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화 〉 423화. 망나니 인큐버스
* * *
화동 던전 탐사가 있던 날의 밤.
잠시 살 게 있어 집 밖으로 나온 남다은은 스마트워치를 보며 걸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뉴스.
천재 마법사 이호연, 아이리스 길드와 협업.
스폰서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협업이라고 밝힌 아이리스 길드.
아이리스 길드와 이호연 생도 둘 모두에게 이득인 관계를 위해….
이호연이 뉴스에 나오는 건 흔한 일이었기에남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이리스 길드랑 일하는구나. 엘리스랑 같이 일하는 건가?"
아이리스 길드는 제대로 된 길드였으니 이호연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엘리스….'
남다은은 엘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엘리스와 자신은 애매한 관계였다.
같은 클래스에서 수업을 듣지만 아카데미에서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공동 주제는 이호연 혹은 영입 제의.
영입 제의는 모두 거절했고,이호연에 대해서 몇 번 대화를 했었지만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부분 엘리스가 도발하면 남다은은 받아주는 형식.
게다가 그녀와 자신의 연애관은 정반대였다.
이호연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자신과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엘리스.
'엘리스는 지금도 다르게 생각하려나?'
남다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엘리스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호연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행복이라면서 엘리스에게 설교를 늘어놨었다.
"하아…."
물론 그 마음이 변한 건 아니지만, 이호연이 점점 바빠지고 자신에게 소홀할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결국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엘리스와 비슷한 마음이 있었던 걸까.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남다은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호연이도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자신이라도 뒤에서 응원해줘야 한다.
남다은은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호연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한 번 안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 서운함은 모두 사라지겠지.
그때, 그녀의 종아리에 무언가가 달라붙었다.
마치 주사를 맞는 것 같은 따가움.
"모기인가…?"
살짝 놀란 남다은은 잠시 멈춰 다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종아리는 여전히 매끈한 상태 그대로였고, 따가움도 사라져 있었다.
"…?"
고개를 갸웃거린 남다은은 다리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골목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큐버스는, 이를 악 물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미녀가 어떻게….'
인큐버스는 아쉬움에 몸을 떨었다.
남다은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옥에도 얼마 없는 수준의 미녀였다.
이 작은 국가에 그런 미녀들이 몰려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정기의 양을 확인하고 느꼈다.
그녀도 처녀가 아니었다.
'… 이걸로 4명인가.'
여교수에게 받은 명단에 나오는 생도는 모두 확인했다.
쌍둥이 생도는 처녀가 아니었고, 금발의 생도는 먼 곳에 있어서 확인불가.
마지막 희망인 여자까지 처녀가 아니었다.
인큐버스의 능력은 매혹.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관없이 매혹할 수 있지만, 상대가 성경험이 없다면 그의 강함은 몇 배로 강해진다.
"젠장…."
욕지거리를 삼킨 인큐버스는 1학년 생도의 명단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그 정도의 미녀는 없었다.
"인간들은 이렇게 음란하게 사는 건가…!"
20살.
인큐버스의 관점으로 따지면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다.
그런 여자들이 벌써 관계를 가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어떻게 해야 하지?"
계획이 틀어졌다.
인큐버스는 정기를 먹으며 강해져야 한다.
물론 미녀가 아닌 인간 여성을 취하더라도 정기를 얻을 수는 있다.
비처녀를 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기를 얻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만 명의 평범한 여자를 취하는 것보다, 뛰어난 미녀 한 명을 취하는 게 낫다.
그리고 백 명의 비처녀보다 한 명의 처녀를 취하는 게 낫다.
서큐버스는 성욕이 많은 남자일 수록 정기를 많이 뜯어낼 수 있지만, 인큐버스는 그 반대였다.
상대가 순결한 처녀여야 정기를 많이 뜯어낼 수 있다.
그게 인큐버스라는 종족의 특징이다.
"… 다른 여자를 찾아야 해."
어떻게든 미녀면서 처녀인 여자를 찾아야 한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소환되면서, 지옥에서 가졌던 힘을 대부분 잃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매혹뿐.
몸을 지키기 위해선 다른 힘이 필요했다.
"…."
인큐버스는 화동 던전을 떠올렸다.
본래 마인들의 지원을 위해 갔던 곳이지만, 거기서 만난 놈이 왜인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호연이라고 했었지.'
명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막 20살이 된, 인큐버스였다면 아직 성년식도 못 치르는 애송이.
하지만 그의 얼굴만 봐도 적대적인 감정이 살아난다.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불쾌했다.
"… 일단은 미녀 먼저다. 그놈은 나중에 처리해도 돼."
인큐버스는 불쾌한 고민을 멈췄다.
어차피 지금은 그를 처리할 수 없다.
먼저 강해져야 한다.
인큐버스는 정보를 얻을만한 여자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
여러 사건이 있긴 했지만, 화동 던전 조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리는 화동 던전을 빠져나왔고, 길드원들은 지쳐보였다.
아마 마지막에 일어났던 전투가 꽤 부담이었겠지.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쁜 아이리스 길드원들을 보며, 나는 강효린 박사에게 슬쩍 다가갔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응. 고생했어요. 이호연 생도. 덕분에 조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네요."
강효린 박사는 내게 감사를 전했다.
아마 내가 없었으면 인큐버스를 상대하는 게 꽤 귀찮았겠지.
어쩌면 사상자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 고생했어."
"네. 고생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아이린도 날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짧게 인사를 건넸다.
마음같아선 아이린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길드원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시간은 많으니 나중에 말해도 되겠지.
나도 가볍게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 인큐버스가 마음에 걸리네.'
괜히 기분이 나쁘다.
하필이면 이름도 이상하잖아.
아카데미 아다 폭격기가 뭐냐고.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는 릴리아나가 누워서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가기 전과 같은 모습.
몇 시간이나 저러고 있었던 걸까.
나는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나 왔어. 릴리아나."
"오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릴리아나의 옆에 앉자, 릴리아나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나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생각했다.
'인큐버스에 대해서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서큐버스인 릴리아나에게 인큐버스의 정보를 묻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결국 마왕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릴리아나."
"왜?"
"인큐버스에 대해서 잘 알아?"
"인큐버스?"
"응."
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릴리아나밖에 없었으니, 결국은 물어봐야겠지.
"갑자기 인큐버스는 왜? 혹시 저번에 인큐버스 같다고 한 걸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농담이었는뎅."
"그런 거 아니야. 진지한 말이야."
"으으음. 인큐버스는 서큐버스랑 비슷하면서 달라. 조금 더 전투 쪽에 가깝거든."
"그래?"
"인큐버스는 정기를 흡수할수록 강해져. 서큐버스는 반대로 정기를 흡수할수록 매력적으로 변해서 상대를 유혹하기 쉬워지지. 그래서 서큐버스 퀸은 쳐다보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는 거야."
화동 던전에서 만났던 인큐버스는 전투보다 유혹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말이 틀리진 않겠지.
아마 여러 가능성이 있을 거다.
금태양 인큐버스가 별종일 수도 있고, 지옥에서 지구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케이론도 약해졌다고 했으니까.
'그 새끼의 목적은 뭐지?'
당연한 말이지만판데믹의 목적은 인간 세상의 혼란이다.
즉 사도의 목적도 인간 세상의 혼란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인큐버스는 무언가 달랐다.
금태양, 아다폭격기, 인큐버스까지.
불길한 상징들이 모여있으니 안심할 수가 없다.
"무슨 일 있는 거야? 갑자기 인큐버스에 대해 물어보고. 표정도 안 좋구."
릴리아나가 내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역시 내 표정이 읽기 쉬운 모양이다.
어차피 계속 숨길 순 없다.
언젠가 말해야 한다면 빨리 말하는 게 낫겠지.
"실은 던전에서 인큐버스를 만났거든."
"정말? 지옥의 인큐버스야?"
"아마 판데믹이 소환한 사도일 거야. 케이론처럼."
"사도…."
릴리아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금태양 인큐버스는 마왕의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망나니 계약서에 이름이 쓰여있었으니까.
그리고 케이론이 그랬듯, 그 인큐버스도 무언가 정보를 가지고 있겠지.
그 정보는 릴리아나를 또 혼란스럽게 만들거다.
"걱정하지 마. 릴리아나. 난 언제나 네 편이니까."
"… 응."
나는 강아지같이 내게 달라붙는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양 팔로 끌어안았다.
띠리링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릴리아나를 놓고 현관을 바라보자, 무언가 들고 있는 남다은이 보였다.
"다은아. 장 보고 온 거야?"
"응. 호연이가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남다은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자연스러운 포옹.
내가 잠시 남다은의 등을 쓰다듬고 있을 때.
릴리아나가 놀란 듯 말했다.
"뭐야. 응? 이게 왜 여기 있지?"
"릴리아나, 왜 그래?"
"다은아. 가만히 있어."
"네? 릴리아나 씨…?"
릴리아나는 갑자기 남다은의 다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다은은 당황한 듯 비틀거렸고, 나는 그 상황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릴리아나. 갑자기 뭐하는 거야."
릴리아나는 내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남다은의 다리를 만지다가, 곧 무언가를 떼어냈다.
그제서야 나도 릴리아나의 손에 있는 마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다은이한테 붙어있었어."
"지옥의 마력? 그게 왜 다은이한테 붙어있어?"
"이건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의 방식인데, 상대가 정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나 확인하는 거야."
"정기를 확인한다…. 하아."
"…?"
남다은은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큐버스는 정기를 빨아들여서 힘으로 바꾼다고 했지.
이번에 남다은이 그 후보에 올랐던 거다.
"… 아이씨."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또 귀찮은 일이다.
아니, 이번엔 더 짜증 난다.
차라리 내 목숨을 노리는 게 낫지, 내 여자들을 건드리는 건 아니잖아.
릴리아나는 마력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왜?"
"다은이가 처녀가 아니잖아."
"리, 릴리아나 씨.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남다은이 부끄러운 듯 릴리아나를 바라봤지만, 릴리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미녀일수록 정기가 진해지고, 순결할수록 정기의 양이 많아. 아마 다은이의 미모를 보고 접근했다가 처녀가 아니라서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 그렇구나."
화동 던전에서도 일부 사람들만 매혹에 강하게 걸렸다.
그게 경험이 없는 사람이겠지.
다행히 내 여자들은 다 나와 관계를….
"아."
그때, 내 머릿속에 한 명이 스쳐 지나갔다.
처녀인 내 여자.
… 딱 한 명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