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3화 〉 443화 빅토리아 빌딩 (6)
* * *
응급조치는 성공이었다.
아쉽게도 이호연의 발차기는 큰 효과가 없었다.
감정을 너무 실은 걸까. 아니면 독약과 하임리히법의 조합이 안 좋았을지도.
발차기보다는 처음부터 마력을 움직여서 독을 빼는 게 나았을 거다.
문성민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독성을 빼내긴 했지만, 아직 위험한 상태다.
기절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 내 발차기 때문은 아니겠지.'
이호연의 응급처치가 끝나자마자 문수린이 다가왔다.
"아, 아빠는 괜찮은 거야? 갑자기 피가... 그리고 발차기는 왜...?"
"... 독약이에요. 자살용 독약."
"독약...?"
"네. 일단 독약을 뱉게 해서 자살은 막았으니까 나머지는 수린 누나한테 맡길게요. 대화를 하든 대가를 치르게 하든요."
이호연의 마법 실력으로 문성민의 독은 대부분 빼냈다. 이미 몸에 흡수한 독약만으로도 꽤 위험하긴 하겠지만... 백아영이 올 때까지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거다.
그 이후 문성민의 처리는 문수린에게 전담할 생각이다.
문수린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카데미의 힘을 이용해 문성민의 범죄를 아예 없는 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지.
물론 수린 누나가 그러진 않을거다.
"고마워. 호연아. 정말... 고마워."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이호연은 울먹거리는 문수린을 보며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자신보단 남다은의 공이 크다.
저 짜증나는탈출능력을 막아주니까 이렇게 잡을 수 있던 거다.
문수린은 붉어진 눈으로 옅게 미소를 지었다.
"... 근데,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야?"
"네?"
"내가 알기로 여기는 예약도 힘든 고급 레스토랑이거든. 나중에 호연이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식사하고 있던 거지? 다 같이."
문수린의 목소리가 살짝 내려앉았다.
이호연은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릴리아나와 스칼렛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고, 남다은과 레베카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는 아이린과 강효린 박사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강효린은 그 와중에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는데, 왠지 그 웃음이 짜증 났다.
"… 식사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식사."
"이렇게 많은 여성분들과?"
"그, 어쩌다 보니까…. 친목 도모도 할 겸."
이호연은 문수린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나를 추궁하는 분위기가 된 거지?'
나 엄청 잘하지 않았나?
장인어른을 제압했고, 혼자 죽어서 마음 편해지려는 이기적인 자살도 막았다.
나름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왜 내가 추궁받는 거야?
"누나. 그런 게 아니라요. 그냥 단순히 식사를...."
"그런 거? 그런 게 뭐야."
"...."
"콜록. 콜록. 크흡."
이 상황을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 있던 문성민이 정신을 차린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건 기회다. 장인 어른이 독약을 빼준 내게 보답하는 것이다.
이호연은 곧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성민을 가르컸다.
"음… 수린 누나. 일단은 그, 장인어른한테 가보는 게…."
"... 으,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 학생회장실로 찾아와야 해."
문수린은 잠시 이호연을 바라보다가, 결국 문성민에게 다가갔다.
이호연과는 나중에 얘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빠, 아빠… 이제 나 좀 봐요."
"… 수린아. 나는 자격이 없다. 너를 볼 자격이 없어."
"죽긴 누구 마음대로 죽어. 아빠는 평생 나랑 할아버지한테 속죄해야 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문수린은 문성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저거 아까 남다은한테 잘렸던 곳 아닌가? 마인의 생명력으로 다시 붙긴 했지만 아직 아플 텐데.
'그래도 딸하고는 대화를 해주는구나.'
이호연은 한숨을 돌리며 문성민과 거리를 두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섰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줘야지.
내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이호연은 뒤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문수린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는데, 강효린을 제외하면 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이었다.
백아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곧 백아영도 오겠지.
... 이거 좀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아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자.
문수린을 도와서 여기 온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아이린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지.
"...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다들 여기에 있어요. 수린 누나의 조사를 아이린 씨랑 강효린 박사님이 도와주는 거예요?"
"그게... 응. 그렇긴 한데. 저기, 스칼렛은 왜 너랑 같이...."
"아, 아악. 내가, 내가 직접 갈게."
"그건 이쪽이 설명할 겁니다."
"...?"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스칼렛이 강효린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다가왔기 때문이다.
*
스칼렛에게 잡혀 온 강효린의 설명을 들은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니까... 강효린 박사님이 주신 티켓이 사실 보험 목적으로 저희를 유도한 거 였어요?"
"... 주목적은 너희 둘의 데이트를 지원하는 거였어. 보험이 아니라 약간 플랜 b 같은 거지. 나도 설마 어린 애까지 데려올 거라고는...."
"잘못하면 다 죽을 뻔했네요?"
"죽기까지는... 너도 있고 스칼렛도 있고. 남다은 생도도 강하던데."
이호연은 눈을 피하는 강효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양심 없는 사람이 있다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당신 교수 맞아요? 스칼렛. 당장 이딴 직장 때려치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내일 사표를 제출할 겁니다."
"안돼 스칼렛.... 내가 월급 올려줄게...."
저 미친 교수.
임솔도 교수로서 불합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호연은 스칼렛에게 사과하는 강효린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으음... 애기 아빠. 몸은 괜찮아?"
"보다시피 괜찮네요."
"그런 거 같긴 하네. 다행이야."
"레베카 씨는 괜찮고... 스칼렛도 괜찮아 보이고. 다은아. 지원 고마웠어."
"아니야. 호연이가 잘했어."
이호연은 남다은의 미소를 보며 든든한 감정을 느꼈다.
강한 여자들이 뒤에 있으니 싸움도 편해지는구나.
"나는 아직도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 그건 나중에 레베카 씨나 다은이가 설명해줄 거야. 그래도 다희는 잘 지켰네."
이호연은 릴리아나를 칭찬하며 식당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이미 민간인들은 대피한 지 오래고, 헌터 협회에서 급히 지원을 나왔다.
식당의 입구에는 아이린이 대표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도 한국 지부에서 지내며 나름 입지를 만들어놓은 상태.
"네네. 아니요. 저희 아이리스 길드 측에서... 네. 자세한 건 아카데미와 협의를...."
물론 문수린이 나서는 게 맞겠지만 문수린은 지금 문성민과 대화 중이었다.
아이린도 그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협회 인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한 명의 여성이 파고들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데... 아, 엽... 호연아. 아니 호연 생도...."
"네. 아영 씨. 여기에요."
"으, 응. 호연아."
백아영은 이호연의 호칭을 듣고 나서야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호연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던 백아영은 수많은 여자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지만, 쓰러져있는 문성민을 보며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짓고 문수린에게 다가갔다.
"성녀님...!"
"학생회장. 환자의 상태를 설명해주세요."
"독약, 독약을 먹었어요. 응급조치는 했는데, 상태가 안 좋아요. 성녀님. 제발...."
"괜찮아요. 제가 왔으니까. ...응? 독약보다는 어깨의 열상과 배에 있는 타박상이 상태를 심각하게...."
의학적인 용어는 들어도 잘 모르겠네.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여자들을 바라봤다.
"... 우린 도망칠까요?"
"도망쳐? 왱?"
"저도 그게 좋아 보입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 거에요."
"그래. 애기 아빠. 나도 귀찮은 건 싫어."
"다희는 내가 챙길게."
여기서 모든 일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굉장히 일이 복잡해질거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나중에 변명하자.
아이린이 협회의 인원들을 상대하고 백아영이 문성민을 치료하는 동안.
이호연은 몰래 반파된 식당을 빠져나왔다.
*
임솔의 연구실.
임솔은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 작성을 이어갔다.
그녀는 요즈음 기분이 좋았다.
마법 연구의 진도가 잘나간 것도 아니고, 마법사 협회 놈들의 콧대를 눌러준 것도 아니다.
물론 마법사 협회에서 핵심 술식의 해석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매일같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것이 임솔의 기분을 좋게 만들진 않았다.
임솔이 기분 좋은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제자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저번보다 자주 놀러 오는 것도 그렇고, 올 때마다 마법의 수준이 높아진다. 집에서 특훈이라도 하는 모양.
스승으로서 당연히 기뻐해야 마땅하다.
"일 년? 아니 일 년은 너무 이른가. 이 년...?"
후후.
임솔은 마법 실험에 대성공한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으며 이호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적어도 몇 년이면 자신과 실력을 겨루겠지.
기대하는 만큼 결과로 보여주니 예뻐할 수밖에. 얼굴이 잘생긴 건 덤이다.
똑똑똑.
"응. 들어와."
임솔은 마법으로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누군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임솔의 연구실에 연락 없이 찾아오는 사람은 단 두 명.
이호연과 백아영이다.
그 중에서 이호연은 항상 로비에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린다. 지금 시간에 연락도 없이 문을 두드릴만한 사람은 백아영 뿐이다.
"아영아... 응? 뭐야. 너 왜 그래."
"흑. 끄흐으.... 흐어엉... 솔아. 솔아...."
들어온 사람은 예상대로 백아영이다.
평소처럼 찾아와 잡담이나 나눌 줄 알았는데,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임솔에게 안겼다.
훌쩍. 훌쩍.
크흐응.
"왜 그래. 아영아. 응?"
"나, 나... 흐윽. 흐...."
"울지말고 앉아. 커피 한 잔 줄 테니까 진정하고 말해."
"흐으. 으응... 쓴 더치커피로 줘. 마음이, 마음이... 흐흑."
"... 그래."
임솔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움직였고, 하늘을 나는 주전자가 커피를 내왔다.
너무 써서 사놓고 한 번도 먹지 않은 커피. 임솔은 백아영에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홀짝. 크흑. 케흑. 아우. 콜록. 너무 써어."
"그래서 무슨 일인데. 호연이 일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혹시 너도 한패야?!"
"... 무슨 소리야? 아영이 네가 울고불고할 정도면 호연이 말고 뭐겠어. 다 들어줄 테니까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봐."
"그, 그게...."
백아영은 울먹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호연에게 지원 전화를 받아 빅토리아 빌딩으로 출동했는데, 막상 가보니 자신을 제외하고 여자 다섯 명과 식사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놀람을 참고 기껏 환자를 치료하고 이호연을 찾았더니 이미 사라져서 너무 슬펐다는 이야기.
임솔은 그제서야 백아영의 상태를 살폈다. 몸 곳곳에 먼지가 묻어있었고, 소매는 붉은 피에 오염되어있었다. 현장에서 바로 여기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래서... 왜 내 연구실에서 우는 거야?"
"내, 내가 1등인 줄 알았는데. 흑. 흐으윽...."
"... 네가 한 이야기랑 1등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 그거야... 그런 좋은 레스토랑에서 다 같이 식사를.... 나 빼고 다른 여자랑...."
"너는 이호연하고 단둘이 식사한 적 없어?"
"당연히 있지...."
"5명이 같이 먹는 거보단 1명과 단둘이 먹는 게 더 좋은 거잖아. 네가 5명만큼 인정받은 거니까."
"... 그런가? 정말 그런 거야?"
"역으로 생각하면 네가 사랑을 더 받는거고, 그 5명이 불쌍한거지."
임솔은 백아영을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식사를 5명이 하든 1명이 하든 뭐가 다른 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백아영의 울음이 멈추지않을거다.
임솔의 위로를 들은 백아영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홀짝.
"으으. 솔아. 역시 마법사들은 똑똑해. 호연이도 똑똑하잖아. 그치?"
"응. 뭐. 그런가 봐."
임솔은 백아영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며 달콤한 라떼를 삼켰다.
'... 여자가 그렇게 많았나?'
사실 이호연의 여자관계는 임솔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많은 건 알았지만 백아영에게 들은 여자 중에는 임솔이 모르는 여자도 있었다.
...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내심 마음에 걸렸다.
실전 교수 대련 계획안
임솔은 백아영이 오기 전까지 작성하던 서류를 재확인하며 불편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