기고, 인간에게 마력이 생기며 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가장 변한 건 마력을 쓰는 마물 사냥과 전쟁의 역사겠지만,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많이 줄었고, 상상하는 대부분의 일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마법은 법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그런 일상 마법보다는 전투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고, 이호연도 그런 마법에는 취미가 없으니 굳이 익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막 성인이 된 다른 생도들은 공부나 어려운 마법보다는 신기한 마법에 좀 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아카데미 내부의 카페.

방학에도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빅토리아 아카데미 생도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다.

동생인 루미와 다르게 열심히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루시는, 오늘도 카페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다들 모이기 전인데, 눈앞의 김서윤은 단 둘인데도 재잘재잘 떠들었다.

"놀라지 마. 무려… 지금까지 경험한 성관계 횟수를 알려주는 기계래!"

"… 그런 게 가능해? 아니, 애초에 비싼 돈 주고 그런 걸 왜 사는 거야? 서윤이 너 용돈도 얼마 없어서 아르바이트 시작했다면서."

"재밌어 보이는 걸 어떡해. 루시. 이거 너한테 써보자. 아, 그 사람의 유전자가 필요한데. 혹시 피 한 방울만 뽑을 수 있을까?"

"내가 그런 기계 때문에 피를 뽑아줄 거 같아?"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이거 신기하다! 싶으면 무조건 사버리는 사람.

루시의 친구인 김서윤도 그런 부류였다.

마음에 꽂히면 일단 사고 보는 부류.

그녀는 언제나 쓸데없는 장난감을 사 오곤 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경험한 횟수를 알려주는 기계라니.

'대체 그런 걸 왜 사는거지?'

루시는 고개를 저으며 음료를 입에 가져갔다.

이럴 거면 루미랑 집에서 쉴걸.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나왔더니 이런 쓸데없는….

톡­

그때, 루시의 머리에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재빨리 고개를 들어보자, 루시의 머리카락을 하나 들고 있는 김서윤이 미소를 지은 채 측정기에 루시의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야!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에이, 뭐 어때! 어차피 0번…."

띠디딕─. 띡띡띡─….

루시는 측정기를 억지로 부숴버리기 위해 마력을 일으켰지만, 장난감같이 생긴 주제에 쓸데없이 좋은 성능을 가진 측정기는 곧바로 화면에 숫자를 띄웠다.

[11]

"… 11번? 헉. 루, 루시. 너 언제 우리보다 먼저 어른이 된 거야. 11번이라니. 11번… 으읍."

"하아. 알아서 뭐 하시게요. 11번이고 10번이고… 응? 내가 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지."

"미안. 미안해. 진짜 미안…. 나는 당연히 없을 줄 알았어. 미안해…."

루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김서윤을 노려봤다.

어릴 때부터 루시와 친하던 김서윤이다.

서로 숨기는 거 하나 없이 지냈지만, 이호연에 대한 건 숨겼다.

그러다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 거겠지. 아마 상황이 반대였어도 0번이라고 생각했을거다.

… 물론 루시는 머리를 억지로 뜯어서 넣진 않았게지만.

"쩝. 됐어. 그럴 수 있지. 어디가서 말하지는 마."

"응. 으응. 당연하지. 이 기계도 갖다 버릴게. 아니,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중고 마켓에…."

루시는 김서윤의 반응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디가서 이런 걸 퍼트릴 성격은 아니다.

장난스러워도 진지할 때는 진지한 친구니까.

루시는 잠시 후 도착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김서윤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하나 더 왔지만,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루시는 잘못 하나 했다고 친구를 내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김서윤과 친분을 생각하면 딱 그 정도 감상이었다.

심한 장난이었지만 용서할 수 있을 정도.

"11번… 벌써 그렇게 됐구나."

루시의 입꼬리가 괜히 올라갔다.

처음은 루미인 척하고 했었고, 두 번째는 루미와 같이. 세 번째는 축제 때 혼자. 네 번째는….

이호연과 보낸 시간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특히 방학이 시작하고나서는 루미와 같이 데이트를 하거나 놀러 다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그녀의 기억에 하나하나가 확실히 남아있었다.

루시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과 놀았던 기억을 되짚었다.

놀았다는 건 즉 관계를 가졌다는 것.

별생각 없이 기억을 되새기던 루시는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어?"

하나. 둘. 셋….

루시는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다시 셌다.

여덟. 아홉. 열.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10번이었다.

10번.

10번이잖아.

"왜 11번이라고 나온 거지?"

가능성은 두 가지.

기계가 잘못되었거나. 루시의 기억이 잘못되었거나.

루시는 인터넷에 김서윤이 가져왔던 측정기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 오류 절대 없음. 법정에서도 사용할 정도의 신뢰도입니다.

­ 하지만 상대의 동의 없이 사용한다면 법에 저촉될 여지가 있습니다.

"…."

이딴 쓰레기 같은 기계를 누가 만들었나 궁금하긴 하지만, 신뢰는 해도 될 것 같았다.

루시는 다시 기억을 되짚었다.

기계의 오류가 아니라면 자신의 기억이 틀렸다는 건데….

"루미한테 물어볼까?"

루시는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루미에게 다가갔다.

방학 동안 이호연과 만나는 시간엔 루미가 항상 같이 있었다.

자신이 혼자 있을 때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만, 루미랑 같이 한 데이트는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헷갈렸을지도 모른다.

"루미."

"으으응. 루시. 왜?"

"우리 지금까지 이호연하고 몇 번이나 섹스했지?"

"콜록. 콜록!"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있던 루미는 그대로 허리를 들어 올리며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루, 루시.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야… 서윤이가 이상한 측정기를 가져왔는데…."

루시는 오늘 겪었던 일을 루미에게 모두 털어놨다.

남에게 말하기 좋은 주제는 아니지만, 상대는 쌍둥이인 루미.

루시와 루미는 일심동체나 마찬가지다.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다.

루시의 말을 들은 루미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루시와 기억을 공유했다.

하지만 결과는 루시와 동일.

루미가 가진 기억도 루시와 똑같았다.

"으으음. 내 기억도 루시랑 똑같은 거 같은데."

"그렇지? 내가 헷갈린 게 아니지?"

"으응… 혹시 기계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아니면 루시의 몸이 기계랑 안 맞는다거나."

"내 건강…? 그럴지도 몰라. 최근에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었어."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다.

괜히 마음이 쓰일 바에는 건강이 나쁜 게 낫다.

루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는 루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는 호연 씨의 일만 되면 엄청 진지해져."

"… 당연히 진지해져야지. 안 그래도 경쟁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상한 기계가 나를 신경쓰이게 하잖아.나는 매일 밤을 고민하면서 잠든다구."

"그 정도로 고민이었구나…?"

"당연히 고민해야지. 루미는 안 억울해? 경쟁자가 많아도 너무 많아."

"으으으,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 솔직히 연애는 너무 어려워. 이런 건 루시가 나보다 잘 알아."

"나도 연애는 잘 모르는데…."

친구를 만나는 것과 연애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루시도 이번이 첫 경험인 만큼,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남자 친구에게 경쟁자가 그렇게 많다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텐데.

쌍둥이라 기쁨이 두 배라지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루시는 루미에게 말을 꺼냈다.

"루미. 교수님에게 상담을 해볼까?"

"상담…? 으으, 맞아. 루시 말대로, 이건 어른의 지혜가 필요할지도 몰라."

"좋아. 상담은 역시… 그분이지? 그런데 연애 상담도 하시나?"

"으응. 저번 훈련 때 다쳐서 찾아갔더니 연애 상담도 해주신다고 하셨어."

"다행이야. 루미! 그럼 바로 찾아갈까? 내 건강에 이상이 있는 지도 물어봐야겠다."

쌍둥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준비를 했다.

김서윤이 가져온 이상한 장난감에서 시작된 고민은 어째선가연애 상담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둘은 옷을 챙겨 입고 기숙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

이호연의 집. 지하 창고.

이호연의 집은 살 때부터 지하에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아마 창고가 아닐까 싶은데, 제대로 써본 적은 없다.

이호연의 집에 사는 여자들도 그렇고 이호연도 그렇고 딱히 창고에 넣을 정도로 커다란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기 아빠. 그러고 보니 지금 큰일 난 거 아니야? 애기 아빠 여자친구들이 화가 잔뜩 났잖아."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걸로 해결할 수는 있고?"

"노력해야죠. 뭐. 안되면 죽을거니까 레베카 씨가 많이 도와주세요."

"죽는 건 곤란해. 아직 아이가 없잖아."

지이이잉­

방에는 레베카와 이호연이 만든 마법진이 놓여있었다.

레베카의 방에서 연구하고 구상하던 마법진이다.

실제로 펼치기에는 레베카의 방이 좁았기에, 창고를 마법연구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지직­ 드득. 화악!

이호연은 마법진을 구성하는 곳곳에 지옥의 마력을 때려 박았다.

꽤 많이 집중해야 했기에, 레베카도 숨을 죽인 채 이호연의 마법을 바라봤다.

워낙 크고 복잡한 마법진이었으니, 사소한 부분 하나라도 망가지면 굉장히 귀찮은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호연의 마법이 끝났다.

따악.

이호연이 손가락을 튕기자, 발 끝에서 시작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안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과 글자들은 너무나 불규칙하고 무질서했다.

누가 봐도 마법진이 아니라 마력누더기라고 평가할 이 작품은, 놀랍게도 잘 작동했다.

"이게 돌아가는 게 신기하지 않아?"

"그러게요. 열심히 만들긴 했어요."

이호연은 머리에 묻은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마법진을 확인했다.

마법사들의 조사를 피하기위해서, 개같이 고생한 결과다.

식당에서 도망친 직후.

문수린과 백아영의 메시지에 변명을 반복하던 이호연은 이럴 시간에 빨리 마법진을 완성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만나서 섹스라도 하기 전까지는 뭐라고 말해도 변명하기가 힘들다.

여자 5명과 밥 먹는 걸 걸렸으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그나마 문수린은 문성민과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정리했고, 그를 생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으니용서해줄 거 같았는데.

백아영이 문제였다.

메시지만 봐도 울고 있는 게 보일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사실 이호연도 억울하긴 했다.

5명과 광란의 섹스파티를 한 것도 아니고, 겨우 식사를 했는데 이 정도로 당해야 하나?

내가 왜?

…… 다시 생각해보면 당할만한 거 같기도 하고.

"쩝. 뭐라고 왔는지나 한 번 볼까."

몇 시간 내내 마법진에 집중하느라 백아영에게 답장을 못했다.

이호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 여보 : 여보. 제가 오해해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여보랑 식사했던 사람들도 소개해주세요.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 갑자기?"

이호연은 의외의 답장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감정이 바로 정리된 거지?

"애기 아빠. 안 나갈 거야? 오늘은 끝내자면서."

"아, 네. 지금 나가요."

그때, 계단을 오르던 레베카가 말을 걸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정 궁금하면 나중에 백아영을 만나서 슬쩍 떠보면 된다.

이호연은 스마트워치를 덮고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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