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399화. 아메리칸 드림
* * *
아이린 : 그 때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어.
"… 진짜 왔네."
나는 스마트 워치를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이린에게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마침 아이린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었으니, 타이밍은 좋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하루만 일찍 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아이린과 만나서 뭐라도 할 수 있었겠지.
당장 내일이면 미국으로 출국하는데, 오늘 밤에 연락을 보내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나 : 죄송하지만 제가 내일 출국이거든요. 미국에 갔다 와서 얘기해요.
아이린 : 뭐? 어째서?
나 : 미국에서 열리는 마법사 학회에 가야 해요. 다시 입국하면 연락드릴게요.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아이린에게 연락을 보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저 연락을 보냈을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절당했으니 그녀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네.'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아이린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물론 동생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정상은 아니지만… 그게 그녀의 잘못으로 생긴 마음은 아니니까.
아이린도 피해자일 뿐이다.
"어떻게 된 게 아이린한테는 계속 나쁜 짓만 하는 거 같아."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이린을 공략하려면 무조건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었다.
엘리스는 원작에 있는 히로인이다.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면서 새로 생긴 히로인이 아닌, 원작의 히로인인 엘리스는 무조건 공략해야 했다.
그러니 아이린을 대하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관계가 삐뚫어지거나, 아예 내 편으로 만들거나.
나는 그 중 후자를 선택했고, 그 과정이 조금 험난할 뿐이다.
'엘리스랑 같이 밤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엘리스와 아이린이 같이 섹스를 하는 게 제일 보기 좋을 것 같은데.
'3p 요구?'
이건 좀 그렇다.
엘리스의 성격상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사실 네 언니가 널 좋아했다고 고백?'
이건 더 이상하다.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 테니까.
'역시 내가 쓰레기가 되어야 하나.'
이미 너무 쓰레기긴 하지만, 아이린의 이미지도 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이린의 호감도도 올려줘야 하고, 언제까지 엘리스에게 숨길 수도 없다.
"그래. 내가 희생하지 뭐."
쓰레기 취급은 익숙하다.
한 두 번 더 쓰레기가 되는 수 밖에.
나는 아이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짐을 챙겼다.
내일이면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히로인들과 인사도 모두 마쳤으니 이제 마법사 학회에 집중해야겠지.
*
월요일 아침.
공항으로 향하려는데 릴리아나가 내 팔을 잡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흑흑…."
"넌 왜 그러는데."
"널 위해 울어주는 여자가 있으면 기쁘지 않아?"
"아니, 가슴 아프니까 그러지 마."
"알겠엉."
나는 우는 척을 하는 릴리아나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몸을 돌렸다.
우는 척 하는 걸 알면서도 저러니까 괜히 슬프네.
남다은과 스칼렛 그리고 레베카는 날 보며 나란히 서 있었다.
어제 밤에 같이 저녁 먹고 인사도 했으면서 부담되게 왜 다들 서 있는 거야.
"다들 빨리 들어가요. 왜 다 나와 있어요."
"적어도 당신의 마지막 모습은 보고 싶으니까요."
"아니, 누가 보면 죽는 줄 알겠네. 일주일이면 온다니까."
"애기 아빠. 내가 연락할게. 마법에 대한 성과도 중간중간 공유할 거야."
"네. 미국에 가서도 도울게요."
나는 한 명 씩 붙잡고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은 남다은.
남다은은 인사 대신 내게 다가와 옷을 정리해줬다.
학회에 가는 거라 정장을 좀 차려입었는데, 남다은은 조용히 내 옷을 정돈해줬다.
"고마워."
"잘 다녀와. 호연아."
"응. 빨리 올게."
남다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남다은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더 있다가는 출발도 못하겠어. 억지로 몸을 움직여야지.
"자자, 일하고 올 테니까 다들 집 잘 지키고 있어요."
"잘가~! 올 때 미국 햄버거 사와!"
뒤에서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걸 들으며 빠르게 바깥으로 나왔다.
'… 뭔가 찝찝하네.'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떠나기가 힘들다.
이게 집이 있다는 느낌인가.
마음 같아선 더 길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저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다같이 이별 섹스라도 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나는 공항으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
"의외로 공항은 여기가 더 작은 것 같기도 하네요."
"너무 기대하지는 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나와 임솔 교수는 공항의 입국 게이트를 지나 나란히 걸었다.
미국에 처음 와봤는데, 뭔가 건물이 큰 것 같긴 하지만 딱히 특이한 건 없네.
나는 교수님을 따라가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숙소로 가야지. 매 년 학회에서 제공하는 곳이 있어."
임솔 교수님은 캐리어를 질질 끌며 스마트워치를 보고 있었다.
학회에서 제공하는 숙소가 있다는데, 들어보니 5성급 호텔을 마법사 학회를 위해 통째로 빌렸다고 한다.
확실히 세계에서 마법사 학회가 가지는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동네 학회랑은 수준이 다르다.
"여기야."
"와…."
무슨 호텔이 이렇게 크냐.
난 눈을 끔벅거리며 교수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로비에서 학회에 초대받은 초대장을 내밀자 로비에 있던 안내원이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마 저걸 방에 찍고 들어가는 거겠지.
"가자."
"네. …네?"
임솔 교수님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도 빠르게 뒤에 따라붙었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방이 하난데?'
설마 합방?
당연히 다른 방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벌써 오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임솔 교수님에게 말했다.
"교수님."
"응?"
"그, 방이 하나인데 괜찮아요?"
그래도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보다 지금 말해놓는 게 낫겠지.
내 말을 들은 임솔 교수님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귀여운 고양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스위트 룸을 안 써봤구나?"
"스위트 룸이요?"
뭐야 그게. 달콤한 방이야?
마카롱이라도 주는 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평생 방 하나밖에 없는 모텔만 가봤는데, 고급 호텔은 거실과 침실이 따로 있구나.
심지어 침실이 두 개였다.
이러니까 교수님도 별 말을 안 한 거였어.
나는 창피함을 느끼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 그래도 같은 집에서 지내는 게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예 다른 방에서 지내는 것 보다 훨씬 보기 편하다.
그때, 먼저 짐 정리를 끝낸 교수님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많이 남았어?"
"아니요. 거의 다 했어요."
"그럼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갈래?"
"누구요?"
"마법사 학회장."
"… 학회장이요? 아서 케네디 말하는거에요?"
"응."
아서 케네디.
마법사 학회의 학회장이다.
마법사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강함은 물론이고 인성까지 겸비해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마법 연구 분야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다.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마법사 학회장을 맡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
근데 그런 사람이 왜 임솔 교수 님하고 아는 사이지?
"아서 케네디하고 아는 사이에요?"
"그러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니죠. 근데 학회 사람들은 다 싫다고 하셨잖아요."
임솔 교수님은 마법사 학회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증명해서 그들의 콧대를 눌러주려는 게 임솔의 방식이었으니까.
근데 그들의 대표인 학회장과 개인적으로 보는 사이라니 좀 이상하잖아.
"다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아저씨하고는 원래 아는 사이였거든. 아무튼, 너도 보러 갈래?"
"저요?"
"응. 아저씨가 너를 한 번 꼭 보고 싶다던데?"
"어…."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만나서 손해 볼 게 없으니 한 번은 봐야겠지.
교수님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내 예비 여자친구인 임솔 교수님 옆에 이상한 놈이 붙어있지는 않나 확인도 해봐야지.
"그럼 가요."
"좋아. 짐 정리하고 따라와."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향한 곳은 로비에 붙어있는 카페.
카페에 들어가자 구석진 자리에 중년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저 분 맞아요?"
"맞아."
꽤 잘생긴 중년 남자.
그는 이 쪽을 알아보더니 손을 흔들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솔아. 오랜만이구나."
"아저씨.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임솔 교수님하고 친한 사람들은 다 솔이라고 부르네.
애칭 같은 건가?
솔직히 귀엽다.
솔이라니, 나도 불러보고 싶어.
"섭섭하게 또 그런 말을… 아, 그 쪽이 2대 천재 마법사 이호연 맞지?"
"처음 뵙겠습니다."
꾸벅.
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학회장에게 인사했다.
2대 천재 마법사가 뭔 지는 몰라도이 남자는 딱히 악평이 없는 사람이다.
잘해주면 떡고물 하나라도 떨어지겠지.
"이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유망주를 보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
"아저씨 같은 표현 쓰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일단 앉아. 급할 거 없잖아."
나와 교수님은 의자에 앉아 아서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아서는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무슨 일이 생겨서 제자를 만들었나 했는데 이 정도면 이해할 수 있겠어."
"그것 때문에 제자를 보여달라고 한 거야?"
"만약 여자였으면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다. 혹시 잘생긴 남자한테 홀린 건 아닌가 해서 그랬지."
"내가 알아서 할거거든."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단순히 지인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 깊은 사이인 모양이네.
약간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였다.
'교수님의 부모님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서가 부모님이 아닌 건 확실한데, 아마 어릴 적부터 돌봐준 사이아닐까.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음, 그러니까 이호연 생도라고 불러도 되겠지?"
"편한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좋아. 이호연 생도. 내게 마법을 배울 생각 없나?"
"… 마법이요?"
아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솔이의 제자라길래 상태가 괜찮으면 나도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내게 마법을 배워보지 않겠어?"
"어…."
이건 좀 고민해야겠는데.
학회장에게 느껴지는 마력은 확실히 강했지만, 임솔 교수님보다는 약했다.
그의 전성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이미 현역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학회장 자리를 맡고 있으니까.
'과연 도움이 될까.'
나는 슬쩍 임솔 교수님에게 시선을 보냈다.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교수님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겠지. 우리 제자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거야."
"그래요?"
"응. 내게 마법을 알려준 것도 아저씨였거든.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잘 잡아주니까 너 한테도 약간은 도움이 될걸?
나는 내심 깜짝놀랐다.
임솔 교수님에게 마법을 알려준 게 아서라니.
그럼 엄청난 사람 아니야?
"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음, 미국에 있는 동안 몇 번 지도를 해주지."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이 보증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어쩌면 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제자 때문에 부른 거야?"
"그럴리가. 솔이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거든."
아서는 웃으며 날 바라봤다.
이거 혹시 나는 잠시 빠지라는 뜻인가?
"저는 먼저 올라가 있을까요?"
"응. 가서 짐 정리라도 하고 있어."
"다음에 내가 솔이를 통해 연락하마. 이호연 생도."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먼저 카페를 빠져나왔다.
둘이 하는 얘기가 궁금하긴하지만 교수님도 저러는 걸 보면 엄청 중요한 얘기인 모양이다.
'아서….'
마법을 알려준다라…왠지 기대가 된다.
어쩌면 임솔 교수님을 이길 수 있는 힌트가 될 지도 모르니까.
다음 만남이 기대가 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