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화 〉 409화. 비밀 마법 결사 (2)
* * *
"에이든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네. 에이든의 측근 중 한 명이 마인 이라는 증거가 있어요."
나는 임솔대신 말을 시작했다.
아서는 내 말에 금방 반색했다가, 곧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심증이 아니라 무조건 꼬투리를 잡을만한 증거여야 한다."
"그걸 보여드리려고요. 지금 제 방에 잡아놨거든요. 같이 올라가시죠."
"…?"
아서는 날 쳐다보다가 임솔에게 고개를 돌렸다.
임솔은 그런 아서를 보며 고개를 젓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내 얼굴 보지 말고 빨리 일어기나 해."
"아니, 지금 바로? 마인을 잡았다니 그게 무슨…."
우리는 카페를 나와 스위트 룸으로 향했다.
내 방에는 당연하게도 정신을 잃은 마인이 묶여있었고, 반신반의하던 아서는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에이든을 따라다니던 놈이 확실해. 이 놈이 마인이었다니…. 어떻게 눈치채지 못한 거지?"
"이미 학회에 들어온 사람이라 다들 자세하게 확인을 안 해봤겠죠. 저는 마력 감응도가 좀 높아서 약간 이상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허어…. 역시 자네는 대단해."
"그리고 이 자식 품에서 이것도 나왔어요."
나는 마인에게 빼앗은 판데믹의 증표를 내밀었다.
학회장인 아서라면 이 물건을 알고 있겠지.
"판데믹…? 설마 에이든이 판데믹과 손을 잡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조사를 안 해봐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요."
"방금 호언장담해놓고 미안하지만… 이 마인을 내게 양도해줄 수 있나? 학회에서 직접 조사해보겠네"
"당연하죠."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짐덩이에 불과하다.
어제 이 놈이 방에 있어서 임솔한테 빨아달라고 못했다고.
이 쓸모없는 자식.
"고맙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겠네."
"응. 아저씨. 조심해서 가."
아서는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며 마인을 어깨에 업은 채 방 밖으로 나갔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내 역할은 다 했지.
나머지는 아서가 알아서 할 거다.
나는 임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린 어떡할까요?"
"글쎄. 이 정도면 할 일은 다 했잖아. 아저씨한테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사실 저도 그러고 싶긴 해요."
나도 하루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임솔과 지내는 아메리칸 라이프도 좋긴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여자가 좀 많으니까.
루시 루미와 동아리방에서 놀아야 하고 엘리스와 아이린의 일도 해결해야 한다.
수린 누나의 아버지 일도 처리하면서 백아영과 만남도 가져야한다.
게다가 집에서 기다리는 여자들과도 시간을 보내야 하니 정말 몸이 다섯 개여도 모자라다.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려면 레베카와 마법을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도 결국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결론은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는 것.
'미국에서 더 길게는 못 있어.'
그리고 그것 말고도 큰 문제가 있었다.
임솔이 매일 밤마다 한 두 번씩 해주긴 하지만, 섹스가 없는 삶에 도저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잘 때 부드러운 여자의 몸에 안기지않으면 잘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고.
'마법 수련을 못 하는 것도 아쉬워. 마천궁을 써보고 싶은데.'
마천궁을 만든 이후로 실전 테스트를 한 번도 못 해봤다.
아무리 봐도 엄청나게 강해졌는데, 진심을 낼 기회가 없으니 답답하잖아.
호텔에 훈련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서한테 훈련장을 빌리기엔 아서도 할 일이 많았다.
'하늘에서 판데믹 간부 하나 안 떨어지나?'
전력으로 한 번 싸워보고 싶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겠지.
마법사 학회의 가장 큰 이벤트인 논문 발표는 끝났지만, 지금도 호텔에서 뒤풀이와 파티가 열리고 있다.
나와 임솔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열기가 뜨거운 건 여전하니 아마 이 곳에 판데믹이 직접 등장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임솔을 바라봤다.
"솔아. 이리 와봐요."
"존댓말 하라고 했잖아."
"존댓말 했잖아요."
"…."
"죄송합니다."
임솔이 눈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걸 보자마자 바로 사과했다.
장난이 안 통하네.
"일단 하루 이틀 정도만 더 있다가 돌아가는걸로 해요. 솔이 누나도 일이 많으니까."
"응. 그러자."
"음, 나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실래요?"
"좋아."
당장은 임솔과 데이트라도 하면서 보낼까.
방에서 자리를 차지하던 마인이 없어졌으니 밥 먹고 와서 한 번 빼달라고 해야지.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외출준비를 했다.
*
어두운 저택의 안.
한 사내가 굳은 얼굴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 같은 표정을 짓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했다.
"차기 학회장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던데."
우뚝
에이든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상식이 미뤄지는 이유는 뭐지? 자신만만한 말투로 학회장 상은 무조건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반드시 받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결과를 가져왔어야지. 에이든."
"…."
에이든은 마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억울한 감정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에게 대들었다가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일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혹시 도움이 더 필요한 건가?"
"… 임솔과 이호연을 처리해야 합니다. 학회장의 가장 큰 힘이 그 두 명입니다. 젊은 마법사들의 지지를 열렬하게 받고 있습니다."
"지금 그 둘을 노렸다가는 주목이 쏠릴 텐데."
"동시에 저희 측의 마법사들도 노리면 됩니다. 그렇다면 학회를 향한 동시다발적 테러라고 보도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마법사들은 제가 처리할 테니, 판데믹에서 그 둘만 붙잡아주십시오."
에이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차기 학회장이라는 자리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드디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는데, 겨우 그 년놈들 때문에 망가트릴 순 없었다.
'….'
에이든은 어제의 발표를 보며 느꼈다.
이호연과 임솔. 그들은 자신과 격이 달랐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결과가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가 평생을 노력한 마법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이호연의 마법이 훨씬 뛰어났다.
임솔의 논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 전세계의 마법사들이 임솔을 우러러보겠지.
그 둘은 마법의 역사를 바꿀만한 천재였다.
여기서 더 내 버려뒀다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버린다.
그러니, 아직 손이 닿는 곳에 있을 때 처리해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에이든."
"… 예."
"이미 인류 멸망 계획이 시작됐다. 마법사 학회의 도움이 필수적이야. 한 번 더 이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지원을 끊겠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에이든은 결의를 다지며 고개를 숙였다.
*
한국, 이호연의 집.
저녁이 되기 전 거실에서는 항상 여자들의 친목회가 열렸다.
그녀들은 오늘도 사이좋게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남다은 양은 요리도 잘하고, 심성도 바르고, 착하다니까."
"감사합니다. 레베카 씨."
남다은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밥이 맛있다는 이유로 저런 칭찬을 해주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레베카의 말을 듣던 릴리아나는 초콜릿을 집어먹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베카. 나도 다 잘해. 나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라구."
"맞아요. 릴리아나 씨도 예전에는 잘했어요."
"그럼 지금도 좀 하지 그랬어. 릴리아나."
"나는 이 가정을 이끌고 있잖아!"
릴리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집을 이끄는 가장인 자신을 저렇게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레베카가 스마트 워치를 들이대며 말했다.
"이거 봐. 애기 아빠가 뉴스에 엄청 나오네?"
"그가 어제 마법사 학회에서 엄청난 걸 발표했다고 합니다. 저는 마법 전문이 아니라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 한 번 확인해봐야겠네. 데뷔부터 이 정도 반응이면 진짜 엄청난 거거든."
"스카웃! 나도 뉴스 보여줘!"
"스칼렛 씨 저도…."
"여기 있습니다."
릴리아나와 남다은은 얼굴을 딱 붙이고 이호연의 뉴스를 확인했다.
"이거봐. 다 이호연 얘기야."
"와…."
사실 남다은과 릴리아나는 읽어도 잘 모르는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이호연이 칭찬받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근데 이건 뭐야? 지구에도 이런 게 있어?"
"릴리아나 씨, 어떤 기사를 말하는 거에요?"
"이거 말이야."
릴리아나는 구석에 있던 작은 기사를 눌렀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세계 곳곳에서 던전의 마력이 다르게 측정된다는 내용이었다.
던전이라는 분야 자체가 아직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기에 그다지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릴리아나는 사진에 찍힌 자주빛 마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구의 던전에도 이런 게 있어?"
"이런 건 저도 처음 봐요."
크게 관심받지 못하고 묻힐만한 기사였지만, 릴리아나는 그 작은 사진에서 특이한 친밀감을 느꼈다.
"이상하네…."
"왜 그러십니까? 릴리아나 님."
"익숙함이 느껴져. 내 고향에서 보던 마력의 흐름 같아."
"고향…? 지옥 말입니까?"
스칼렛도 릴리아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고향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흐으으으음… 글쎄. 잘 모르겠네. 뭐, 별 거 아니겠지!"
릴리아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귀찮음에 생각을 멈췄다.
지구에는 워낙 이상한 게 많았다.
자신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이호연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학회도 끝났잖아."
"듣기로는 며칠 더 일정이 있다고 합니다."
"흐으음… 안 되겠네. 오면 따끔하게 혼내야겠어!"
릴리아나는 과자를 흔들며 소리쳤다.
"호연이도 일 때문에 간 건데 혼낼 것 까지는…."
"아니야. 애기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긴 했어. 나는 상관없지만 우리 다은이는 잘 챙겼어야지."
"네? 아니요 저는 괜찮…."
"그게 아니고 내가 문제라니까, 내가!"
"…."
당황한 남다은과 웃고 있는 레베카.
그 옆에서 답답해하는 릴리아나 까지.
스칼렛은 그녀들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여기 있는 4명의 여자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이호연의 사정을 알고도 그를 선택했으니까.
처음부터 이호연의 여자 관계를 다 아는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스칼렛이 아는 이호연의 여자 관계는 끝이 없었다.
이미 손가락으로 부족한 수준.
과연 그녀들도 이호연의 사정을 이해해줄까.
"다은아. 스카웃. 나 배고파앙. 방송했더니 힘들어."
"금방 저녁 준비해드릴게요."
"오늘은 오랜만에 나도 좀 도울까? 항상 다은이하고 스칼렛 양한테 얻어먹기만 하니까 미안하네."
"오오. 레베카, 너 요리도 할 수 있어?"
"당연하지. 혼자서 오래 살았거든."
"다 가면 나만 혼자 남잖아. 같이 가자!"
스칼렛은 들려오는 대화와 함께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가 알아서 하겠지.'
사실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혹시나 낙오자가 생기면 그만큼 경쟁자가 줄어드는 거니 마냥 나쁘지도 않았다.
"레베카 님, 릴리아나 님. 같이 부엌으로 가시죠."
"으으응. 일족의 비밀 요리가 있어. 특별히 알려줄게."
"좋아. 그럼 나도 지옥의 특선을…."
"다희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아마 가능할겁니다."
스칼렛과 레베카. 그리고 남다은과 릴리아나.
네 명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같이 부엌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