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4 334화. 스칼렛 라이트
포옥─
쿵─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
나는 따뜻한 무언가에게 안겨 데굴데굴 지면을 굴러갔다.
"아, 아야…."
나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아직 두통과 현기증은 여전했지만, 부드러운 물체가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이호연!"
"애기 아빠!"
어지러움이 가시자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이거 뭐지.'
분명 켄타우로스의 마력이 날 공격한 건 기억하는데….
지금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이건 뭐야?
"멈춰! 켄타우로스가 먼저다! 1팀장! 레베카 씨!"
"… 네!"
"마법진 펼칩니다. 보조해주세요!"
아이작과 아이린, 레베카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켄타우로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제압에 성공하는 분위기였다.
제발 성공했으면 좋겠네. 더럽게 피곤하거든.
이대로 눈을 감고 자고 싶을 정도였다.
… 잠시만.
'나 왜 살아있냐?'
살아 있더라도 병실에서 깨어나야지. 왜 아직 전투 중인 거야?
게다가 그 마지막 공격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 일어나! 이 멍청아! 스카웃이 죽겠어!
"… 뭐?"
릴리아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스칼렛이 왜 죽어.
난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무언가에게서 머리를 뗐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정체를 알아넀다.
"… 스칼렛?"
"진짜… 피곤하면 오지 말라니까. 답답한 사람."
"너, 너…. 야. 괜찮아? 스칼렛!"
- 스카웃! 아니, 등에 불나잖아!
스칼렛의 상태는 심각했다.
날 안고 있던 앞쪽은 무사했지만, 등판은 마치 용암이 지나간 땅 같은 질감으로 변해있었다.
정장이 안 쪽에 있는 피부와 함께 녹아버린 것 같았다.
"아, 짜증 나네요… 아프기만 하고."
미간을 찌푸린 스칼렛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말투는 평소 같았지만,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치료, 치료를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여기! 응급처치라도 해봐요!"
난 추적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직 저쪽에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켄타우로스의 마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스칼렛! 괜찮아?"
그때,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을 크게 뜬 엘리스가 보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겠네. 내가 공격받았을 때 스칼렛과 같이 도우러 온 건가?
"엘리스! 응급처치할 수 있는 인원들 좀 불러줘."
"아, 알겠어."
"괜찮아요. 아가씨. 폐까지 다 망가진 것 같거든요. 성녀님이라도 오지 않으면 못 살 거예요."
- 스카웃! 이호연! 어떻게든 살려봐!
"… 나도 그러고 싶다고."
확실히, 스칼렛의 상처는 심해 보였다.
응급처치고 나발이고 아예 등이 녹아버렸으니까.
"케흑, 이거 엄청 아프네요. 괜히 대신 맞아줬다. 흐으…."
툭─
"스칼렛, 스칼렛!"
스칼렛의 목이 그대로 꺾였고, 나는 빠르게 스칼렛의 몸을 살폈다.
엄청난 고통에 쇼크로 기절한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진짜 죽는다.
"엘리스. 의료팀은?"
"추적팀에서 할 수 있는 건 응급처치 정도야. 아마 5분만 기다리면 의료팀이 올 거야!"
"… 늦어."
퍼엉!
그때, 목걸이로 변해 있던 릴리아나가 스칼렛에게 달라붙었다.
"스카웃! 일어나! 스카웃! 일어나라고!"
"야, 릴리아나! 너 지금…."
"뭐,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어디서…."
"… 하아. 엘리스.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
갑자기 튀어나온 릴리아나가 당황스러웠지만, 릴리아나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의료팀 도착까지 5분이라고 했지.'
5분이 뭐야. 스칼렛의 상태를 보면 여기서 1분도 더 지체되면 안 된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한다.
나는 룬의 결계를 펼쳤다.
릴리아나를 추적팀과 아이작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손에서 치유의 마력을 뿜어냈다.
"호, 호연아. 너 치유도 할 수 있어?"
"… 괘, 괜찮은 거야? 스카웃 살 수 있어?"
"잠시만. 조금 집중할게. 엘리스, 바깥에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줘."
"… 응."
"릴리아나, 너도 목걸이로 돌아가. 스칼렛은 걱정하지말고."
"아, 알았엉."
백아영을 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치유마법.
아무리 대충 배웠다고 해도 내 재능 덕분에 웬만한 힐러 이상으로 잘 구사할 자신이 있었다.
응급 조치의 역할은 확실히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스칼렛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켄타우로스의 꺼지지않는 마력이 점점 상처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력을 쏟아부어도 치유 속도보다 마력이 몸을 태우는 속도가 빨랐다.
내게 백아영만큼의 재능이 있었다면 몰라도, 난 성녀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난 고도의 집중상태에 들어갔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스칼렛의 몸을 태우고 있는 마력을 멈추고 동시에 치유까지 하는 법.
'…그냥 동시에 해버리면 되잖아?'
지금 필요한 건 백아영의 치유 마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베카가 보여줬던 룬의 결계의 극의.
룬의 결계를 완전히 지배한다면 쓸 수 있다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부서진 기숙사를 원상복구한 그 마법은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 못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될 게 어딨어."
물론 생물체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대로 스칼렛을 잃을 순 없었다.
이 발칙한 여자가 구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구해줬으니까.
나도 그대로 돌려줘야한다.
죄책감만 남겨주고 죽는 건 절대 못 보지.
두근─ 두근─
난 온몸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룬의 결계의 극의를 사용하기 위해선, 룬의 결계를 완전히 지배해야 한다.
하지만 난 레베카만큼의 숙련도가 없었고,당장 룬의 결계를 지배하려고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생명의 시간을 돌린다는 자연의 이치에 벗어난 마법을 만드는 건 아무리 내 재능이라도 불가능했다.
만약 시도한다해도 시간을 엄청나게 들여야겠지.
그러니 써야 하는 건 꼼수.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닌, 멈추는 방식을 사용한다.
룬의 결계 내부를 내 마력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력에 부여하는 속성은 '가속'이 아닌 '감속'.
주변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또 느리게 한다.
세상 만물에는 마력이 존재한다.
스칼렛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도 마력.
한 공간의 모든 마력을 멈추는 것.
다른 방해요소가 많다면 불가능하겠지만, 결계 안에 존재하는 건 생명의 불길이 꺼지고 있는 스칼렛 뿐이다.
저항이 없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난 마력을 조종하며 공간을 채워나갔다.
몸 전체가 따끔거릴 정도로 극한의 마력 운용.
피로감이 있는 지금 하기에는 꽤 부담이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더.
엘리스의 몸을 마사지했던 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공간 전체에 남는 부분이 없도록, '감속'의 속성을 가진 마력으로 꼼꼼히 채웠다.
잠시 후, 룬의 결계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아무리 룬의 결계가 있다고 해도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시간이 멈췄다기보단 매우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고 봐야겠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집중력과의 싸움.
스칼렛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 가던 켄타우로스의 마력을 몸에서 분리했다.
속도가 느렸기에 작업의 난이도 자체가 훨씬 쉬웠다.
그리고 빈 자리에 치유의 마력을 쏟아부었다.
공간 전체에 '감속'의 마력을 퍼트리면서 강하게 유지하고, 스칼렛에게 치유의 마력을 사용하는 것.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의 문제가 아니다.
마력과 아예 한 몸이 된 듯이 움직여야 했다.
'… 할 수 있어.'
내 재능.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
임솔에게 이기기 위해 하루하루 마력 수련을 해온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따끔─
엄청난 마력을 사용하는만큼, 내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온 몸의 세포들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조금씩 아물어가는 스칼렛의 등을 보며 나는 이를 악 물었다.
*
콰앙─ 파앙─
스칼렛은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분명 이호연을 밀어내려다가 공격을 대신 맞고, 폐가 타버리는 엄청난 고통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스칼렛?!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
자신이 구한 남자의 목소리다.
스칼렛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호연이 보였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등과 가슴 속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공격을 받은 게 꿈은 아니라는 것.
자신의 상처는 살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몸 내부의 장기가 타는 느낌을 분명이 받았으니까.
아이리스 길드의 치유팀이 오려면 짧아도 5분.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이게회광반조라는 걸까.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 생긴 걸 지도 모르겠다.
스칼렛은 걱정스러운 눈의 이호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칼렛 라이트."
"어?"
멍청하게 대답하는 남자에게, 스칼렛은 조금 더 확실히 말해줬다.
"'스칼렛 라이트'라고요. 제 풀네임. 아직까지 안 물어봤잖아요. 이 눈치 없는 사람아."
"… 스칼렛 라이트."
"응. 꼭 기억해요. 마지막이니까…. 릴리아나 님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하아.
스칼렛은 눈을 감았다.
개 같은 삶.
악착같이 살아서 성공 좀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남자한테 코가 꿰여서 이렇게 마무리할 줄이야.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아이리스 길드에 있을 때 했던 성공보다는 이호연과 릴리아나와 지냈던 잠깐이 즐거웠으니까.
'… 나쁘지 않긴 개뿔.'
좀 더 살고 싶었다.
평생 성공을 위해 수련에 힘썼고, 아이리스 길드에 들어가 누구나 바라는 성공을 이뤘지만, 그때보다 최근 몇 달이 훨씬 즐거웠다.
우습고 괴상한데다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즐거운 이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
쓰레기 같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남자.
이 남자가 다음엔 어떻게 행동할까 궁금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로맨틱하지 않게 대하는 건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것도 나름 매력이었으니.
생각하면 할 수록 아쉬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좋을 텐데….
스칼렛은 곤히 숨을 쉬었다.
죽기 직전에는 지금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데,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나보다.
이렇게 평온하잖아.
콰앙─!
"켄타우로스는 어떻게 합니까?!"
"너희는 부상자를 챙겨! 켄타우로스는 팀장급이 알아서 한다."
"…."
익숙한 추적팀 길드원의 목소리와 몇 천번이나 들은 길드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
그 외에도 땅을 밟는 구두소리와 수고했다며 왁자지껄 소리치는 소리.
스칼렛은 시끌시끌한 주변의 소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뭐지?'
왜 이렇게 의식이 또렷한 거지?
스칼렛은 이상함을 느꼈고, 어색함을자각하자마자 알아챘다.
더이상 등에서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통각 세포가 마비된 건 줄 알았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냉기는 잘만 느껴졌다.
마치 그냥 눈을 감고 땅에 누워있는 것 같은….
"스칼렛 라이트."
"…."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지."
스칼렛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까 몸을 던지며 간신히 살린 남자가, 입술을 꿈틀거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경험상.
저건 백 퍼센트 웃음을 참고 있는 거다.
"… 제가 왜 살아있죠?"
"누구 맘대로 죽으래. 아직 계약 기간이 몇십 년이나 남았는데. 스칼렛 라이트 씨."
"…."
아무래도 자신이 살아난 모양이다.
… 왜?
분명 폐가 타는 건 죽을 정도로 아팠는데.
이상하잖아.
살아나면 안되잖아!
마지막인 줄 알고 멋있는 인사도 한건데!
스칼렛은 부끄러움에 이호연의 몸을 밀어내고 도망치려 했지만, 아직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팔을 들자마자 등에 전기가 흐르는 것 처럼 따끔거렸다.
"어허. 지금 움직이면 아플걸."
"끄흑…."
스칼렛은 느껴지는 고통에 눈을 찡그리며 이호연을 바라봤다.
그는 이제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절대 안 잊을게. 스칼렛 라이트."
"… 그냥 죽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스칼렛 라이트. 릴리아나랑 인사는 좀 이따 시켜줄테니까 걱정마."
"흐으으윽…."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체인 목걸이를 흔들며 웃음을 짓는 이호연.
스칼렛은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