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 359화. 마지막 밤
* * *
"좋아좋아."
나는 아이린을 내버려 둔 채 훈련장에서 빠져나왔다.
실신해버릴 정도로 박아주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내버리는 메모도 남겨놨다.
오늘이 두 번째 섹스였으니, 몸에 쾌락을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
아마 금방 기별이 오지 않을까.
"안녕히 가세요."
"… 네. 고생하세요."
로비에 있는 길드원의 인사를 받으니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 길드의 후계자를 따먹고 오는 길인데 안녕히 가라니, 꼴리잖아.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숙소로 걸었다.
"나 왔어."
"오셨습니까. 호연님."
숙소에 돌아오자 여유로운 표정의 스칼렛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일을 그만둬서 그런가? 예전보다도 더 여유로워진 거 같네.
나도 기지개를 피며 스칼렛의 맞은편에 앉았다.
"응. 다른 애들은?"
"릴리아나 님은 동영상 사이트를 분석 중이고, 레베카 님은 마법진 연구 중입니다."
"다들 바쁘네."
레베카 씨는 내가 부탁한 마법진을 연구하는 거겠지.
우리 집안의 유일한 수입을 담당하는 릴리아나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는 모양이다.
백수들이 늘어났으니 아주 좋은 선택이다.
사실 나도 엘리스의 마사지가 끝나면 백수거든.
"그러고 보니 스칼렛. 너는 이제부터 뭐 할 거야?"
"점심을 먹지 않을까요."
"아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아이리스 길드도 때려치웠잖아."
"그건 당신이 생각해야죠. 물 한 방울 안 묻힌다고 했던 게 바로 어제였는데요."
"… 그렇네. 그럼 당분간 쉬어."
"감사합니다."
홀짝
스칼렛은 살짝 웃으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백수 생활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진 않지만, 내 탓이라 어쩔 수가 없네.
뭐, 말은 저렇게 해도 금방 할 일을 구할 거다.
스칼렛은 워낙 똑 부러졌으니까.
"레베카 씨는 저 쪽에 있지?"
"네. 아까 들어가셨어요."
"잠깐 가봐야겠네."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레베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사실 레베카의 마법진 구성을 도와줄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다.
다른 히로인들을 만나야 하기도 하고 방학이 되면 미국도 가야 한다.
지금처럼 시간이 빌 때 가봐야지.
똑똑
"레베카 씨. 들어가도 되죠?"
응. 들어와. 애기 아빠.
방의 문을 열자마자 진한 마력이 새어 나왔다.
안에서 넘칠 정도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게 그 마법진이에요?"
"응. 괜찮지?"
레베카는 마법진을 설계하는 중이었다.
대충 훑어보니 룬의 결계를 응용해 사이즈를 크게 만들고, 판데믹에서 사용했던 마력차단결계를 활용해서 던전 특유의 마나가 제한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구성이었다.
연구자들이 봐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가짜 던전을 원했는데, 아직 부족하지만 구색은 갖춘 모양이다.
"오… 설계는 괜찮네요. 이게 어느 정도 완성된 거에요?"
나는 레베카의 옆에 서서 마법진을 훑으며 물었다.
"아직 20%도 안 됐지. 연구자들이나 수준 높은 마법사가 봐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야. 던전의 마력을 연구한 적이 없다 보니 구현하기가 어렵더라고."
"으음…. 그건 제가 도와볼게요. 이런 식으로 마력을 그리는 건 어때요?"
레베카의 고민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던전이라는 게 그렇거든.
던전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마력을 분석은 할 수 있지만, 그걸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간의 마력 체계와는 아예 다른 마력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다른 건 몰라도 마력 컨트롤의 영역이라면 내게 불가능은 없다.
마인의 마력도 따라 할 수 있으니 던전을 구성하는 마력을 따라 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지이잉
잠시 집중하자, 내 손위에 음산한 마력이 떠올랐다.
"으, 으응…? 뭐야. 애기 아빠! 이건 어떻게 한 거야? 마력이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말로 설명하기엔 어려워요. 타고난 느낌이라서."
"확실히… 나는 따라 할 수 없겠어. 아니, 어떤 마법사도 이건 못 따라 해. 인간의 인지능력을 뛰어넘은 마력의 파장이야. …역시 애기 아빠는 인간이 아닌 거야?"
"… 인간 맞아요. 임신도 잘 시킬 수 있어요."
"휴우. 다행이네."
레베카는 내가 마법진에 넣은 마력을 이리저리 배치하며 헛소리를 해댔다.
릴리아나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멍청함이 옮은 거 아닐까.
스칼렛도 그렇게 만들었으니 레베카라고 안 변한다는 보장은 없지.
"이 쪽은 이렇게….
"아, 그러면 마력이 더 필요해. 규모가 크다 보니 애기 아빠가 일일이 써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당연히 괜찮죠. 제 일인데."
우리는 마력을 컨트롤하며 마법진을 건드렸다.
만들다 보니 느낀 거지만,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할 것 같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일부를 삼키는 게 목적이니 스케일부터 엄청나다.
게다가 엄청난 마법사들을 속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 정도로 큰 결계라면 조사단이 생길테니 사실상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고 봐야겠지.
"하아… 힘들어. 애기 아빠. 잠시 쉴까?"
"네. 그래요."
꿀꺽꿀꺽.
레베카는 시원한 물을 마시고는 소파에 몸을 맡겼다.
"애기 아빠가 있어서 작업이 빨라지긴 했지만, 작업 기간을 몇 달은 잡아야겠어."
"몇 달이면 감지덕지죠."
"이것도 최소치야. 애기 아빠 능력이 워낙 좋아서 좋게 쳐준 거지. 최대는 몇 년이나 몇 십년일지도 몰라."
"… 그건 너무 긴데요."
"노력하면 괜찮을거야."
하긴, 전 세계를 속여야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빨리 끝내려고 하는 게 양아치 마인드지.
어떻게든 빠르게 끝내면 좋겠지만… 다른 수단을 좀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네.
나도 레베카의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머리를 쓰니까 피곤하네.'
마력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뭐든 순식간에 배울 수 있었으니까.
아예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다.
아직 히로인들은 내 여자관계를 확실히 모른다.
많아봤자 두 세 명. 아니면 네다섯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들키면 진짜 좆된다.'
사실 네 다섯 명도 충분히 많다.
충분히가 아니라 진짜 뒤지게 많지.
그런데 두 자릿수라고 하면 반응이 어떨까.
있던 호감도도 사라질 거다.
그러니 아예 쐐기를 박아야 한다.
여자가 많다는 불만이 터지기 전에 확실하게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거다.
그 준비가 바로 가짜 던전이다.
분위기부터 상황과 해결책까지.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괜찮을거다.
"애기 아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 여자가 그렇게 좋아?"
그때, 레베카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걸어왔다.
"…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꼭 그런 건 아니고, 복잡한 사정이 섞여 있어요."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 나도 일족을 되살릴 운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룬의 일족….
사실 그런 일족이 없어서 그런건지 레베카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언젠가는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네.
"그러고 보니 햇빛 보육원에 있는 아이는 어떻게 할 거예요?"
"수현이? 언젠가 데리고 오긴 해야겠지. 하지만 걱정이야. 가치관이 형성될 나이에 갑자기 룬의 일족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피해가 갈까 봐."
"으음…."
천수현.
백아영과 다녔던 보육원에 있는 룬의 일족의 생존자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크는 바람에 레베카의 목적을 이뤄주진 못했다.
생각해보면 레베카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
지금도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아이가 괜히 이상하게 물들어 안 좋은 길로 빠질 수도 있다.
레베카 씨는 착해서 강하게 훈육도 잘 못 할 거 같고.
"세상일이 쉬운 게 없네요."
"그렇지. 하아."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매일같이 히로인들과 연락을 하고 있으니, 틈날 때마다 메시지를 확인해야 한다.
수린 누나 : 아침 먹고는 뭐 하고 있어? 혹시 또 이상한 거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 : 아니에요. 그냥 쉬고 있었어요. 내일 돌아갈 준비도 하고 있고요.
수린 누나는 항상 내 행동을 꼬치꼬치 캐물어 왔는데, 귀엽긴 하지만 변명을 생각하는 게 꽤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보여줄 게 있다고 했으니 꼭 빨리 찾아가야지.
'이 누나도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음, 일단 내 탓은 아니겠지.
남다은 : 내일 오는 거 맞아?
나 : 응. 이번에는 확실해.
띠링
남다은의 메시지에 답을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도착했다.
남다은 : 김치찌개 해놨어. 엄청 맛있을 거야. 다희도 좋아했어.
나 : 내일은 하루종일 굶고 기대하고 있을게.
남다은 : 응. 고마워.
남다은은 여전히 말투가 귀여웠다. 평소의 말투를 생각하면 이게 그녀의 기준에서 굉장히 친절한 말투겠지.
그나저나 집에서 많이 기다리나 보네.
역시 빨리 가야겠어.
오랜만에 다희도 보고싶다.
띠링
엘리스 : 오늘 저녁에 올 수 있어?
"… 맞다."
나는 새로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오늘 엘리스도 만나기로 했지.
하루에 두 탕이나 뛰겠네.
"애기 아빠, 뭔데 그렇게 열심히 스마트워치를 봐?"
"내일이면 돌아가니까 연락하고 있었어요."
"아, 애기 아빠 여자친구들한테?"
"네네."
그래도 레베카 씨는 다른 여자를 질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레베카가 아니었다면 가짜 던전 같은 아이디어도 못 냈을 테니, 임신을 해달라고 하는 것만 아니면 내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 나중에도 똑같겠지?
나는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봤다.
레베카는 지친 듯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내 시선에 반응해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는 여자들을 자주 봐서 그런가,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네.
나는 조심스럽게 레베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으응? 왜?"
레베카는 내 불안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예뻐서요."
"우리 애기 아빠 작업 치는 거 봐. 몸에 배었어."
살짝 떠봤지만 레베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레베카 씨.
제발요.
*
"아으으읏…!"
엘리스는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 몸을 던졌다.
최대한 빠르게 퇴원 절차를 밟았더니 아침에 퇴원할 수 있었다.
원래는 더 일찍 퇴원할 수 있었지만, 아빠가 다른 일도 모두 미뤄놓고 찾아와서는 몸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다행인 건 업무 중인 언니가 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마 둘이 모였으면 한 시간은 더 늦었겠지.
"괜찮다고 했는데도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저 정도면 병이야. 병.
고개를 휘휘 저은 엘리스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워치를 켰다.
메인 뉴스에는 아이리스 길드에서 작업한 내용들이 올라가 있었다.
[천재 마법사 이호연. 켄타우로스 생포 이후에 연구까지 큰 도움이 되어….]
[한국의 자랑! 20살의 젊은 생도가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차세대 인재. 천재 마법사 이호연을 만나다. (가상인터뷰)]
[프랑스 출신의 엘리스 생도도 이호연을 도우며 연구를 진행….]
"…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짤막하게 나와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며 엘리스는 화끈해지는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결국 자신의 이름까지 메인에 띄웠다.
헤드라인이 아니라 기사 안에 짧게 한 줄만 넣어도 될 텐데, 꼭 저렇게 자신을 창피하게 만든다.
엘리스는 결국 스마트 워치를 덮고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그녀는 항상 천장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내일이면 이호연과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빅토리아 아카데미를 다녀야 한다.
즉 이호연과 다른 여자들이 다시 만난다는 뜻이다.
"… 시간이 없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같은 시간을 보낼 순 없을 거다.
자신도 그렇고 이호연도 그렇고 서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여성들과 만나겠지.
"넷… 아니 다섯인가? 혹시 여섯?"
이호연과 매우 친한 여성.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저 정도.
모든 여성과 자신처럼 깊은 관계는 아닐 테니, 반 정도는 줄여도 될 거다.
"그러면… 하아."
물론 그것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여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니까.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빛 주변에는 언제나 나비가 꼬이는 법.
자신은 실패한 나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중요해."
엘리스는 각오를 다잡고 다시 스마트워치를 들었다.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
계획이 없지만 일단 뭐든 해야겠지.
"…."
타닥 탁
고민하던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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