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6화 (336/648)

EP.336 336화. Killer Queen , 릴리아나 칼리오페

저벅저벅.

- 요즘 방송을 너무 안 한 것 같아서, 어젯밤에 이호연이 안 오길래 슬쩍 방송을 켰거든? 근데 시청자가 아직도 많이 들어오더라고. 역시 난 방송 체질인 것 같아─.

"오. 그래그래."

- 생각해보면 지옥에서도 방송이나 할 걸 그랬어. 거기서도 여자 목소리로 방송했으면 인기 많았을 텐데─.

"맞아맞아."

숙소로 가는 길.

릴리아나는 켄타우로스를 만난다는 게 기분 좋은지 신나게 재잘거렸고, 나는 스칼렛을 업고 릴리아나의 혼잣말에 대답해주며 숙소로 향했다.

'참 부드럽네.'

난 스칼렛의 허벅지와 엉덩이가 이어지는 부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딱히 무겁지도 않았고, 한 사람이 내게 기대고 있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다.

괜히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스칼렛. 아프진 않지?"

"네. 아프진 않아요."

"다행이네. 빨리 가서 쉬자."

"죄송합니다. 저도 제 발로 걷고 싶습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다 나 때문인데 뭐."

- 맞아. 스카웃은 잘못 없어. 착해.

스칼렛에게 뭐라고 하겠어. 다 내 탓인데.

우리는 여유롭게 숙소에 도착했다.

"릴리아나. 잠깐 쉬고 있어. 스칼렛 좀만 돌봐주고 켄타우로스 보러 가자."

"응. 알겠엉."

난 스칼렛을 업은 채 방에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고, 마력으로 보조해 스칼렛의 자세가 무너지지 않게 신경 쓰며 침대로 옮겼다.

"후우."

"감사합니다. 호연 님."

"아니야."

털썩-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는 스칼렛을 보며 나도 옆에 앉았다.

"뭔가 신기하네."

"… 뭐가요?"

"인간의 몸이 신기해서. 하긴, 엄청난 고통이었을 테니 바로 낫기도 힘들겠지. 내가 마사지라도 해줄까?"

"평소라면 괜찮다고 했겠지만… 오늘 정도는 부탁해도 되겠죠?"

"당연하지."

나는 슬며시 웃는 스칼렛의 팔을 주물렀다.

그래. 이럴 때 안 빼는 게 스칼렛의 매력이다.

주물주물.

스칼렛의 부드러운 팔을 주물렀다.

불쌍한 스칼렛.

다음에 치즈 순두부라도 한 그릇 더 사줘야겠어.

사실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팔과 어깨에 마력을 집어넣으며 주물렀더니 미동도 없던 스칼렛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굳어있는 근육에 자극을 줘서 그런 걸까.

억지로 뇌에 신호를 보내줘서 그럴 수도 있겠네.

"확실히 시원하긴 합니다. 마사지에 재능이 있으시군요."

"그래? 다행이다."

주물주물.

우리 둘은 말없이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

스칼렛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고, 나도 조용히 스칼렛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 한국에 애들은 잘 있으려나."

"다은 양과 다희 양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그렇지."

물론 남다은과 남다희 말고 다른 히로인들도 다 걱정된다.

특히 백아영과 임솔 교수님.

나 없다고 싸우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루시나 루미도 그렇고, 수린 누나가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 그것도 생각해야지.

"착한 남자인 척해놓고 다른 여자 생각을 잘도 하시네요."

"…."

스칼렛은 내게서 눈을 돌리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서운한 티를 내는 것 같았다.

이거 참….

스칼렛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계속 고민해왔지만, 이 정도면 이제 고민하는 게 바보다.

히로인들 중 유일하게 날 수동적으로 만드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그게 또 신선하단 말이야.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신호를 보내오면 참기가 힘들다.

"… 스칼렛."

그래. 생각해보면 스칼렛이 항상 말했었지.

이런 건 남자 쪽에서 먼저 하라고.

난 스칼렛과 눈을 마주치고, 금발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뽀얀 피부와 붉은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자.

스칼렛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 중요한 일 먼저 하고 오셔야죠. 켄타우로스가 있잖아요."

"야, 그걸 지금 얘기해?"

분위기 좋았잖아. 스칼렛.

꼭 이래야만 했어?

"설마 저를 3분 카레 취급하실 생각인가요? 저도 시간을 들여줬으면 좋겠는데요."

"… 말을 뭐 그렇게 해."

"릴리아나 님도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그건 그렇지만…."

릴리아나에게도 스칼렛의 몸을 봐주겠다고 말은 해놨다.

하지만 켄타우로스를 본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으니 엄청 기대중이겠지.

쓰담쓰담.

"뭐 하시는 겁니까."

"쉬고 있어. 금방 올게."

"… 예."

"참고로 난 맛있는 걸 아껴먹는 타입이야."

"그냥 가셔도 됩니다."

나는 스칼렛의 볼을 쓰다듬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이 꽤 귀여워서 지금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스칼렛의 몸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지만, 원하는 대로 나중에 시간을 들여줘야지.

방 바깥으로 나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릴리아나가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내게 달려왔다.

"벌써 끝났어?!"

"응. 일단 눕혀만 놨어. 켄타우로스 먼저 보러 가야지."

"좋아앗…! 가자!"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면회에 제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고 싶을 때 가서 말하면 되는 거니까.

하고 싶은 말 리스트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가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되지 뭐.

물론 켄타우로스의 행동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마력 제어구로 묶여있으니 괜찮을거다.

난 목걸이로 변한 릴리아나를 데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이호연 마법사님."

"지하 수감실로 가려고 하는데요."

로비에 도착해서 안내원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지하로 가는 버튼이 없으니, 직접 말해야 했다.

"아, 엘리베이터에 타시고 이 카드를 찍으시면 돼요."

안내원은 내게 카드키 같은 걸 건넸다.

어쩐지, 비밀통로 같은 건 없었는데 다들 어디로 가나 했어.

"수감실은 어떻게 가나요?"

"지하 5층에 가서 카드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VIP 카드니까요."

"감사합니다."

벌써 VIP 대우를 받는구나.

역시 장인어른.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5층은 수감실이라 그런지 스산한 분위기가 흘렀는데,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아이리스 길드원에게 카드를 내밀자 고개를 숙이며 통과시켜줬다.

-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두워?

"뭐… 겁을 주려고 그러나?"

- 아하. 어둡고 추운 곳에 있으면 힘들긴 하지!

릴리아나와 잡담을 하며 제일 안쪽으로 걸어갔다.

켄타우로스는 가장 깊은 곳인 특실에 넣어놨다고 했거든.

고오-

통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걷다 보니 곧 커다란 문 하나가 보였다.

끼익-

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제 왔나.]

방안은 마치 연구실처럼 넓었고, 그 가운데에 켄타우로스가 서 있었다.

온몸이 마력 밧줄로 묶여있었고, 마력 밧줄의 끝은 벽에 박혀있었다.

저게 마력을 억제하는 마력 억제구겠지.

실제로 켄타우로스에게는 극소량의 마력만이 느껴졌다.

"어… 안녕?"

[예의 바른 인간이군. 반갑다.]

괴수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릴리아나에게도 반말을 하니 지옥 출신에는 다 반말을 하기로 정했다.

근데 이 자식 왜 이렇게 침착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설득할 말을 계속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 나, 나…! 나도 말할래!

"잠시만 기다려. 내가 먼저 말해볼게."

다급한 릴리아나의 말에 대답하며 룬의 결계를 펼쳤다.

수감실의 구석에 CCTV가 있었기 때문이다.

룬의 결계로 CCTV의 시야를 막았다.

이제 우리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거로 보이겠지.

"켄타우로스… 라고 불러도 되나?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무렇게나 부르도록. 예의바른 인간이지만 내 이름을 알려주는 건 마음에 안드는군.]

"그럼 귀엽게 '켄타짱'이라고 할게."

[내 이름은 '케이론'이다.]

"그래. 케이론."

역시 켄타짱은 싫구나.

진작 원래 이름을 말하지 그랬어.

"케이론, 세뇌에 걸렸을 때 기억은 다 하고 있어?"

[그렇다. 정신은 그대로 살아있었으니까.]

"으음… 일단 앞으로 질문이 좀 있을 건데, 최대한 성의있게 대답해줘. 적어도 판데믹에 돌아가지 않도록 대우는 잘해줄게. 내가 잘만 말하면 풀어줄 수도 있어."

사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이 케이론이란 놈이 한 말들을 생각하면 릴리아나에게 적대적이거나, 최소 서큐버스라는 종족을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마음대로 해라.]

의외로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케이론을 보며 나는 릴리아나를 툭툭 쳤다.

"됐어. 나와도 돼."

일단은 릴리아나에게 맡길까.

케이론이 했던 말이 신경쓰이긴해도, 릴리아나의 고민을 푸는 게 먼저다.

릴리아나의 질문이 끝나면 그때 물어도 늦지 않겠지. 마력 억제구가 있으니까.

퍼엉-

"아, 안녕?! 나도 지옥 출신이야…!"

[… 그래.]

내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대화는 잘 흘러갔다.

"요즘 지옥은 어때?!"

[어떻냐고 물어봐도 나도 모르겠군. 내가 소환당하기 전까진 지옥 그 자체였다.]

"아직도 마왕님은 건재해?"

[그래. 후계자 전쟁이 한참 활발하다. 그런데….]

난 뒤에 서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지옥의 정세니, 유명 가수니 하는 건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릴리아나가 기뻐 보였으니 그거면 된거지 뭐.

대충 10분 정도 생각나는 질문을 뱉던 릴리아나는 더이상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잡고 고민했다.

"아, 이제 뭘 물어봐야 하지… 우리 엄마 소식을 물어볼 순 없는데. 혹시 모르니까 물어볼까? 혹시 지옥에 유명한 고블린 국수식당 알아?"

"… 그렇게 물으면 알겠냐."

"알 수도 있지! 나도 여기서 지옥 출신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렇긴 하지만…."

[알고 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냐고.

케이론은 찝찝한 표정으로 릴리아나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군. 날 놀리는 게 아니었어.]

"으응?"

"인간. 그거 알고 있나?"

"뭐를?"

케이론은, 목소리에서 마력을 빼고 내게 말을 걸었다.

"서큐버스는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 사회다. 그게 자신이 가진 무력이든, 강한 생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유혹능력이든, 결국 강한 자가 서큐버스 퀸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건 나도 아는뎅."

뜬금없이 서큐버스 사회 얘기가 왜 나와?

"그중에서도 현 마왕의 정부인 서큐버스가 있다. 지옥의 최강자인 마왕의 정부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녀는 서큐버스 퀸의 자리에 올랐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설마 그게 릴리아나라는 소리야?"

"그럴리가. 서큐버스 퀸의 얼굴은 마왕이 아니라면 볼 수 없다. 보자마자 강한 마력에 이끌려 그녀의 노예가 되어버릴 테니까. 대신, 그녀의 딸은 본 적이 있다."

"…."

점점, 케이론의 말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발 그런 커다란 일은 아니길 빌었는데.

"뭔데! 빨리 요약해줘! 3줄로 요약해!"

"네 얼굴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Death's Empress와 Ruler of the hell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 꼭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야 되냐?"

쓸데없이 무슨 룰러 오브 어쩌고….

아, 맞아.

지옥에서 영어 쓴다고 했지.

"죽음의 황후(Death's Empress)와 지옥의 지배자(Ruler of the hell)의 딸. Killer Queen. 릴리아나 칼리오페."

"…."

"서큐버스. 그게 네 정체아닌가? 어째서 숨기고 있는거지?"

케이론의 입에서 나온 쓸데없이 멋있는 이름을 듣자마자 릴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릴리아나는 눈을 찌푸리며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래. 난 그냥 릴리아나인뎅? 그리고 우리 엄마는 고블린 국수식당에서 일해. 그렇게 거물이 아니야."

"… 야. 증거 있어?"

"당연히 있다. 바로 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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