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 375화. 기말고사 (4)
* * *
루시와 루미는 신난 듯 날 자리로 이끌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이리 와. 여기 앉아."
"루시, 다은 양이 있는데 호연 씨가 우리 사이에 앉으면 안 되지 않을까?"
"앗… 그럼 어떡하지? 시간제로 해야 하나?"
"나는 괜찮아."
"다은 양… 고마워요."
남다은은 선심쓰듯 루시와 루미에게 내 옆자리를 양보했다.
루시와 루미는 남다은에게 감사하며 기쁘게 내 옆에 앉았는데, 그러면서도 남다은한테 미안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 이러니까 좀 미안하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남다은과는 어제 충분히 즐겼으니 루시와 루미에게도 신경을 써줘야겠지.
"루시는 오랜만에 봐도 귀엽네. 잘 지냈어?"
"으응… 어제 바로 만나러 오지! 어제는 뭐 했어."
"미안. 돌아온 날은 정신이 없었거든. 시험 준비도 해야 했고."
"괜찮아요 호연 씨. 루시도 말만 저렇게 하지 다 이해할 거에요."
"루미…!"
"루미도 오랜만에 보니까 기분이 좋다."
"고, 고맙습니다…."
루시는 주먹을 쥐고 루미를 바라봤다.
둘은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사이가 좋네.
루시와 루미가 대화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었다.
"근데 셋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화도 안 하던 사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친해졌지?
루시는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으음, 그냥? 같이 밥 먹다 보니까 친해졌어."
"루시랑 루미랑 호연이 얘기도 많이 했어."
"오… 그래?"
다행이네.
남다은도 아카데미에서 친구가 생겼구나.
그게 루시루미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이 더 낫긴 하지.
적어도 안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오늘 시험 끝나고…."
루시의 말이 끝나기 전, A클래스의 앞문이 열렸다.
드르륵
"좋은 아침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구나."
교실로 들어온 건 김진혁 교수.
나 때문에 일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 다크서클이 진해 보였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은 마법학 시험이다. 필기시험 이후에는 팀마다 나뉘어서 실기 시험장으로 향한다. 시험 일정은…."
김진혁 교수는 일정에 대해 말을 이었다.
나는 일정을 알고 있었으니, 슬쩍 옆에 있던 루시와 루미의 손을 잡았다.
"이따가 보자. 시험이 늦게 끝날 수도 있긴 한데, 동아리 방에 꼭 들를게."
"으응."
"네엣…."
*
오전 시험인 마법학 필기시험이 끝난 후.
슬프게도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지는 못했다.
자투리 시간에도 시험을 봐야 했거든.
"… 엘리스, 나 배고파."
"밥 안 먹고 왔어?"
"대충 먹고 왔는데도 배고파."
"…."
편의점에서 가볍게 떼우고 왔더니 배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배고파서 엘리스에게 달라붙었는데, 엘리스는 내 투정을 무시하고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잘 받아줬던 거 같은데. 벌써 무시하기 시작했구나.
"벌써 마음이 식었구나. 장난도 안 받아주고."
"… 여긴 아카데미야. 품위를 지켜야지."
내가 서운한 듯 말하자 엘리스는 그제서야 책을 덮었다.
마치 어린 애를 달래주듯 날 바라봤는데, 저렇게 반응해주니까 재밌어서 계속하고 싶네.
"교수님 올 때까지만 놀아주면 안 돼?"
"… 뭐 하고 싶은데."
"몰라."
"하아…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니야. 심심해서 그래."
나는 답답해하며 눈을 질끈 감는 엘리스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래도 짜증을 내지 않아서 고맙네.
"다 좋은데 혹시라도 남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가만히 있어주면…."
드르륵
그때, 교수님이 시험지를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시험 시작할까요?"
"후우…."
엘리스는 답답함을 풀지못해 한숨을 푹 쉬었고, 나는 그 옆에서 웃으며 시험지를 받았다.
*
"호연 씨,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에요…."
"잘 할 수 있을 거야. 루미."
"맞아. 임솔 교수님 시험은 실력만 좋으면 되니까."
남다은은 마법사가 아니기에 다른 시험장으로 갔고, 나와 쌍둥이는 같은 시험장으로 향했다.
임솔 교수님이 주도하는 마법학 실기 시험이다.
무슨 시험을 일주일이나 하냐고.
그래도 오늘이면 끝나잖아. 서바이벌보다는 훨씬 낫다.
이따 노래방이나 가자.
생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괜히 나도 시험이 끝나는 거 같아서 설레는 기분이 든다.
나도 대학생 일때는 그저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에 즐거워 했었지.
아쉽게도 시험이 5과목이나 남아있어서 저 생도들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잡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루시와 루미는 대화를 이어갔다.
"으으… 하지만 필기가 너무 어려웠어. 루시."
"임솔 교수님 시험은 악명이 자자하잖아. 만점자가 호연이 밖에 없으니까."
"대단해요. 호연 씨…."
"… 나중에 같이 공부하자. 내가 알려줄게."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는 루미를 보며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마법학 필기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를 내가 냈으니 당연한 거지.
'내가 안 냈어도 만점이었겠지만.'
나와 루시루미 쌍둥이는 잡담을 하며 실기시험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하늘색 로브로 몸을 덮고 있는 임솔 교수님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있었다.
와… 진짜 예쁘시다.
그러게. 저번 주에 갑작스럽게 출장을 다녀오셨다는데, 저렇게 예쁘면 남자친구도 있겠지?
빅토리아 아카데미 교수가 어떻게 남자친구를 사귀어. 연구에 시험문제 출제에 엄청 바쁠걸?
그런가…. 나도 꼭 저런 교수가 되고 싶다.
옆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생도들을 나도 모르게 쳐다봤다.
'… 예쁘다고 다 잘하는 줄 아는 세상이 잘못됐어.'
저런 생도들한테 임솔 교수님의 평소 행실을 보여줘야 할 텐데.
마법과 예쁜 외모 빼고는 배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심지어 너희가 방금 풀었던 시험도 내가 낸 거야….
"하아…."
"호연 씨.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시험이 걱정돼서."
가슴이 답답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우리 교수님의 명예를 직접 실추시킬 수는 없으니 입단속을 해야지.
"다 모였나? 마지막 시험이라 다들 힘이 넘치네."
또각또각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생도 쪽을 둘러보던 임솔 교수님은 날 보고는 슬쩍 눈인사를 했다.
기대하지도 않던 인사가 오니 약간 당황했지만, 나도 대충 고개를 숙였다.
좀 감동이네.
"시험은 알지? 한 명씩 나와서 내가 시키는 대로 맞추면 돼. 각자 수준에 맞게 알아서 정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험 방식은 단순했다.
한 명씩 나와서 임솔 교수님이 시키는 과제를 완수하는 것.
사람 보는 눈, 특히 마법사 보는 눈이 완벽한 교수님이라면 생도들의 수준에 맞게 내줄 수 있겠지.
"다음. 남상윤."
시험은 곧바로 시작했고,나는 대기석에 앉은 채 다른 생도들의 시험을 구경했다.
단순히 멀리 쏘는 게 아니라 시험자에게 맞는 수준의 강도와 거리를 정해줘서 기량 상승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아… 너무 어려워요. 교수님."
"네 마력이면 이 정도 수준은 쉬워야 해. 훈련이 부족했네."
"아니, 교수님…!"
"다음."
몇몇 생도는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임솔 교수님의 단호한 말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 이후로도 많은 생도들이 임솔 교수님의 독설에 상처를 받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새 모든 생도들이 시험을 마치고, 남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다음. 이호연."
"호연 씨…! 힘내세요!"
"이호연 화이팅!"
"고마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내 시험 순서는 마지막.
분명 임솔 교수님의 의도겠지.
시험장에 올라오자 불만족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는 교수님이 보였다.
"교수님. 너무 빡빡하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도 보일 거 아니야. 다들 훈련 부족이야."
"… 교수님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있는 교수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시무룩한 표정의 생도들이 보였다.
수백 명이나 대기석에 앉아있었지만, 저 중에서 시험을 통과한 건 몇 명 되지 않았다.
교수님과 생도가 생각하는 노력의 기준이 다르니 어쩔 수 없겠지.
"아무튼, 우리 제자가 통과 못 하면 안 되겠지?"
"살살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1등 주실 거잖아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노력."
임솔 교수님은 즐거운 듯 웃었다.
시험 내내 지루한 표정이었는데 저렇게 웃는 걸 보니 괜히 즐겁네.
교수님의 소중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최선을 다할게요."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교수님의 장난에 맞춰줬다.
*
"드디어 끝났네. 아으…."
나는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기지개를 켰다.
마지막 시험은 엘리스와 다른 과목이라 따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내 일정을 배려한 교수님들이 모두 풀기만 한다면 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역시 실습이 제일 재밌긴 했어."
임솔 교수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꽤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과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게 어찌나 귀엽던지.
필기 시험은 내가 아는 정보를 정리하는 느낌이라 지루하기만 했다.
이미 다른 생도들은 집으로 돌아갔을 시간.
나는 복도에 잠시 서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 왜 답장이 없냐."
다들 뭐 하길래 연락을 안 받지?
수린 누나는 아직도 일이 안 끝난 것 같고, 백아영도 바쁜 것 같았다.
오늘 안에 만날 수 있으려나.
"루시랑 루미는 왜 답장이 없는 거야?"
수린 누나와 백아영은 확실한 일이 있는데, 쌍둥이들은 왜 연락을 안 받는걸까.
일단 동아리방에 가서 기다릴까.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바쁜 것 같으니 시간을 떼우기 좋은 곳으로 가야한다.
건물에서 나와 동아리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시험이 끝난 아카데미는 조용했다.
아마 다들 놀러 간 거겠지.
'루시루미를 만나고 수린 누나까지 만나면 되겠네.'
동아리 건물 꼭대기에 학생회가 있으니 딱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보는 동아리 방들을 지나서 우리 방 앞에 서자,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렸다.
마구 뛰어다니는 것 같은 분주한 소리들.
루시랑 루미가 이미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럼 왜 연락을 안 받았지?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웬 풍선 같은 게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맛있어 보이는 딸기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엥?"
"어… 호연 씨…?"
이게 뭔가 싶어서 얼빠진 소리를 내자,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침대에 이불을 펴고 있던 루미였다.
루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으, 으음… 일찍 오셨네요. 시험이 많이 남았다고 하셨는데."
"응. 생각보다 시험이 빨리 끝났거든. 근데 이 케이크는…."
"루미! 여기 이불이… 엥? 이호연?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시험이 일찍 끝났어. 둘은 뭐 하고 있었어?"
"… 어. 복귀 파티?"
"복귀 파티?"
나는 화려해보이면서도 엉성한 동아리 방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복귀 파티면 날 위해서 한거잖아.
루시와 루미는 서로 마주 보더니 헤헤 웃으며 말했다.
"응. 오랜만에 보니까 서프라이즈로 축하하고 싶었거든…. 들켜버렸지만."
"헤헤…. 호연 씨. 놀래키고 싶었는데."
"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쌍둥이를 보니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난 별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루시와 루미는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구나.
나는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루시와 루미는 아니다.
그녀들은 나를 제일 좋아하고 있겠지.
루시루미 뿐만이 아니다.
모두들 나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거다.
"…루시, 루미. 고마워. 정말… 음, 고마워. 진짜 감동이야."
"정말요?! 다행이다… 루시랑 저랑 엄청 준비했는데…."
"맞아. 이 케이크 예약이 얼마나 힘든데!"
"… 그래? 같이 먹자."
물론 이게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부분은 날 여기 끌고온 신을 탓해야겠지.
그래도… 지금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루시와 루미에게 집중해야겠다.
그게 내가 질 수 있는 책임이다.
"초라도 붙일까?"
"네! 제가 초도 사 왔어요."
"그럼 나는 이불을 깔고 있을게."
"… 이불은 뭐 하려고?"
"헤헤… 호연 씨."
"너도 알면서…."
"일단 파티라도 하고 하는 건 어떨까…?"
나는 잔망스럽게 웃으며 양 팔에 달라붙는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