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 427화. 망나니 인큐버스 (5)
* * *
상황 파악을 끝낸 나는 혼란을 없애기 위해 빠르게 우리 관계를 설명했다.
다행히 백아영은 놀랐는데도 내 말에 집중해줬고, 금방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 아아. 미안해. 그러니까, 백아영 씨?"
"네, 네…."
"그때는 내가 우리 애ㄱ, 크흠. 호연이랑 친분이 없었거든. 오해하게 만들었네."
"죄송해요. 아영 씨. 저도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머리에서 지우고 있었어요."
레베카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나는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백아영에게 사과를 전했다.
백아영이 놀란 이유는 레베카 때문이었다.
친목 파티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백아영을 구한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레베카가 나타나서 백아영에게 위협을 했다고 한다.
물론 레베카도 위협이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그 당시 레베카는 룬의 일족에 과한 집착을 하고 있었으니 백아영의 입장에서 위협이라고 느껴도 이상하지가 않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레베카의 머리를 잡고 억지로 숙이며 백아영에게 사과했다.
사실 내 잘못이 꽤 크다.
백아영이 과거의 일족을 얘기하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만났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레베카에게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둘이 만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다 보니, 그대로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져버린거지.
"괘, 괜찮아. 오해가 없다면…."
"미안해요. 아영 씨. 다시 소개하자면 레베카라고 해요."
"아, 네. 반가워요…."
백아영은 아직 긴장한 것 같았지만, 내 반응을 보며 안심한 것 같았다.
레베카는 못 믿어도 나는 믿을 수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둘은 무슨 관계야? 과거의 일족은 또 뭐고?"
옆에서 내 설명을 듣던 임솔은 궁금한 듯 물어왔다.
아는 마법사라고 소개했는데 과거의 일족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당연히 궁금하겠지.
"으음… 사실은 별 거 아니거든요. 단순한 오해였어요."
나는 레베카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순식간에 작전을 짰다.
레베카는 자연스럽게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맞아. 제가 오해했어요. 소수민족인 우리 일족의 비기를 사용하길래 당연히 우리 일족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재능으로 배운 거라서…."
"아하. 그렇다면 오해할 수도 있겠네. 우리 제자가 재능이 엄청나니까."
"네네. 임솔 마법사님은 역시 제자 사랑이 엄청나시네요."
"… 그럴 수가 있는 거야? 내가 마법은 잘 모르지만 일족의 마법 같은 건 쉽게 배우는 게…."
백아영은 레베카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녀가 아무리 마법을 잘 모른다지만 일반인 정도의 지식은 알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겠지.
"호연이니까 가능한 거지. 우리 제자가 학회에서 발표한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저도 봤어요. 그 마천궁이라는 마법 하고 핵심술식의 조화가…."
"응. 레베카 씨. 역시 보는 눈이 좋네. 다만 그 이론에서…."
레베카와 임솔은 내 칭찬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마법에 대한 고찰로 넘어갔다.
둘 사이에 있던 백아영은 멍하니 둘을 바라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얘기헀잖아요. 마법에 진심인 사람들이라고."
"응… 그런 것 같네."
"레베카 씨도 보기보다 착한 사람이에요. 제 얼굴을 봐서라도 아영 씨가 넘어가 주세요."
"괜찮아. 놀랐을 뿐이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믿을게."
나는 백아영과 대화를 나누며 방 안을 살폈다.
임솔의 연구실에서 이렇게 4명이 같이 있는 상황이 뭔가 신기하네.
그 짧은 시간에 임솔과 저렇게 친해지는 걸 보면 레베카도 친화력이 엄청나단 말이지.
"둘이 대화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 그냥 우리끼리 놀까요?"
"그럴까…?"
나와 백아영은 밀렸던 잡담을 하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
처음엔 백아영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눴지만, 결국엔 넷이 섞여서 대화를 시작했다.
레베카 특유의 친화력 덕분에 백아영도 거부감 없이 레베카와 놀 수 있었다.
"아영 씨는 호연이랑 사귀는 사이?"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래요? 그러면 임솔 마법사님은?"
"으음. 그건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은데."
"레베카 씨. 왜 여기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나는 신나게 헛소리를 하는 레베카의 입에 커피잔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얼마나 떠들었을까.
원래 목적이었던 인큐버스를 까먹을 때 즈음, 백아영이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응급실에 일이 있거든."
"아영아, 벌써 간다고?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
"… 괜찮아. 이미 배불러."
백아영이 입술을 핥으며 내게 눈을 흘겼다.
임솔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눈을 피했다.
한두 시간 전까지 저 입에 물려있던 내 물건이 생각났다.
"애기, 아니. 호연아. 나도 돌아갈게. 집, 아니 나중에 보자."
"네. 근데 아까부터 왜 그리 말을 더듬어요."
"임솔 마법사를 만나서 그런가. 흐으."
레베카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걸 보니 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던 거 같다.
임솔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음에 또 놀러 오겠다고 말한 레베카는 먼저 나간 백아영의 뒤를 따라갔다.
집무실에 가득 차 있던 사람이 반으로 줄었더니 텅 빈 느낌이었다.
내 옆에 서있던 임솔은 모두가 나가자마자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레베카 씨는 어땠어요?"
"좋은 마법사네. 마법에도 진심이야."
"엄청 강하죠?"
"응. 그 결계 마법이 신기했어. 네가 쓰는 결계랑 똑같은 거지? 결계를 그렇게 극한까지 다룰 수 있다니, 새로운 걸 배운 느낌이야."
"맞아요. 일족 고유의 마법인데 저는 아카데미 금고에서 우연히 얻었거든요."
"일족 고유 마법을 재능으로 익혀버렸으니 오해할만해. 역시 우리 제자야."
임솔은 기분 좋은 듯 말을 늘어놨다.
레베카를 소개해주길 잘했네.
다른 사람을 저렇게 극찬하는 건 오랜만에 본다.
'혹시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겠지?'
당연하지만 곧 있을 가짜 던전 계획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임솔이다.
임솔의 마법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나와 레베카의 마력을 꿰뚫어 볼 가능성도 높으니까.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배고프네. 둘이 밥 먹으러 갈까?"
"좋죠."
"오늘은 내가 살게."
임솔의 태도를 보면 딱히 바뀐 건 없었다.
레베카도 바보가 아니니 의심당할 만한 짓은 안 했겠지.
나는 안심하고 임솔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조용한 아카데미 내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을 단 둘이 걷다 보니 문득 생각났다.
'나 여기 인큐버스 때문에 온 거였지.'
생각난 김에, 나는 다시 임솔에게 인큐버스에 대해 말했다.
"아무튼, 제가 말했던 인큐버스는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죠."
"갑자기?"
"이게 진짜 중요한 일이라니까요."
인큐버스는 몇 번이고 강조해야지.
처녀한테 엄청나게 강하다는데 얼마나 불안하냐고.
임솔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날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설마 이걸 구실로 나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야? 자신 없는 건 아니지? 호연이한테 실망인데."
"… 그럴 리가요. 진짜 걱정이라 그래요."
다른 히로인이었다면 이 일을 구실로 처녀를 공략해볼 수도 있겠지만… 임솔은 예외다.
임솔이 허락하지도 않을 거고, 그녀의 자존심을 꺾은 뒤에 관계를 가지는 건 나도 기대하고 있는 일이다.
"흐흐."
"…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달콤한 디저트를 먹던 임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준 선물은 잘 처리했어?"
"선물이요? 아. 그 장물."
"장물이 아니라 선물이야."
미국에서 있던 일이었지.
에이든의 집을 털었을 때 임솔이 내게 챙겨준 붉은 마력구가 있었다.
그 얘기를 하는 거다.
'처분 중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지.'
스칼렛에게 넘겼는데, 장물아비에게 거절당했다.
릴리아나의 말에 따르면 지옥의 마력이 들어있다고 했으니 나중에 어디에 쓸지 모른다.
지옥의 마력을 모르는 임솔에게 그걸 설명할 바에는 대충 둘러대는 게 마음 편하다.
"네.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처분 중이에요."
"음음. 잘했어. 그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임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한 듯 날 칭찬했다.
누가 보면 세뱃돈을 준 친척인 줄 알겠네.
장물을 건네준 사람이 할 태도는 아니지만, 날 위해 챙겨준거니 나도 감사를 표했다.
"근데 진짜 아무 말도 없네요? 그 학회장 아저씨."
"내가 아저씨를 몇 년이나 봤는데. 인터뷰에서 칭찬해주는 거로 넘어갈 사람이라니까."
임솔의 말대로, 인터뷰에서 날 칭찬하긴 했지만 내게 직접적인 보답은 없었다.
그 아저씨 보기보다 짠돌이네.
그러니까 머리가 빠지지.
"슬슬 나가자."
"넵."
우리는 디저트를 깔끔하게 비우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역시 공짜 밥은 맛있어.
바깥에 나온 임솔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돌아갈 거야?"
"으음…."
"계속 인큐버스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 나도 결계에 좀 더 힘쓸게."
임솔은 날 안심시키기 위해 주변에 결계를 치고 걸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대책을 세우는 게 좋을 거 같긴 해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알람 마법 같은 걸 새겨서 제가 바로 올 수 있게 할게요."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야?"
"당연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교수님인데. 일단 연구실로 돌아갈까요?"
"후후. 그래그래."
내 말을 들은 임솔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 애 취급당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지만, 손 잡을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나는 임솔의 부드러운 손을 잡은 채 연구실로 향했다.
*
몇 시간 전.
임솔을 조사하기 위해 임솔의 연구실이 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은신하고 있던 인큐버스는, 한 남자와 붉은 머리의 미녀가 연구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 이호연?"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한 인간 남자.
그가 임솔의 연구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저 남자인가."
인큐버스는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몇몇 인간 여자들에게 정보를 더 뜯어낸 결과, 임솔이 처녀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남자와 접촉도 없고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호연이 들어가는 걸 본 이상 불안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 정보에 이호연과 임솔의 열애설도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이미 조사한 성녀가 임솔의 연구실로 들어가고, 몇 시간이나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인큐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그러자 아까 들어갔던 성녀가 밖으로 나오고, 이어서 붉은 머리의 미녀도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임솔과 이호연 두 명뿐.
그리고 그 두 명도 곧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따라간다.'
임솔은 연구실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마법을 연구하며 보내고, 심지어 잠도 연구실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즉 이렇게 바깥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그에게 큰 기회였다.
둘에게 들키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던 인큐버스는 둘이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계획을 세웠다.
'식사를 마치면 헤어지겠지.'
그때가 기회다.
임솔이 혼자 남았을 때를 노려야 한다.
아직 직접 조사한 건 아니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약육강식이자 강자생존인 지옥에서 오랜 기간 인큐버스 생활을 하며 기른 감각.
그 감각이 그에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임솔은 처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지금 임솔이 보인다는 것.
임솔의 주변에 강한 결계가 쳐져있었는데도 인큐버스는 임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녀에게 강한 인큐버스의 종족 특성이 발동한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둘은 다시 연구실 방향으로 향했다.
'… 뭐지?'
심지어 손까지 잡은 상태.
"설마…."
다급해진 인큐버스는 주먹을 쥔 상태로 자신의 정기를 확인했다.
남은 정기는 싸움 한 번이 아슬아슬할 정도.
웬만하면 안정적인 상태에서 싸우고 싶었지만, 다른 남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저 남자였다.
인큐버스의 눈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미모를 가진 인간 남자.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불안했던 그가 하필 임솔과 같이 걷고 있었다.
"… 놓치면 안 돼."
저런 미녀를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인큐버스는 결국 옥상에서 내려와 둘과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