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4화 〉 404화. 학회 논문 발표
* * *
마법사 학회를 위해 대여한 호텔은 미국에서도 손가락에 드는 호텔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은 언제나 학회의 '원로'들에게 돌아갔다.
객실 번호가 적힌 판이 놓여있는 테이블.
그 위에는 고급 와인들이 늘어져있었다.
차기 학회장 후보 에이든은 그 앞에 앉아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임솔 같은 년이 최고의 마법사 타이틀을 갖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그래도 임솔을 무시할 순 없어. 결과를 중요시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보십시오. 마법사 학회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엄청나게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여자 주제에 자기 몸을 쓰지도 않고요."
"그렇지. 나도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아."
소파에 앉은 원로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들이켰고, 에이든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이 돼지 같은 자식들과 대화하다가는 혐오스러운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스윽
에이든은 준비했던 물건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번에 사업이 잘 풀리면서 최상급 마석이 꽤 들어왔습니다. 이게 다 원로님 덕입니다. 이건 제 성의입니다."
"허허, 역시 에이든 자네에게 조사팀을 맡기길 잘했어.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원로님을 서포트하며 이 학회를 바로잡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이번에도 내가 힘 써보도록 하지."
에이든은 품으로 마석을 챙겨가는 원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걸로 한 표는 챙겼어.'
매 년 마법사 학회에서는 가장 뛰어난 논문을 발표한 자에게 상을 수여했다.
아무 상품도 없는 허울뿐인 상이지만, 그 전통은 무시하지 못했다.
학회장이 되기 전에 하나 쯤은 받아놓는 게 좋겠지.
실제로 에이든이 준비한 마법도 자신이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건 임솔 뿐.
이렇게 원로의 표를 하나라도 챙겨놓으면 안심할 수 있다.
학회장 자리를 위해선 아서를 견제해야 했고,임솔도 그중 하나였다.
임솔은 너무나 뛰어났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학회에는 필요 없는 인재였다.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도 인정받지 않는 학회에 있는 걸 좋아하진 않겠지.
'그리고 이호연이라는 놈....'
임솔과 데뷔를 치르는 이호연이라는 남자 생도.
발표 며칠 전에 이름을 넣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임솔이 한참 마법사 활동을 할 때 만큼의 실적이었다.
임솔과 꽤 깊은 관계로 보였으니 잘못하면 아서 쪽에 힘을 더 실어줄지도 모른다.
'미국에 있을 때 처리해야 하나?'
에이든은 최근 알게 된 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밀 마법 결사를 운영하는 자신이 차기 학회장 후보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힘.
그건 갑자기 접촉해온 마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주 좋은 조건으로 자금과 힘을 제공했다.
조건은 가끔씩 정보를 제공하는 것 뿐.
그들에게 부탁을 해봐야할 지도 모른다.
"에이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자네도 마시게."
"아, 예. 알겠습니다."
에이든은 원로가 따라준 술을 들이키며 고민을 멈췄다.
*
호텔 로비 1층의 카페.
아서는 커피를 홀짝이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호연의 발표도 기대되는구먼."
"… 또 호연이 얘기에요?"
"이건 괜찮잖아.괴물 임솔의 제자인… 아니지. 미안하다."
"갑자기 뭐가 미안해요?"
"아니, 나도 너를 부르는 호칭을 좀 주의하기로 했거든. 이런 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신경 써야 하니까."
"…? 그냥 하던 대로 해도 괜찮은데."
임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말로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
아서의 말에는 악의가 담겨있지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아서는 임솔의 얼굴을 보고 잠깐 고민하다가, 재밌는 게 생각난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큭...."
"… 뭔데요?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임솔은 아서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보통 자신을 놀리기 직전이다.
"이야. 솔이는 정말 좋은 제자를 뒀어."
"갑자기요?"
"네 제자가 그러더구나. 자기 스승님한테 더이상 괴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그래서 나도 주의하려는 거야."
"…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크으, 이제 막 성인이 된 놈이 생각이 너무 성숙해. 내가 나이를 잘못 먹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
아서는 흐뭇하게 웃으며 임솔을 놀렸다.
그의 행동이 너무 대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솔은 아서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서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보이지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에가슴 깊은 곳에 숨겨놓은 감정이 다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임솔은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아. 괜찮냐?"
"모, 몰라요. 괜찮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나, 나는 일이 생겨서 가볼게."
아서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임솔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임솔은 아서가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두근 두근
'이게 뭐라고….'
별 거 아닌 말이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있었지만, 그 떨림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임솔의 마음은 스위트룸에 도착하고 나서도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슬쩍 인기척을 느껴보니 이호연은 아직도 연구실에 박혀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혹시나 집중을 깰까 봐 겁이 났다.
저 상태에 들어간 마법사의 집중력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으니까.
"으으, 아앙… 짜증 나."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다.
그런 부탁을 받았으면 조용히 할 것이지 왜…!
"후우…."
임솔의 마음에 이호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분했던 자신의 마음에 계속 돌을 던져대는 그의 얼굴이 임솔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임솔은 심호흡을 하며 마법진을 펼쳤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마법을 살피면 된다.
마법은 정의니까.
"마법진… 마법진을 확인하자."
제자는 원래 여자를 꼬시는 능력이 좋다.
아마 이것도 그 일환이겠지.
조용한 거실 안.
임솔은 마법진들을 전개하며 잡념을 지우기위해 노력했다.
예전부터 마법을 살피며 집중상태에 들어가면 쓸데없는 잡념은 잊혀지곤했다.
오늘도 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녀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않았다.
*
연구에 들어간 지 약 25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면서 이렇게 길게 집중한 적은 없었는데, 주인공 보정이라도 있는 건지 아직도 집중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아마 특전인 [뚜렷한 정신력]도 도움을 주고 있겠지. 이렇게 길게 집중해도 정신이 또렸했으니까.
이번 연구에는 내가 아는 마법 지식을 총동원했다.
룬의 결계로 영역을 다지고, [마력 감응]으로 내부의 마력을 컨트롤했다.
뛰어난 역산 능력으로 외부에서 침입하는 마법을 역산하고, 남는 마력을 장악하기 까지.
그 외에도 듣고 배우고 경험한 마법적인 모든 요소들을 다 활용했다.
이런 고차원의 마법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는데도, 의외로 어렵지않았다.
아마도 룬의 결계라는 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 완성."
──『마천궁(???)』 ──
▶ 고유 마법
▶ 자신의 마력 영역을 전개합니다.
영역 안에 있는 마력에 대해 매우 강한 지배력을 가집니다.
─────────────
"나 진짜 천재였네."
나는 내 재능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며,눈앞에 놓인 마법진의 자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마법보다 한 차원 높은 마법.
고유 마법으로 인식된 순간 완성이라는 뜻이지만, 나는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천궁 전개."
우웅
날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역장이 무형의 파동을 내뿜었고, 주변 공간을 장악하는 마력 파장은 내 주위를 돌며 영역을 구축했다.
"아직은 좀 머리가 아프지만… 괜찮아."
내 연산 능력으로도 살짝 부담될 정도의 성능.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당장은 학회에 발표할 만큼만 준비하면 된다.
이것도 아크처럼 쓰면서 익숙해져야겠지.
화르륵
나는 영역 내부에서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을 터트려보기도 하고, 이리 저리 움직여보기도 했다.
눈에 띄도록 빨라진 힘과 속도.
영역 내부에서는 내 마력을 사용할 때도 부가적인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에이든 그 놈이 만든 영역이 내 마법보다 강하진 않을거다.
이건 대충 봐도 엄청난 물건이거든.
아크와 조합하면 임솔 교수님과도 할만하지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자신감일 뿐이지만.
"... 일단 여기까지."
나는 마천궁을 해제하며 배를 쓰다듬었다.
마법을 완성하고 나서야 잊고 있던 피로와 배고픔이 몰려왔다.
하루만 이렇게 해도 죽을 거 같은데, 교수님은 어떻게 일주일이나 방에 박혀서 연구를 한 거야?
"일단 밥이라도 챙겨 먹자."
스마트 워치를 보니 시간은 새벽 1시.
학회는 지금 자고 일어나면 맞출 수 있을 거다.
자기 전에 배만 채워야지.
나는 오랜만에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앗."
덜그럭덜그럭
나는 부엌의 찬장에 박혀있던 초코바를 입에 쑤셔 넣었다.
지금은 조난 상황이나 마찬가지. 최대한 고열량을 때려 넣어야 한다.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오래 밥을 굶고나선 죽을 먹는 게 더 좋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초코바를 씹으며 잡생각을 이어갔다. 죽이 좋은지 초코바가 좋은지 뭐가 중요하겠어.
일단 뭐든 먹으니까 좀 정신이 든다. 특히 당을 먹으니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지이이이잉
"... 응?"
그리고 배가 좀 채워지니까 들려오는 소리.
바로 마법진이 작동하는 소리였다.
"뭐야. 교수님이 깨어있나?"
하긴 새벽 1시면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다. 깨어있어도 이상한 건 아니지.
나는 별 생각 없이 거실로 향했다.
"교수님? 뭐 하세요?"
내 예상대로 거실에는 퀭한 눈의 교수님이 앉아있었다.
역시 안 자고 있었구나.
임솔 교수님은 마법진을 살피고 있었는데, 하나도 집중하지 못하는 게 평소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임솔 교수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연구 끝났구나. 성과는 나왔어?"
"네. 당연하죠. 교수님도 안 주무시고 있었네요."
"...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나는 교수님의 옆에 앉았다.
이 사람 왜 이리 피곤해 보이지?
아니, 피곤한 게 아닌가?
생각할 거리가 있다고 하니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좋은 일이라서 그래."
임솔 교수님은 날 보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쌓였던 피로가 사라질 만큼 예쁜 미소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만든 마법이 엄청 멋있어요. 발표 전에 교수님한테도 보여드릴게요."
"으응. 고마워. 꼭 보고싶네."
"네. 그리고... 하암."
임솔 교수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려했는데. 나도 모르게 하품이 튀어나온다.
더 말하기에는 너무 졸렸다.
생각해보니 거의 이틀은 안자고 있었지.
"어우, 교수님. 제가 너무 피곤해서 자러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잘 거야?"
"네. 자야죠. 교수님도 같이 자요. 오늘 논문 발표도 있잖아요."
"... 그럼, 같이 잘까?"
"네네. 좋아요."
나는 교수님의 옆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도 잔다고 하니 나도 빨리 들어가야지.
길었던 연구의 대가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학회 전까지는 컨디션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네.
저벅저벅
"교수님?"
나는 내 뒤에서 걸어오는 교수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은 왜 자기 방으로 안 가고 내 방으로 오는거야?
"안 주무시려고요?"
"자야지."
"근데 왜 절 따라오세요."
"… 같이 자자고 했잖아."
"네?"
나는 그제서야 교수님이 말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하. 같은 시간에 자자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자자는 뜻이었구나.
…… 갑자기 왜?
"교수님?"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뭐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같이 왔는데 혼자서 너무 연구에 집중했나?
아니, 그런 걸 신경쓸 사람도 아니잖아.
애초에 만약 그렇다해도 내 방에서 같이 잘 이유는 없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임솔 교수님은 먼저 침대로 향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