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화 〉 356화. 언니의 희생
* * *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 실.
아이린은 출근하자마자 오전 업무를 끝내고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 섰다.
스윽
머리를 뒤로 넘긴 아이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라고 말할 만큼 아름다운 몸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몸의 라인.
완벽한 이목구비와 작은 얼굴까지.
여자로서 능력치는 자신이 직접 판단해도 최상급이다.
"...."
최근 아이린은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인은 이호연.
그 남자때문에 엘리스의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뭐든지 해야해.'
엘리스를 이호연에게 빼앗기기 전에, 강수를 둘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엘리스를 위해.
털썩
의자에 몸을 맡긴 아이린은 고민을 이어갔다.
"…이호연이 문제야."
어떻게든 이호연과 엘리스만 떨어뜨려야한다.
그 중에서도 이호연.
두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엘리스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으니아이린이 파고들어야 할 곳은 이호연이다.
하지만 이호연을 막을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보통 협박을 하려면 그의 약점을 잡거나, 필요한 것으로 협상을 해야하는데 이호연에게는 그런 정보가 없었으니까.
"약점? 그에게 약점이 있나...?"
그나마 여자를 많이 밝힌다는 게 약점이지만, 능력 있는 남자는 여자를 건드리고 다녀도 된다는 이상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난 건 아이린도 엘리스와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엘리스처럼 삐뚤어진 남성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람둥이가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부터 엄청난 바람둥이고, 그걸 내버려두는 넓은 아량의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 하지만 성욕이라면 파고들 곳이 있을지도 몰라."
약점을 잡는 게 안 통한다면 남은 건 협상.
그가 좋아하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여자.
그것도 매우 예쁜 여자다.
"…."
다르게 말하면 아이린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
이호연이 아이린의 몸을 탐하던 그날 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엘리스와 보내는 첫날밤이라는 기념이 있기에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었다.
"후우…."
도리도리.
쓸데없는 생각을 지운 아이린은 다시 이호연을 떠올렸다.
목표는 이호연의 관심을 엘리스에게서 돌리고, 엘리스의 관심도 지우는 것이다.
아이린은 다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
남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 매력을 느끼는 건 확실해."
저번에 엘리스와 보냈던 밤.
이호연의 성욕은 확실하게 확인했다.
엘리스에게 발정하던 것 만큼이나 자신에게도 정을 쏟아냈다.
아마 예쁜 여자라면 가리지않고 씨를 뿌리는 놈이겠지.
그러니까 엘리스를 앞에 두고도 자신까지 탐한 것이다.
'조금만 내가 시선을 끌면 돼.'
엘리스도 어린 마음에 잠시 흔들린 것. 진짜 사랑은 아닐거다.
목표는 엘리스가 그에게 관심이 떨어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이호연의 시선을 자신으로 돌린다.자신의 몸을 이용해 유혹하면 순식간에 자신에게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
남자는 원래 그런 생물이니까.
엘리스가 이호연에게서 관심이 사라지면 자신도 이호연에게 관심을 끊어버리면 된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아이린은 제복을 챙겨입고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엘리스를 위해서라면 자신 따위는 희생해도 괜찮으니까.
*
다음 날 아침.
수요일.
"내일이면 돌아가겠네. 파리도 오늘로 끝이구나."
"커피라도 드시죠."
"고마워. 스칼렛."
따뜻한 모닝커피를 마시며 프랑스에서의 아침을 즐겼다.
얼마 남지 않은 유러피안의 삶을 즐겨야지.
나는 테이블에 커피잔을 살짝 내려놓고, 눈을 찡그렸다.
"어우, 써."
"그러니까 왜 마시지도 않던 에스프레소를 달라고 하십니까."
"프랑스에 왔으니까 이걸 먹어줘야지. 난 지금 유러피안이라고."
"… 커피가 프랑스랑 무슨 상관입니까."
"커피가 아니라 맥주였나?"
"하아."
스칼렛은 나와 대화를 포기한 듯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유럽 주변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졸려…."
"그러니까 누가 늦게 자래."
방에서 좀비처럼 기어오는 릴리아나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매일 아침마다 저러는데 서큐버스 종특인가?
"애기 아빠. 이런 구성은 어때?"
"괜찮은데요. 하지만 이것보다 스케일이 조금 더…. "
레베카는 아침부터 마법진을 연구중이었다.
이건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전심전력으로 도와야지.
마음 같아서는 임솔 교수님에게도 도와달라고 하고싶은데, 임솔 교수님도 이 마법진에 당해야한다.
그래서 더욱 힘들단 말이야.
그 재능충을 어떻게 마법으로 속여.
"레베카 씨. 그때 판데믹에서 썼던 마력 제어구를 응용해볼까요?"
"아... 그때 그 구슬같은 거. 한 번 생각해볼게."
"나도 놀아줘! 에잉!"
"릴리아나 님도 커피 한 잔 하시죠."
"그럼 나는 단 거!"
"스칼렛. 미안한데 나도 릴리아나랑 똑같은 거로 줘. 이거 너무 쓰다."
"아, 애기 아빠. 그건 내가 먹을게.'
나는 에스프레소를 레베카에게 넘겼다.
아침부터 집이 참 시끌벅적하네.
집이 점점 북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국에 가면 남다은 자매도 포함될텐데,나중에는 한 10명 모여 사는 거 아니야?
"호연 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잠시 바깥을 보고 왔던 스칼렛이 돌아왔다.
"응? 누구?"
"직접 보셔야 할 것 같네요."
나는 스칼렛의 말에 현관으로 향했다.
엘리스가 찾아왔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텐데. 누구지?
"…."
그리고 문밖에 보이는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어쩐지 스칼렛의 표정이 약간 삐진 것 같더라.
나는 조심스럽게 문에 대고 말을 걸었다.
"… 누구세요."
아이린이야.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으음.
저 사람은 어떡하지.
… 사실 어떻게 공략할지 하나도 생각을 안 해놨는데.
*
겉옷 하나만 걸치고 문밖으로 나가자 아이리스 길드의 제복을 입은 채 서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출근하는 길에 들린 건지 출근하고서 온 건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다 차려입으니까 진짜 예쁘긴 하네.
오피스 레이디 화보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이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이린 씨."
"... 인사는 잘하네."
"제가 예의 바르기로 유명해요."
"하아, 됐고. 따라와. 이야기 좀 하자."
"지금요?"
"응."
또각또각
아이린은 내 인사를 받자마자 앞장서서 걸어갔다.
저 자매는 뭐만 있으면 한숨을 쉰다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따라오라고 하니 약간 황당하긴 한데...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일단 따라와 줘."
아이린은 아이리스 길드의 본관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당연히 우리를 의심하는 눈은 없었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꽤 넓은 방.
꽤 짙은 마력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마력처리가 되어있는 곳 같았다.
"... 여긴 어디에요?"
"내 전용 훈련실이라고 보면 돼."
단체 훈련실이 구리다 싶었더니, 간부급에게는 개인 훈련실이 있나 보네.
설마 여기서 나를 덮치려는 건가?
엘리스 때문에 죽여서 처리하겠다는 그런 건 아니겠지...?
살짝 긴장하며 아이린을 바라보자, 아이린도 비슷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우. 바로 말할게. 너. 엘리스를 포기해."
"... 왜요?"
"더 이상 너 때문에 엘리스가 망가지는 걸 볼 수 없어."
"…… 음."
나는 입맛을 다시며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결연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여기서 끝을 내겠다는 표정이었다.
'또 왜 이러시는 걸까.'
하아.
사실 아이린이 어려운 이유가 이거다.
워낙 미친 년이라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그래서 프랑스에 오기 전만 해도 아이린은 엘리스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쓸 예정이었다.
공략 포인트가 높아서 각을 보려고 했더니... 또 이렇게 귀찮게 일이 흘러가 버렸다.
"최근에 엘리스의 상태가 좋아진 건 아시죠? 선천적 마력 장애도 고쳤고, 자존감도 많이 올라갔어요. 망가지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가고있어요."
일단은 설득을 시도했다.
인간에게는 대화라는 수단이 있으니까.
"... 그게 문제야. 너 때문에 엘리스가 더욱 위험해지고 있어."
"그게 무슨...."
"실전에 투입될수록 다칠 위험이 늘어나잖아. 네가 그런 짓 하지 않아도, 엘리스는 평생 내가 지켜줄 수 있어."
"...."
말문이 막힌 나는 아이린의 굳은 표정을 확인했다.
자신의 생각에 틀린 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 얼굴.
이건 뭐 설득할 수가 없겠는데.
보통 사람과는 아예 생각이 달랐다.
'엘리스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성격은 나름 비슷한데,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안보인다.
엘리스는 몸정으로 공략했지만 아이린은 그게 안 될 거 아니야.
아이린에게 마사지를 빌미로 섹스를 하는 건 말이 안되고,강제로 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아니, 애초에 강제로 하는 건 범죄지.
'역시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 낫나.'
여기서 내가 자리를 피하고, 엘리스와 관계를 이어가도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실거면 그냥 가보겠습니다."
이러면 아이린과는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아쉽긴해도 버릴 건 버려야지.
아이린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던 그때.
"… 잠깐만.'
스르륵
아이린이 제복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을 벗는 거로도 모자라 와이셔츠까지 벗은 아이린은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되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린은 입술을 떨며 말을 이었다.
"...?"
"어, 어차피 목적은 엘리스의 몸이잖아. ... 그냥 내 몸으로 만족해."
"…… 진심이에요?"
"뭐, 뭐...! 이걸로 만족할 수 있잖아...! 어차피 네 목적은 여자 아니야?"
아이린은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대단한 각오라도 한 듯 날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가 보면 내가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어.
'엘리스에게 빠져도 너무 빠졌구나.'
저번에 나한테 마법으로 밀린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런 방식으로 나오는 건가.
이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알았다면....
"... 아이린 씨. 이리 와볼래요?"
나는 아이린의 가슴골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넘어가는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해보는거다.
*
'별 거 없어.'
이호연 앞에서 제복을 벗은 아이린은 이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든 이호연과 엘리스를 떨어뜨리기만 하면 된다.
그 뒤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거다.
아이린은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이호연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어차피 자신은 남자의 몸에 흥분하지 않는다.
자신과 엘리스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여성이 있는데도 우락부락하고 더러운 몸을 좋아할 이유 따위 없으니까.
"... 흣."
아이린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이호연을 보며 숨을 삼켰다.
며칠 전 밤이 생각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을 건드리며 반응을 보던 이호연은 아이린에게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시는 거에요."
"엘리스 대신 내 몸을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 엘리스랑 다르게 나는 다 해줄 테니까... 엘리스에게서 손을 떼."
"와...."
이호연은 아이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뭐, 눈물 나는 희생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제대로 미친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될 수도 있겠네.'
몸정으로 공략하기.
이렇게 기회를 주면 시도는 해보는 게 예의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