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 442화. 빅토리아 빌딩 (5)
* * *
식당에 있던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강효린이 준비한 자리는 vip석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꽤 떨어진 곳이었다.
운이 없게도 vip석 바로 위인 노아홀에 있던 문성민이 바닥을 부순 것이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혼란은 당연히 있었다.
사람들이 소리치며 도망치고 금방 지원군이 도착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다.
노아홀에서의 혼란은 아이리스 길드의 힘으로 잠재울 수 있었지만, 건물이 부서지고 식당에 마인이 떨어지는 상황은 막을 수 없었다.
아악. …아아악.
그 다급한 상황에서 스칼렛은 여전히 강효린의 머리를 잡아당겼고, 문수린은 남다은을 떠보는 걸 포기하고 문성민과 싸우는 이호연의 싸움에 끼어들려고 하고 있었다.
남다희를 보호하던 릴리아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레베카를 바라봤다.
천장에서 마인이 튀어나와서 이호연과 싸우는 것도 답답한데, 스카웃은 이상한 여자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레베카. 우리 어떡해? 이호연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스카웃이 이상해졌어."
"… 내가 말해볼게. 스, 스칼렛 양? 잠시만. 진정해. 그 손도 놓고."
"응? 아, 레베카 씨군요.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 아니지. 일반인들은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애기 아빠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 사람은 이제 좀 놔줘."
레베카는 이호연의 말대로 먼저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인했다.
이호연은 릴리아나와 다희를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릴리아나는 의외로 의젓하게 행동했다.
레베카의 말을 들은 스칼렛은 그제야 강효린의 머리를 놓았다.
"맞는 말이네요. 저 사람이 질 거 같진 않지만, 듣기로는 저 마인에게 엄청난 도주 능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만 신경 쓰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막을 수 있어…."
"응? 아, 강효린. 당신의 마력을 흐트러트리는 힘으로 도주를 막을 수 있는 모양이네요. 어쩐지 오랜만에 현장에 있다 싶더니."
"으응…."
강효린은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스칼렛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방금까지 내 머리를 잡아당겨놓고.
무서운 여자.
사실 스칼렛이 강효린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강효린에게 짜증이 난 게 가장 컸지만, 이호연이 싸움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천궁의 짙은 마력이 주변을 압박했다.
전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다.
문성민은 이호연의 방어를 뚫지 못했지만 이호연은 문성민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처음부터 혼자 상대한다는 마인드로 일반인들의 안전을 맡긴 채 덤벼들었으니 당연히 그래야겠지.
아이린과 레베카도 마찬가지였다.
이호연의 압도적인 화력에 압도당한 채 싸움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특히 아이린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호연이 강한 상대인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혼자서 문성민을 압도할 정도라니.
스칼렛과 이호연이 같이 식사하러 오는 사이라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녀는 눈앞의 문성민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언제든지 끼어들 수 있도록 대기하기 위해서.
그때, 문성민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싸움을 지켜보던 아이린은 곧바로 강효린을 불렀다.
"…! 강효린. 지금 도망치려는 거 같은데?"
"네. 지금 막겠습니다. 모두 주의하세요. 제 주변에서는 마력을 쓰기가 힘들어질 거예요."
머리가 산발이 된 강효린은 곧바로 능력을 준비했다.
마력을 흐트러트리게 하는 그녀의 능력은 주위 모든 공간에 영향을 끼치기에, 아군에게도 미리 경고를 해야 했다.
"잠시만요. 강효린 박사 님."
탁.
하지만 집중하던 그녀의 가슴을 누군가가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강효린도 알고 있었다.
남다은.
그녀가 수업에서 직접 가르치는 생도였다.
가벼운 변장에 들키지 않기 위해 말도 안 걸었는데 스칼렛이 이름을 부르면서 들킨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왜 남다은이 자신의 능력을 막은 거지?
강효린은 짜증을 내기 위해 남다은의 얼굴을 쳐다봤다.
남다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문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마력을 막는 건 위험해요. 지금 저 마인은, 호연이의 틈을 노리고 있어요."
"뭐?"
"지금 마력을 막는다면 호연이가 당할 거예요."
남다은의 말을 들은 강효린은 문성민의 몸을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도주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뒤에 있는 왼쪽 주먹에 은밀히 마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 설마. 일부러 내 능력을 의도한 건가?"
강효린은 문성민의 의도를 읽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능력은 강하지만 약점도 확실하다.
강효린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아군까지 효과를 받는다.
현재 강효린과의 거리는 이호연이 문성민보다 조금 더 가깝다.
즉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호연이 먼저 효과를 받는다는 것.
문성민은 그 틈을 노린 것이다.
허를 찌르는 대단한 계책.
도주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적의 능력을 이용해 반격을 노리는 늙은 사자의 노련한 전투법이었다.
'… 이 아이, 나보다 마력을 빨리 눈치챘어.'
자신뿐만이 아니다.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인 아이린보다도 빨리 눈치챘다.
1학년 생도치고 말도 안되는 실력.
혹시 아카데미에서는 약한 척을 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마, 마력을 막는 게 안된다면 제가. 제가 막을게요. 제가 끼어들어서 호연이랑 같이 제압하면…."
"… 좋아요. 대신 같이 가죠. 강효린. 당신도 오세요."
"스읍. 조금 위험하긴 할 텐데요. 알겠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이호연이 없었다.
아이린과 강효린 둘 다 근접전이 가능했으니 강효린의 능력을 쓰는 동안 문성민을 커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호연과 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계획이 바뀌어버렸다.
"… 레베카. 나 설명 좀 해주면 안 돼?"
"큰일이 난 것 같아. 마인이 도망치나봐. 근데 다행히 애기 아빠는 살 거 같네."
"아하.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야?"
"그런 거지. 응? 다은 양?"
그때, 남다은이 앞으로 나섰다.
남다은의 실력이 폭발한 이유 중에는 이호연과의 대련도 있었다.
남다은과 대련은 이호연에게도 훈련이었다.
여러 마법을 써보며 숙련도를 올리고, 마법 간의 연계나 효과를 테스트했다.
그렇게 다양한 마법을 보고 겪은 남다은은, 자연스럽게 마력을 읽는 눈이 좋아졌다.
"다은 양! 저희가 갈 테니까 다은 양은…."
문수린이 앞으로 나서는 남다은을 막았지만, 남다은의 눈은 문성민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놀렸다.
이호연이 사준 검.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이 보물을 드디어 쓸 타이밍이 왔다.
지이잉
남다은의 주변 마력이 강하게 짓눌린다.
검날이 자줏빛으로 빛나며, 날카로운 검기가 칼을 타고 올라왔다.
같은 집에서 지내는 여자들은 가끔씩 훈련하는 걸 지켜봤으니 놀라지 않았지만, 아이린과 문수린은 검에 담긴 힘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호연을 보면서도 놀랐지만, 남다은도 마찬가지.
일개 생도가 지닐만한 힘이 아니었다.
남다은은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이호연과 지내며 마법의 기본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텔레포트는 기본적으로 시전자가 서있는 공간을 다른 좌표로 이동시키는 것.
그렇기에 손에 잡고 있는 것이나 옷까지 같이 이동한다.
그녀의 권능은 공간지배.
남다은은 검에 담긴 마력으로 공간 자체를 베어버린다.
즉 공간을 이동시키는 텔레포트와는 상극이다.
만약 남다은의 검에 베인 상태로 이동을 지속한다면, 몸이 두 동강난 채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참.'
공간을 베는 검.
이호연의 강함은 남다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다은은 이호연의 마음을 읽었다. 이호연은 저 마인을 봐주고 있었다.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상대를, 생포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남자 친구에게 맞춰야겠지.
가볍게… 어깨까지만 날리자.
물결치듯 가볍게 허공을 벤 자줏빛 검기가 공간을 뛰어넘어 문성민이 있는 공간을 베었다.
*
"… 공간참?"
남다은 특유의 자줏빛 검기.
공간을 뛰어넘는 공격이 문성민의 어깨를 갈랐다.
"끄아아아아악!"
문성민의 단거리 텔레포트가 끊겼다.
공간을 건드리는 남다은의 공격이 문성민의 권능을 막은 것이다.
문성민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텔레포트가 중간에 끊긴 걸로 모자라 팔이 절단되었다.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자 검을 뽑고 있는 남다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이호연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옆에는… 강효린 박사와 아이린. 그리고 문수린까지.
그녀들은 놀란 표정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다 여기 있어.'
문성민을 생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레베카와 스칼렛에게 민간인의 안전을 전부 넘길 정도였다.
그래서 뒤를 보지 못했다.
'어쩐지. 갑자기 천장에서 마인들하고 문성민이 떨어지는 게 이상하긴 했어.'
문성민이 또 사고를 친 건 줄 알았는데, 저 셋이 쫒고 있던 거였나 보다.
문수린이 방학 내내 개인적인 조사를 이어가는 건 알고 있었다.
이 바로 위층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문성민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아래로 내려온 거겠지.
'근데 왜 능력으로 도망치지 않고 바닥을 부순 거야?'
지금은 남다은이 막은 거지만, 위 층에서는 왜 못 도망친 거지?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일단은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호연은 문성민의 몸에 마력 밧줄을 둘렀다.
단단하게 묶인 마력 밧줄에는 제압 효과가 있었다.
이제 문성민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호연은 문성민을 무릎 꿇린 채 위에서 내려다봤다.
마음 같아선 바닥에 굴리면서 머리통을 후리고 싶었지만, 장인어른이니까 무릎 꿇는 정도로 봐줄 생각이다.
"자세한 얘기는 서에 가서 하시죠."
"크읍, 어째서. 어째서 나를 막는 거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단지 마인들을…."
"장인어른. 정신차리세요. 다 끝났습니다. 장인어른의 복수는 이제 끝이에요."
"…."
문성민은 내 말에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10년간 해온 복수가 이렇게 마무리되다니.
그의 기분을 나는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들어주는 건 가능하겠지.
"나는 마인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그 악마들이 내 삶을 모두 부숴버렸어."
"…."
"그 악마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지. 가정을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명예를 버렸다. 인간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악마 새끼들을 죽이고 싶었다.
"예."
문성민은 무릎을 꿇은 채 씁쓸히 중얼거렸다.
미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담담한 어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아버렸다. 악마는 나였다는 걸.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 달려온 내 삶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지."
"…."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수린에게 신호를 보냈다.
문수린은 그제야 이 쪽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인의 피를 흩뿌리는 걸 즐겼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나는 이미 악마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너를 볼 명목이 없구나. … 수린아."
"아빠. 아빠…."
다가온 문수린은 문성민의 몸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10년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싶었다.
"… 미안하다. 나는 이미 늦었어. 지금은 괜찮지만, 내일 눈을 뜨면 다시 악마로 돌아가겠지. 내 정신이 온전할 때… 마지막 악마를 죽일 거다."
"아빠…? 그게 무슨 소리…."
문수린의 문성민의 어깨를 흔들자마자, 문성민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 씨발."
마천궁 전개.
룬의 결계.
이호연은 곧바로 반응했다.
스칼렛에게 들어본 적이 있다.
자신처럼 입에 독약을 넣고 다니는 마인들이 있다고.
잡히는 순간 끔찍한 고문과 핍박에 시달릴 게 뻔하니, 그전에 죽겠다는 생각인 미친놈들.
… 그 미친놈이 우리 장인어른이었다.
이호연은 곧바로 마력을 집중했고, 문성민이 있는 공간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스칼렛에게 사용했던 방법과 마찬가지.
마력이 약해진 문성민에게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무리 강한 독약이라도 생명력이 질긴 마인이라면 몸에 흡수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특히나 문성민은 마인 중에서도 최상급.
즉시 독약을 뱉어내게 만들고 백아영을 부르면 조치할 수 있다.
이호연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임리히법.
무언가 잘못 삼켰을 때 복부를 밀어내며 이물질을 뱉어내게 하는 응급조치법이다.
물론 방법이 조금 다르고, 독약을 삼켰을 때에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인은 몸이 튼튼하니 괜찮겠지.
'수린 누나. 미안.'
응급처치였다고 하면 봐줄거다.
이호연은 마력 밧줄로 문성민의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문성민의 배에 마력을 담아 킥을 꽂았다.
아주 살짝.
지금까지 자신을 귀찮게 한 감정도 담겨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