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 403화. 아메리칸 드림 (5)
* * *
"다시 말하지만 나도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괜찮아요."
내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자 아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으음. 영역 구축이다. 자신의 주변에 영역을 펼쳐 들어오는 마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법일 거다. 더 자세한 건 몰라."
"영역 구축… 그게 있다면 학회장 님의 말처럼 마력의 속도나 힘에서 앞서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론상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게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에이든 그놈도 오랫동안 준비한 마법이니까. 고유 마법이라는 건 그런 거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이어갔다.
에이든이 정치를 잘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결과 그렇게 평정심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자존심이 강한 타입을 건드리긴 쉽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코를 깔아뭉개는 것.
'그때 반응을 살펴보자.'
즉시 반응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어떻게든 수상한 점을 찾기만 하면....
'죽는 거야.'
그놈의 미래는 그때 결정하면 된다.
나는 초코 라떼를 마시는 교수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교수님. 저희 논문 발표가 언제죠?"
"내일 모레. 목요일이야."
"이틀이면... 시도는 해봐야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이틀 동안 에이든의 마법을 재현할 생각이냐?"
"설마요. 저도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뭐야. 맥 빠지는구만."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아서에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아서를 완전히 믿을 순 없거든.
아무리 교수님과 친한 사이여도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내가 완전히 믿는 건 임솔 교수님뿐이다.
그리고, 재현하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에이든의 마법을 똑같이 발표해도 꽤 타격이 있겠지만, 이왕이면 압도적으로 해야겠지.
모두의 앞에서 창피를 줘서 자존심을 짓밟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반응을 볼 수 있을 거다.
내가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교수님은 아서와 대화를 시작했다.
"아저씨. 비밀 마법 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지금도 조사하고 있다. 꼬리가 잘 잡히지 않아. 다만 이상할 정도로 자금 규모가 크더군. 분명 어딘가에서 지원을 받는 모양인데... 자금의 출처를 모르겠단 말이지."
"조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요?"
"마법사 학회에서 주도하고 있다. 조사팀이 따로 있거든."
"학회 놈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하나 봐."
"그럴지도 모르겠군."
쪼옥 쪽
임솔 교수님은 고개를 저으며 초코라떼를 빨았지만, 나는 둘의 대화를 들을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차기 학회장인 에이든이 그쪽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조사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들.
물론학회장에게 학회의 부패를 묻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임솔 교수님은 초코 라떼를 다 먹고나니 흥미가 떨어진 듯 말했다.
"호연아. 이만 갈래? 이 아저씨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은데."
"... 무슨 소리냐. 괴물인 너보다 더 엄청난 제자를 데려와 놓고."
"칭찬 고마워. 아저씨."
"그럼 이제 슬슬 가보겠습니다. 학회장 님."
"음. 그래. 혹시라도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나자."
나는 학회장에게 인사를 했고, 임솔 교수님은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아서도 남은 커피를 원샷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마친 단 둘이 됐으니 말해야겠네.
"학회장님. 계속 교수님을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학회장이 나와 신뢰 관계를 쌓은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교수님을 챙겨준 건 사실이니까.
예비 남자친구로서 충분히 감사해야지.
"그래. 나도 솔이를 잘 부탁하마. 너 같은 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아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히 나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
하지만 나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원래 쓴 말을 하기 전에 칭찬을 해줘야 하는 법이거든.
"네. 그런데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뭐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괜찮지."
"교수님에게 괴물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무뎌졌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부탁드립니다."
사실 아서를 만나고 나서 계속 신경 쓰였다.
둘이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꼭 한번은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오지랖일 수도 있다.
나는 둘이 쌓아올린 관계를 알지못한다.
그리고 임솔 교수님은 학회장과 오래 알고지내며 어떤 호칭이든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원래 남이 부르면 화나는 별명도 친한 친구가 부르면 화가 안 나는 법이니까.
'그래도 내가 싫어.'
하지만 그게 알바야? 내가 싫은데.
예비 여자친구한테 괴물이라니, 너무하잖아.
이런 건 주변 사람들부터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내 말을 들은 아서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 계속 솔이의 곁에 있어 주렴. 이호연 생도. 솔이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걱정하지 마세요. 가라고 해도 안 갈 거니까."
나는 아서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믿어도 되는 사람이네.
역시 임솔 교수님의 눈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이러면 슬쩍 말을 꺼내 볼까.
"학회장님. 목요일에 교수님의 발표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거 발표 순서가 어떻게 돼요?"
"아마 솔이는 마지막이겠지. 학회의 하이라이트나 마찬가지니까."
"... 그럼 그 뒤에 이름 하나만 더 넣어주세요."
나는 비장의 전략을 쓰기로 했다.
배수진(???).
원래 사람은 마감이 다가오면 없던 힘이 생기는 법이다.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일정을 잡아버리면, 어떻게든 해내겠지.
*
아서와 헤어진 나와 교수님은 다시 스위트 룸으로 돌아왔고, 나는 교수님에게 폭탄선언을 날렸다.
"교수님. 지금부터 제자가 연구에 들어갑니다."
"연구? 혹시 아까 얘기했던 그거야?"
"네. 진짜 대화를 들으셨네요? 하품하길래 안 듣는 줄 알았어요."
"... 들었다고 했잖아."
"아무튼, 앞으로 이틀이잖아요. 노력을 해보려고요."
"사실 에반인지 에이드인지의 마법을 왜 만드려는 건 지 모르겠지만… 연구가 이틀 만에 될까?"
"안 되면 아크라도 팔아먹죠. 뭐."
이미 학회장님에게 부탁해 자리를 만들어놨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발표는 해야 한다.
이틀동안 했는데 안되면 아크라도 팔아먹지 뭐.
나는 교수님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제가 없어도 외로워하지 마시고요."
"그래. 화이팅.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알겠습니다."
나는 교수님의 응원을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폐관 수련이다."
짝짝
나는 손뼉을 치며 정신을 각성했다.
시간이 이틀 밖에 없긴 하지만, 사실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마법 연구에 진심을 내본 적이 없었거든.
매일같이 마법을 수련하긴 했지만, 완전히 마법 연구에만 집중하며 매달려본 적이 없었다.
일단 챙겨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뭐만 하면 사건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마법 수련은 언제나 남는 시간에 진행했다.
'이번엔 정말 마법에만 집중할 수 있어.'
마침 챙겨야할 사람도 없는 지금. 내 한계를 테스트해볼 기회다.
게다가 영역에 대한 마법이라면 자신도 있었다.
결계마법 중에 최상위인 룬의 결계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계획서부터 만들어볼까."
룬의 결계를 응용한 영역 지배.
기본 틀은 룬의 결계로 잡으면서 내부 마력의 지배력을 높이면 된다.
[마력 감응]을 이용해 외부의 마력을 컨트롤하는 힘을 늘리면....
'이랬는데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하지?'
계획서를 작성하다 보니 문득 생각났다.
사실 에이든이 백 퍼센트 나쁜 놈이라는 법은 없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가끔은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 낮은 확률로 그저 학회장 자리를 바라보는 순수한 청년일지도 모르지.
"그럼 아쉬운 거지 뭐."
나쁜 놈이 아니면 어때.
임솔 교수님에게 추파를 던진 것부터 죽일 놈인 건 확정.
그래도 나쁜 놈이 아니면 목숨은 살려주자.
"... 아."
그리고 임솔 교수님을 생각하니 또 하나가 생각이 나버렸다.
오늘 밤에 교수님한테 한 발 빼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는데. 젠장.
지금이라도 나가서 한 발 빼고 연구를 해야하나?
"아니야. 집중하자. 지금 그만두면 흐름이 끊겨."
나는 머리를 휘휘 젓고 잡념을 지워내고마법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
수요일 오후.
이호연이 방에 처박힌 지 약 20시간째.
임솔은 1층 카페에서 아서와 만나고 있었다.
"밥도 안 먹고 방에 틀어박혔어요. 나한테는 몸 좀 챙기면서 연구하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그랬구나. 우리 솔이가 많이 외로웠겠어."
"아니거든요. 아저씨. 이상한 소리 하면 나 갈거야."
"허허. 미안하다. 하지만 카페에 앉아 이호연 얘기만 3시간째 듣고 있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주렴."
"... 3시간이나 됐다고? 언제 시간이 그렇게 됐지."
임솔은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까.
별로 대화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글쎄다. 나야 모르지. 갑자기 자랑스러운 제자와의 첫 만남 얘기를 시작한 건 누구일까."
"... 나 갈테니까 계산해. 아저씨."
"솔아. 미안하다. 솔아!"
아서는 돌아가려는 임솔을 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사이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젊은이들의 사랑은 어려운 법.
'가끔은 나 같은 아저씨가 도와주는 게 맞아.'
아서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솔에게 말을 건넸다.
"솔아. 그 정도면 받아주지 그러냐."
"받아주긴 뭘 받아줘."
"이호연 말이야. 누가 봐도 널 좋아하는 게 보이던데."
"...."
"그 정도면 건실한 청년이잖아. 여자한테 인기많을 얼굴이긴 하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고."
"호연이를 하나도 모르시네요."
임솔은 입맛을 다셨다.
사랑스러운 제자의 유일한 단점이 여자가 많다는 거였다.
"그래? 의외구만. 그래도 젊을 때니까 그렇게 노는 거야. 그것도 한때다. 결국은 너한테 오겠지. 임솔보다 좋은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 그래도 안 돼요."
아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임솔을 좋아하긴하지만, 슬슬 답답함을 느꼈다.
물론 이호연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사람의 취향은 여러 가지고, 아무리 괜찮은 남자라도 자신이 싫으면 싫은 법.
하지만 그렇다면 확실히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호연도 포기할 수 있는 거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싫으면 싫다고 확실히 얘기해야 이호연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법이다.혹시 20살에 말하던 것처럼 '나보다 강한 남자만 인정하겠다.' 이런 건 아니지?"
"... 그게 뭐가 나쁜데요."
임솔은 불만이 있는 눈으로 아서를 쳐다봤고, 아서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정말이냐? 그래서 그놈이 그렇게 강해지려고 하는 거야?"
"......."
임솔이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아서는 입을 벌리는 거로 모자라 양 손으로 책상을 잡고 일어났다.
"솔아! 그건 학대야 학대. 새싹을 짓밟는 일이라고. 이호연은 앞으로 마법사 세대를 이끌어갈...."
"아으. 정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버려둬요. 이제 호연이 얘기 금지!"
"쩝. 알겠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호연의 얘기를 시작한 건 임솔이었지만, 아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천재 마법사가 여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놀리는 건 생각보다 재밌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