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3화 〉 433화. 테러리스트와 협상은 없다 (3)
* * *
릴리아나는 알베도에게 거리를 둔 채 날 이끌었다.
잠시 마법으로 알베도의 감각을 차단한 이호연은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릴리아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쟤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
"케이론처럼 가둬놓을 거야?"
"… 아니. 처리해야지. 내가 마력을 일으키는 걸 보고도 묻는 거야?"
이호연은 어이없는 눈으로 릴리아나를 내려다봤다.
케이론은 놀랍게도 아이리스 길드에서 길드원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판데믹의 사도인 데다가 발이 4개가 달린 놈과 어떻게 잘 지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는 세뇌에 걸렸을 뿐 인간을 혐오하진 않았다.
어쩌면 길드에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놨을 지도 모르지.
물론 알베도도 케이론과 같은 사도이고, 인간을 혐오하는 것 같진 않다.
인큐버스가 정기를 노리는 건 인간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행위.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알베도는 자신의 여자들을 노렸다.
그 순간부터 변명은 필요 없다.
차라리 자신을 노렸다면 모를까, 여자들을 노리는 건 절대 봐줄 수 없다.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위험한 종자다.
이호연은 표정을 찌푸리며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설마 죽인다구?"
"… 물어보고 싶은 게 없다면서. 혹시 저 인큐버스를 친구로 두고 싶어?"
서큐버스인 릴리아나가 친구로 두고 싶다면 이해할 수는 있다.
기분은 나쁘지만… 동족 하나 없는 릴리아나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책임지고 관리해야지.
"그런 거 아니야. 이제 집이 심심하진 않아. 스카웃하고 레베카도 있고, 다은이랑 다희도 있거든."
"그럼 이유가 뭔데?"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트렸다.
짜증을 내고 싶었지만, 이호연이 그 정도로 감정 컨트롤을 못 하진 않았다.
설마 같은 고향의 인큐버스를 감싸나 했는데, 눈을 보면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왜 살리자는 걸까.
"잡아놓으면 쓸 데가 있을 거 아니야."
"어디에?"
"글쎄. 케이론보다는 정보가 많은 것 같고. 혹시 언젠가 궁금한 게 생길지도 모르잖아. 지금 너는 너무 흥분했어."
"흠…."
그 말이 맞긴 하다.
은둔 생활을 하던 케이론은 모르는 정보가 꽤 많았다.
하지만 알베도는 계속 후계자로 활동을 했다고 하고, 판데믹의 뒤를 쫓다 보면 궁금한 게 더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더 생기겠지.
그 정도는 이호연도 알고 있다.
"… 그래도 불안해. 저 놈은 다은이를 노렸어. 그리고 처녀가 아니라고 안심할 순 없잖아."
문제는 놈이 인큐버스라는 것.
그리고 이미 전적이 있다는 것.
인큐버스가 처녀에게 강한 건 맞지만, 처녀가 아닌 여자도 취할 수 있을 거다.
그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호연은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릴리아나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남성성을 없애면?"
"뭐?"
"정기를 못 다루게 하면 되잖아. 인큐버스를 노예로 삼을 땐 보통 그렇게 했거든. 아, 성노예일 때는 물론 내버려 둬야겠지만."
"… 정기를 못 다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거기를 없애야지."
이호연은 '거기가 어딘데?' 라는 질문을 삼켰다.
릴리아나의 섬뜩한 말에,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사타구니에 힘을 줬다.
애초에 그렇게 해도 집에서 같이 살기는 싫다.
기분이 더럽게 나쁘잖아.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은 방안이다.
지옥의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좋은 정보통이 되겠지.
아이리스 길드에 맡겨놓고, 잘 관리하라고 당부해놓으면 된다.
"대신 아이리스 길드에 맡길 거야. 집에서 같이 사는 건 도저히 못해."
"상관없어. 놀 사람은 지금도 충분해. 혹시 지옥에 대해서 궁금한 게 생기면 묻고싶어서 그래."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꽤 흥분했다.
다른 여자들을 건드리긴 했지만, 지금 알베도만큼 지옥을 잘 아는 존재는 없다.
방법이 있다면 남겨놓는 게 좋겠지.
이호연은 엎드려 있는 알베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탈출하면… 평범한 여자부터 건드려야겠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정기를 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알베도는, 바닥에 엎드린 채 탈출 후의 계획을 짰다.
*
이호연은 알베도에게 다가가며 눈을 찌푸렸다.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알베도에게 호감은 없다. 당장이라도 죽이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릴리아나의 말대로 위험이 없어진다면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다.
다만 같은 남성체로서 조금 미안할 뿐이다.
'내 마법이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쳤다고 해볼까. 살려면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아니, 그게 통할 리가 없지.
그냥 대놓고 말하자.
정말 살고 싶으면 받아들일 거다.
알베도에게 다가가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릴리아나의 방에 있던 붉은 마력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아직 정체를 모르는구나.
알베도에게 물어볼까.
"알베도."
"사, 살려줘. 하라는 건 전부 할 테니…."
"질문에 잘 대답하면 살려줄게. 너, 이게 뭔 지 아냐?"
이호연은 알베도에게 붉은 마력구를 보여줬다.
물론 놈의 몸에 닿게 하진 않았다.
지옥 놈들은 워낙 음침해서 이런 마력구에도 무슨 장치를 해놨을지 모른다.
"이건… 지옥의 물건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도 몰라 이 새끼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알베도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릴리아나 칼리오페가 왜 인간 세상에 있는지.
그리고 그 학살의 서큐버스가 왜 한낱 인간 하나에게 아양을 떨고 있는지.
그에게는 아무 정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대답뿐이었다.
"… 마왕님의 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다."
"신전의 출입증?"
"그렇다. 그중에서도 최상급의 출입증이지."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릴리아나를 뻔히 쳐다봤다.
"영역 표시 어쩌고 하지 않았냐?"
"아닌가? 아님 말고~."
릴리아나는 혀를 내밀며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이호연은 미간을 주무르며 마력구를 제자리에 올려놨다.
"하아. 그래서, 이게 지구에 왜 있는 거지? 설마 신전이 인간 세상에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당연히 지옥에 있다. 그게 여기 있다는 건… 마왕님의 신전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고위 마족이 있다는 거겠지."
이 마력구는 에이든의 집에 있던 것.
그렇다면 판데믹에 사도가 아닌 다른 마족이 더 있다는 뜻이다.
아마 떨어뜨렸던지 선물로 주고 갔던지 했겠지.
결국 피하고 싶었던 마왕 소환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호연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판데믹에서 다른 마족은 못 봤고?"
"… 나 말고 다른 마족은 보지 못했다. 만약 있었다면 내가 기운을 느꼈을 거다."
"에휴. 도움 안 되는 새끼. 아니, 마왕 그 새끼도 이상해. 왜 인간을 못 노려서 안달이야. 지가 짱이면 마족 부하들이랑 쎄쎄쎄나 하면서 놀면 되잖아. 왜 굳이 먼 곳까지 행차하시냐고."
이호연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불평을 내뱉었다.
애초에 마왕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안 든다.
왜 가만히 있는 인간들을 노리는 거야.
그때, 가만히 있던 알베도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마왕 님이 인간 세상을 노린다니."
"무슨 뜻이긴. 너네 마왕이 인간 노리고 있잖아."
"…? 오해하는 모양인데, 마왕님은 인간을 싫어하신다. 인간 세상을 침공할 생각 따위 없다. 오히려 여러 마족들에게 은총을 내리며 지옥의 번영에 힘쓰고 계시지."
"지랄 났네 진짜."
개소리는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첩을 늘리는 걸 보고 은총이라고 표현하는 것부터 저 새끼들은 잘못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잘못 교육을 받은 죄다.
"다만 후계자인 루시퍼는 인간을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 루시퍼?"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은 왠지 이호연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예전부터 인간 세상을 노리고 있었지. 지옥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을 연구하는 데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게 루시퍼였다."
"… 걔가 지금 마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놈이고?"
"그렇다."
이호연은 원작의 기억을 되짚었다.
인간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려던 마왕의 모습.
그는 마에스트로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인간을 지옥의 아래에 두려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마왕은 루시퍼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모종의 방법으로 마에스트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충 아귀가 들어맞는다.
휴식기가 끝난 뒤 루시퍼가 마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마에스트로의 소환으로 지구에 나타난다.
그게 원작의 스토리라면, 현재의 마왕은 원작에 나오지않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병신 게임이여도 지옥의 스토리는 다루지않았으니까.
'…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지않나.'
물론 마왕이 루시퍼였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누가 마왕이든 결국 이호연이 죽여야한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마왕 소환까지 적어도 1년이 남았는데 고위 마족이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족은 본래 지구에 없는 존재.
원작에서 마족이 나오는 건 마왕 소환이 시작된 이후였다.
이호연은 답답한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진짜 마족이 튀어나오면 그때 생각하자. 모르겠으면 특기인 고문으로 정보를 뜯어내면 된다.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마에스트로의 모습은 봤냐?"
"못 봤다."
"… 널 소환한 게 마에스트로잖아. 어떻게 못 볼 수가 있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환자가 옆에 없었다. 휴식을 취하러 갔다고 했다. 나는 부하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혼자 인간 세상으로 나섰다."
"좋다고 여자를 노렸겠지."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살의를 내뿜었다.
남다은과 백아영의 몸에 놈의 마력 조각이 붙어있을 때를 생각하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부, 부탁이다. 살려주기만 하면 뭐든 지 하겠다. 그러니 목숨만은…!"
알베도는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비록 지옥에서는 루시퍼에게 밀렸지만, 이곳은 인간 세상.
루시퍼의 견제가 없는 곳에서 정기를 쌓을 수 있다.
어떻게든 목숨을 구하고, 이 미친 년놈들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진짜 뭐든 지 할 거야?"
"당연하지. 내, 내 몸으로 남색을 즐겨도 좋으니…."
이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놈의 남색은 왜 자꾸 말하는 거야.
혹시 지옥에서 남색이 인기 있는 건가? 정말로?
예전에 릴리아나의 말을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지옥 놈들은 다 죽여버려야한다.
"… 릴리아나."
"웅. 지금 할까?"
"작업 시작해."
"카, 칼리오페. 무슨, 잠시. 잠시만…!"
끄악. 끄아아악!
몸을 돌린 이호연의 뒤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남자로서 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치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한 시간 후.
나는 릴리아나의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릴리아나가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왠지 릴리아나에게 느껴지는 기세가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았다.
"… 다 한 거야?"
"응. 정기를 거의 다 흡수했어. 이제 안전해."
릴리아나의 뒤에는 몸의 수분이 쪽 빨린 듯 퀭한 얼굴인 알베도가 누워있었다.
내가 걱정하던 이상한 접촉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정기를 빤다길래 설마했는데, 그냥 손목에 손을 얹은 채 몸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거였다.
서큐버스과 인큐버스는 그런 교감이 가능하다고 했다.
혹시나 물리적으로 거세를 해야 하는 거였다면 굉장히 낭패였으니 다행이다.
릴리아나에게 시킬 순 없으니 내가 해야 했는데, 그건 죽어도 싫었거든.
그딴 짓을 할바엔 차라리 정보통을 포기하고 만다.
나는 누워있는 알베도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 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살아있는 거지?"
"이제 인큐버스라는 이름은 버려야 해. 그냥 버스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버스. 흐흐."
"재미없다."
"치."
나는 알베도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릴리아나는 개그를 무시한 죄로 내 등에 솜주먹을 날렸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살아는… 있네."
"살아있다니까. 정기를 다루는 기관을 파괴했을 뿐이야. 다른 걸 건드리진 않았어."
"…."
인큐버스에게 정기를 다루는 기관을 파괴했다.
그게 과연 간단한 일인 지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말을 삼켰다.
일단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나는 개안을 쓰고 알베도의 바지를 투사했다.
"… 괴사 한 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다시 떠올리기 싫었다.
나는 거품을 물고 쓰러진 알베도를 마력 밧줄로 감쌌다.
"바로 아이리스 길드에 넘기는 거야?"
"일단 내 방에 가둬놨다가 내일 넘길거야."
어차피 살릴 거면 써먹어야지.
알베도에게 하루 정도 지옥의 마력에 대해 물을 생각이다.
어차피 금방 파악할 수 있겠지만, 빠른 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게 현명하다.
"다른 여자의 정기를 줄 수는 없으니 내 정기를… 아, 이제 정기는 안 먹나?"
"그냥 남는 밥이나 주자. 노예는 대충 관리해도 돼."
"…."
릴리아나는 이제 알베도에게 관심 없다는 듯 컴퓨터를 두드렸다.
방금 한 남자의 삶을 끝내놓고 인터넷 방송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불쌍한 눈으로 알베도를 보며 혀를 찼다.
내 여자를 건드린 건 엄청난 범죄지만, 같은 남자로서 괴사한 그곳을 보면… 동정심이 들 수밖에 없다.
으으.
나는 괜히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알베도를 내 방에 쑤셔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