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6 346화. 의좋은 자매
화요일 아침.
엘리스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깨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이곳은 아이리스 길드의 병실. 옷도 환자복을 입은 상태였다.
다치지도 않은 자신이 왜 여기 누워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길지만… 요약하자면 아이린과 아이작이 강제로 박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켄타우로스 추적 작전에서 마인 과의 전투에서 생긴 작은 상처들을 아이작과 아이린에게 들켰으니까.
- 이, 이럴수가. 당장 검사해!
- 괜찮아요. 이 정도로 뭐.
- 안돼! 엘리스! 당장 입원해야해!
- 그래! 입원이다! 입원!
- 그게 무슨….
가벼운 상처라 호들갑을 떨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수속이 끝난 상태였고, 반강제적으로 병실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 귀찮네."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귀찮은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얘는 왜 연락을 안 해."
엘리스는 비어있는 이호연의 메시지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밀이 많은 남자.
이호연의 목적은 뭐고, 그의 비밀은 뭘까.
엘리스는 켄타우로스 추적 작전의 날을 떠올렸다.
켄타우로스의 공격에 스칼렛이 다쳤을 때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 당황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억났다.
분명 이호연의 집에서 지내던 여자였다.
스칼렛이 구해온 정보에서 본 기억이 났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단순한 섹프가 아니었나?
그 여자가 스칼렛과는 무슨 사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 투성이였다.
"…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어 정말."
엘리스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고, 혼자 이호연이 올 때까지 답답하게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을 잊은건지 미뤄놓은건지 생포해놓은 켄타우로스에게 두 번이나 찾아갔다.
아마 연구 목적이겠지.
나한테 다 설명해준다고 해놓고, 뭐 하는 거야. 그깟 연구가 중요하냐고.
'설마 이번엔 켄타우로스가 목표?'
그럴 리가.
아무리 그 짐승이라도 말한테 흥분하지는 않겠지.
'… 아니, 혹시 몰라.'
엘리스는 추적 작전 전날 밤을 떠올렸다.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안쪽으로 들어오던 거대한 물건.
수치심을 이길 정도로 기분 좋은 쾌감.
부끄러웠던 자신의 천박한 신음.
질 안쪽에 따뜻한 무언가가 들어오는 이상한 기분까지.
그날 밤의 모든 게 기억에 생생했다.
아직도 다리 사이가 얼얼한 것 같았으니까.
그의 막을 수 없는 성욕과 정력을 생각하면 상대가 켄타우로스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에휴. 그래, 뭐 바쁠 수도 있지."
엘리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똑똑똑.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안봐도 안다.
"엘리스. 들어갈게?"
"… 어. 들어와."
"사과 좀 깎아왔어."
"… 언니는 일 안 해?"
"엘리스가 다쳤는데 어떻게 일을 해."
"아니, 나 안 다쳤다니까… 하아."
엘리스는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를 가져온 건 아이린.
다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병실에 있단 이유만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자신의 옆에 있어 줬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친절했다.
"아 해. 언니가 먹여줄게."
"… 아."
엘리스는 기쁜듯이 웃는 아이린을 보며 입을 벌렸다.
어제부터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먹을 걸 줘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거절해봤자 미안하다고 웃다가 다시 권하니 그냥 먹는 게 편하다.
"어때? 토끼 귀엽지않아? 잘 깎았지."
"그러게. 이런 거 연습이라도 해?"
엘리스는 완벽한 모양의 사과를 보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매일 힘든 훈련과 업무를 하면서 어떻게 이런 것도 잘하는거야.
"13살 때 훈련하다가 다쳐서 입원했던거 기억나? 토끼 모양 사과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언니가 최대한 열심히 깎았는데, 엄청 못생겼다고 울었잖아."
"… 그런 거 기억하지 마."
"그 뒤로 매일 연습했는데 만족한다니 다행이야."
엘리스는 자상하게 웃는 아이린의 눈을 피했다.
결국 남는 건 가족밖에 없다는데, 어릴 때 다투던 언니도 철이 든 걸까.
켄타우로스 추적 작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신을 너무 잘 챙겨준다.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면 엘리스의 감정도 풀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아이린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띠링-
그때, 엘리스의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잠시만. 언니."
"응응."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내려놨다.
그녀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혹시나 한 번 웃어주기라도 하면 더욱더 기뻤다.
그녀의 웃음은 그만큼 보기 힘들었다.
"흐으음."
한편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미친 바람둥이 : 엘리스. 우리 이제 어떻게 해? 돌아갈 거야?
드디어 연락이 왔구나.
늦어도 너무 늦었어.
- 나 : 글쎄. 만나서 얘기하자. 나는 며칠 더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핑계거리는 많으니까.
바로 돌아가기엔 아버지의 권력을 쓴 게 너무 아까우니까.
엘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랑 메시지 해?"
"이호연. 일정에 관해 얘기하려고."
"아… 그래? 알았어. 언니는 슬슬 일하러 갈게."
"…? 응. 알겠어."
아이린은 사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왜 저러지?'
일이 너무 많이 밀렸나?
엘리스는 귀여운 토끼 모양 사과를 하나 집어먹으며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이대로 평생 자고 싶다.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곧 날아갈 것 같이….
"흐읍…!"
하아하아.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나 살아있지?"
피곤함을 견디며 주먹을 쥐었다 피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방금 죽을 뻔한 거 같은데, 착각인가?
'자기 전에 뭘 했더라.'
하품을 하며 희미한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었다.
첫날 밤인데 날 내버려 두고 혼자 잘 거냐고 보채는 스칼렛과 뒹굴다가, 결국 못 참고 뜨거운 밤을 보낸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내가 어떻게 잠들었더라?
"굿모닝. 좋은 아침이네요."
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팔을 감쌌다.
"… 아, 스칼렛. 잘 잤어?"
"네. 어제는 참 좋았어요. 당신."
스칼렛은 알몸으로 내 팔에 몸을 비벼댔다.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참지 못했을 유혹인데, 얼마나 피곤한지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찌뿌둥했다.
난 내 팔을 가슴 사이에 끼워놓은 스칼렛을 보며 말했다.
"스칼렛. 그냥 앞으로 호칭도 편하게 해."
예전에는 계약 관계라 쳐도 이제는 편하게 해도 될 텐데.
일단 스칼렛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스칼렛은 백아영, 임솔 교수님과 동갑이다.
"안 돼요. 그러면 재미가 없는걸."
"아니면 내가 누나라고 불러줘?"
"… 그럼 한 번만?"
"스칼렛 누나. 나 피곤해. 좀만 더 자자."
"…… 빨리 잘까요?"
"으읍."
스칼렛은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
뭐, 좀 답답하지만, 기분은 좋네.
피곤하니 더 자야지.
*
워낙 몸이 튼튼한 탓일까.
잠깐 졸면서 스칼렛의 품에 있다 보니 피곤이 좀 가셨다.
이게 높은 자연치유력의 힘이지.
"그래서,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사실 이렇게 일찍 끝날 줄은 몰랐거든."
"그러게 말입니다. 하루만에 생포해버리다니."
난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칼렛과 대화를 나눴다.
일은 잘 풀렸다.
켄타우로스도 찾았고, 지옥에 대한 정보도 나름 얻었고, 프랑스에 와서 엘리스와 스칼렛을 공략했다.
다 좋은데, 문제는 오늘이 겨우 화요일이라는 것.
아카데미에서는 일주일간의 시험이 치러진다.
시험이 싫은 건 아니지만, 겨우 2일 차인데 돌아가기는 좀 웃기잖아.
현재 나는 아이작의 로비로 프랑스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내게 표창장을 준다고 난리고,아카데미는 날 배려해서 특별 시험을 본다고 한 상태.
한국에서도 내 행보가 뜨거운 주제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복귀하면 너무 귀찮을 것 같단말이지.
물론 '천재 마법사가 너무 잘나서 하루 만에 해결하고 돌아왔다.'라는 스토리도 있지만, 그다지 좋은 그림은 아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긴 한데."
"며칠 정도 늦게 가도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그게 그림이 예쁘긴 하지."
"하긴. 입장이 애매해지겠네요. 당신도 그렇고, 프랑스 정부도 그렇고, 아카데미도 그렇고.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에요."
"나는 한국에 빨리 돌아가서 다른 애들 챙기는 것도 괜찮긴 한데… 일단 길드장 님한테 물어보지 뭐. 아니다 엘리스한테 말해야겠다."
엘리스에게 할 말도 있으니 빨리 만나야지.
나는 스마트워치를 실행해 엘리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엘리스. 우리 이제 어떻게 해? 돌아갈 거야?
이제야 봤는데, 쌓여있는 메시지가 꽤 많았다.
어제 워낙 바빠서 체크를 못 했네.
- 남다은 : 언제 와. 켄타우로스 잡은 거 봤어.
- 백아영 : 여보……. 여보… ㅠㅠ. 솔이도 걱정 중이에요. 괜찮아? 왜 답장이 없어.
- 임솔 교수님 : 빨리 와서 시험문제 내는 것 좀 도와줘.
- 문수린 : 호연아. 아카데미에 협조 요청이 왔는데 네 이름이길래 그냥 허락했어. 맞는 거지?
나는 메시지에 하나씩 답장하며 웃음을 지었다.
메시지도 이렇게 재밌는데 실제로 만나면 얼마나 재밌을까.
빨리 보고 싶네.
- 루시 : 한국에 오면 바로 동아리방으로 와야 해!!!
- 루미 : 호연 씨. 저 필기시험 잘 봤어요! 호연 씨 덕분이에요!
"…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한국에 돌아가면 기말고사보다도 복상사를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정력이 강해지는 아티팩트나 찾아볼까.
"하으으으 졸려."
"좋은 아침입니다. 릴리아나 님."
"일어났구나. 릴리아나."
눈을 비비면서 방에서 나온 릴리아나는 책상에 앉아 몸을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응… 우리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거야? 아직 못 먹어본 프랑스 요리가 많은뎅."
"그러면 켄타우로스 연구를 핑계로 좀 더 있을까?"
띠링-
때마침 엘리스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 엘리스 :글쎄. 만나서 얘기하자. 나는 며칠 더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핑계거리는 많으니까.
- 나 : 언제 볼까? 나는 아무때나 괜찮아.
- 엘리스 : 점심 먹고 보자. 지금 병실에 입원중이라, 조금 이따가 사람을 보낼게.
- 나 : 알았어. 잘 쉬어.
"얘는 왜 병실에 있지?"
"누구 말씀이십니까?"
"엘리스. 지금 입원중이라네. 혹시 다쳤어?"
"저는 못들었습니다. 아마 또 길드장님이 억지로 입원시킨 거 아닐까요. 듣기로는 예전에 훈련하다가 넘어진걸로도 입원을 시켰다고 하던데요."
"… 심하네. 그 아저씨."
그 정도면 딸바보가 아니라 그냥 바보아닐까.
나는 아침먹을 준비를 하며 스마트워치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