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 360화. 마지막 밤 (2)
* * *
수요일 저녁 시간.
원래는 엘리스와 만나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가족과 저녁 약속이 생겼다고 해서 숙소에서 여자들과 밥을 먹기로 했다.
스칼렛이 추천하는 맛집메뉴를 포장해와서 먹고 있는데, 역시 프랑스 사람이라 그런지 맛집을 잘 알았다.
나는 얼마나 맛있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릴리아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좀 먹어. 릴리아나."
"마지막 프랑스 음식이니까 많이 먹어둬야 해!"
옴뇸뇸뇸.
릴리아나는 바게트를 입에 집어넣으며 남은 손으로 치킨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된게 볼 때마다 폭식을 하는데 저 몸매가 유지되는 걸까.
그게 제일 미스터리란 말이지.
"릴리아나 님. 내일 아침에 드셔도 되니 무리하지 마세요."
"앗. 그렇구나!"
"여기는 항상 분위기가 밝아서 좋네. 애기 아빠 여자친구들은 다들 이래?"
"… 다들 강한 특색이 있어서요."
나는 시끌시끌한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빵을 집어 먹었다.
조용한 것보단 말이 많은 게 좋지.
특히 릴리아나가 분위기메이킹을 해줘서 참 좋았다.
어느새 여자들끼리도 친해진 것 같고.
'엘리스는 뭐 하고 있으려나.'
가족과 식사라고 하던데, 아이린이랑 먹는 건가?
어쩌면 아이작도 같이 먹으려나.
괜히 내 얘기가 나와서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좋겠다.
아직 그 아저씨는 무섭거든.
"안 먹을 거면 내가 빵 먹어도 돼?"
"그래. 많이 먹어라."
릴리아나에게 내 접시를 밀어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되었으니 엘리스를 만날 준비를 해야겠지.
"난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
"웅. 갔다 와."
"다녀오세요."
"우리 애기 아빠는 항상 바쁘네."
"금방 올게요."
나는 식사중인 여자들을 내버려두고 먼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조금 미안했는데, 다들 신경안쓰는 걸 보니 나만 예의를 차린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7시 30분.
엘리스와 8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씻기 귀찮네…."
물론 귀찮아도 안 씻을 순 없다.
거기서 냄새가 나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
나는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들어갔다.
*
이호연은 약속 때문에 식사를 빠르게 끝냈으니,자연스럽게 남은 세 명은 아직도 식사 중이었다.
예쁜 모양의 계란을 입에 넣은 릴리아나는 눈을 찌푸렸다.
"으음. 프랑스 계란후라이는 맛없어."
"아마 간이 약하게 돼서 그럴 거야. 베이컨하고 같이 먹어봐."
"아하. 그렇구나. 베이컨은 엄청 짰어."
"레베카 님. 커피라도 드시겠습니까."
"주면 고맙지. 스칼렛 양."
처음엔 이호연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어색했지만, 이제는 여자끼리도 서로 익숙해졌다.
이호연이 없어도 잡담을 나눌 정도로 친밀해진 것이다.
"스칼렛 양은 커피 타는 데에 재능이 있어. 예전에 있던 비서는 이렇게 못했거든."
"아이리스 길드 막내 시절에는 하루에 100잔을 탄 적도 있습니다."
레베카는 스칼렛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릴리아나가 남은 음식들을 와구와구 처리하고 있을 때.
스칼렛은 커피를 홀짝이는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레베카 님은 일족을 복원하는 게 목표라고 했었죠. 남은 일족이 레베카 님 한 명뿐이라 재능있는 호연 님을 노리고 있는 거고요."
"으음. 긴 사정이 있지만 요약하면 그렇긴 하지. 근데 스칼렛 양. 나랑 동갑 아니야? 말 편하게 해도 되는데."
"이미 존댓말이 입에 붙어서요. 반말은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스칼렛 양이라고 부르는 건 뭐죠?"
"스칼렛 양이 나보다 선배니까. 대우해주는 거지."
"…."
근데 왜 릴리아나 님에게는 반말을 하는 거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말해봤자 딱히 영양가 있는 답변을 받을 것 같지 않기에 스칼렛은 말을 삼켰다.
레바카가 자유로운 영혼인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애기 아빠하고 여자친구들은 관계가 참 특이한 거 같아."
"… 그렇죠."
스칼렛이 보기에도 정상인 관계는 아니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가 몇 명이나 붙은 걸까.
심지어 모두가 엄청난 미녀들이다.
몇 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나라를 뒤집었을 경국지색의 미녀들이 왜 저 남자 한 명에게 매달리는걸까. 그건 자신도 의문이었다.
"여자는 많지만 사람은 착해!"
"맞습니다. 나쁜 놈 같으면서도 착한 게 매력 중 하나죠. 잘생기기도 했고요."
열심히 식사를 이어가던 릴리아나가 한 마디를 보탰다.
스칼렛도 그에 동의하며 한 마디를 붙였다.
아마 이호연도 여왕이 있던 시기에 태어났다면 여왕의 정부가 되어 나라를 망치지 않았을까.
그만큼 잘생긴 남자를 스칼렛은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충분히 가능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의 바람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여왕을 미치게 만들었겠지.
스칼렛은 진지한 생각을 이어가며 슬며시 웃었다.
한편 레베카도 스칼렛과 릴리아나를 보며 고민을 이었다.
"내가 말한 건 그런 쪽이 아니긴 한데… 아무튼, 다들 좋으면 됐어."
자신이 보던 일족의 여자들과 이호연의 여자 친구들은 마음가짐이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아마 룬의 일족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인 모양이다.
그걸 알면서도 레베카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남편의 마인드에 반항하는 게 말이 되나?'
섹스까지 했다면 그 때부터는 남편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귀고 싶다고 하면 사귀는 거지.
불만이 왜 있는 걸까.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몸은 괜찮니?"
"… 안 다친 거 엄마는 아시잖아요."
"그랬어? 다행이네."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는 어머니, 소피아를 보며 엘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저 사람도 문제다.
아버지랑 언니가 호들갑을 떠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말리지 않다니.
딸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표정이다.
"엘리스. 무슨 소리야. 분명 다쳤잖아. 피가 나는 걸 언니가 똑똑히 봤어."
"… 살짝 긁힌 거잖아."
"살짝 긁힌 게 얼마나 위험한데. 그 작은 상처부터 시작되는 감염부터…."
"…."
엘리스는 다시 설교를 시작한 아이린을 보며 고개를 숙여 빵을 베어 물었다.
이제 아이린의 존재는 예전처럼 불편하지 않다.
괴롭힘당했던 기억은 여전하지만, 언니도 자신처럼 철이 든 건지 편한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실 애초에 가족이었으니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봐야겠지.
"엘리스. 언니 말 듣고 있는 거지?"
"응. 듣고 있어."
"아이린. 엘리스는 그만 놀리고 식사에 집중하렴."
"… 놀리는 거 아니에요."
냠.
아이린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아직 못 한 말이 많은데,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순 없으니까.
방 안에는 조용히 식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록 아버지는 없지만,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라 기분이 좋았다.
특히 자신의 동생이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귀엽고 아름다운 엘리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은 동생은 아이린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하지만 요즘 아이린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엘리스는 여전히 예뻤다.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좀 더 다양한 표정을 보고 싶고 걱정되면서도 웃어주면 날아갈 것 같이 기쁘다.
문제는… 그 정도가 약해졌다는 것.
분명 모든 걸 다 바칠 정도로 좋아했던 엘리스지만, 이제는 그 불같은 감정이 사라진 기분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시기상 엘리스가 프랑스에 돌아오고 나서 며칠 뒤였으니….
'… 이호연?'
도리도리.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 남자 때문일까.
엘리스를 자신에게서 빼앗으려는 것도 모자라 첫 경험까지 강제로 가져가 버린 그 남자는 자신이 본 사람 중 최악의 남자였다.
물론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엘리스와 비교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스. 호연이랑은 어때?"
"… 가, 갑자기 호연이의 이름은 왜요?"
"…."
아이린은 어머니와 엘리스의 대화에 식사를 이어가던 손을 멈췄다.
갑자기 그의 이름이 왜 나온 거지?
"저번에 상담했었잖아. 아, 혹시 아이린은 모르나?"
"엄마! 하아…."
"무슨 상담이요? 엘리스가 상담을 했었어요?"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이호연에 대한 상담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엘리스가 남자 문제로 고민하는 거 같길래 응원해줬는데, 딱히 바뀐 거 같지가 않네?"
"… 노력은 하고 있어요."
"항상 자신감 있게 하라니까. 엘리스."
"아빠가 왜 없나 했더니…."
"너희 아빠는 이런 얘기 들으면 큰일 나요. 후후."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는 아빠가 안 보인다 싶었더니, 이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안 부른 거구나.
"… 어머니. 엘리스에게 남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네가 너무 늦은 거야. 아이린."
"…."
엘리스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천천히 이호연에 대해 고민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야 그 쓰레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당장 몸을 겹치며 고백한다면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여자들을 모두 제치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자신있게… 하아.'
물론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답이 잠깐 고민한다고 나올 리가.
엘리스는 얕게 한숨을 쉬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아이린을 못 본건 그 때문이었다.
*
"오늘이 마지막인가?"
엘리스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잡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해야 엘리스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는 문제지만 여자와 관계를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데 그 말이 맞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가 여자니까.
'몸정을 쌓기는 했는데....'
소위 말하는 떡정.
사람은 싫지만, 그 사람의 섹스를 못 잊어서 헤어진 애인을 찾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속궁합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물론 나는 그 상태에서 호감도를 올려야 하니 난이도가 더 높다.
다행히 엘리스의 마음은 거의 열렸다.
자연스럽게 섹스를 유도하면 그녀도 못 이기는 척 몸을 허락해주겠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가 다른 여자들도 못 이기는 척 봐주냐는 것이다.
엘리스는 자신이 중심이 아닌 관계는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나 : 엘리스. 지금 도착했어.
숙소에 도착했으니, 일단 고민을 멈추고 엘리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엘리스 : 지금 들어와도 돼. 문 열어놓을게.
끼이익
익숙하게 숙소의 문을 열었다.
오늘 끝을 보지 못하면 한국에서도 이 애매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이번에 확실히 끝내고 싶은데.'
나는 현관에서 날 기다리는 엘리스를 보며 숙소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