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3 323화. 아이린 & 엘리스 (2)
"그래. 1팀장. 내일 오전까지 프로젝트에 대한 진행 상황 보고하고, 켄타우로스의 마력 분석이 끝나는 대로 추적팀이 준비해야 할 수도 있으니 전달해놓도록."
"… 예. 알겠습니다."
오후 업무시간마다 진행되는 1팀장의 업무 브리핑.
아무리 딸바보 아버지인 아이작이라지만, 업무 시간에는 1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이린이든 아이작이든 그런 곳에서 서운해할 만한 성격은 당연히 아니었으니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 우리 큰 딸이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
하지만 아이작이 길드장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말을 꺼낼 정도로 보고하는 아이린의 표정이 안 좋았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만 보면 보이는데. … 혹시 너도 남자 문제는 아니지?"
"하아, 엘리스가 걱정돼서요."
여기서 대답하지 않으면 더 귀찮아질 걸 아는 아이린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질문에 답했다.
"엘리스… 그렇지. 하지만 뭐 어쩌겠니. 그래도 첫 실전을 제대로 치르기도 했고,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야."
"좋은 경험이라니요. 그때 엘리스의 모습 못 보셨어요?"
"처음부터 재앙 급을 만났으니 겁먹을 만도 하지. 아이린 너도 처음으로 바실리스크를봤을 때 나한테 매달려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탕-!
아이린은 얼굴을 붉히며 책상을 내려쳤다.
"…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엘리스가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데… 이호연이 온 뒤로 이상해졌어요.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엘리스도 이제 성인이야."
"… 아버지도 이상해졌어요. 엘리스가 남자랑 만나고 있다니까요."
딸들의 연애를 극도로 견제하던 아이작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무리 최근에 이상해졌다지만, 설마 남자를 만나는 것까지 내버려 두다니.
"아직 확실히 만나는 건 아니다."
"… 시간문제에요. 엘리스의 얼굴만 봐도 알아요."
"뭐, 걱정하지 말아라. 나쁜 놈인 것 같으면 내가 무조건 막을 테니까."
"……."
아이린은 아버지의 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스를 탐내는 남자 중에 좋은 남자가 있을 리가.
애초에 진짜 좋은 사람이라면 수준 차이를 느끼고 다가오지 않아야 한다.
엘리스와 연결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은 자신뿐인데.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는 말고. 컨디션 관리에 힘쓰도록 해라. 1 팀장인 네 컨디션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안 돼."
"… 알겠습니다."
아이린은 고개를 숙이고 길드장실을 빠져나왔다.
"어쩌지."
아버지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직 엘리스의 처녀성은 지켜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문제는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호연의 실력은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의 은신을 꿰뚫어 봤을 때 이호연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헌터라면 누구나 마력을 사용할 때 티가 나기 마련.
마치 길가에 떨어진 돈을 줍듯 편안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낸 그의 실력이라면 아이작의 눈에서 숨어 프랑스에서 거사를 치를 수도 있다.
'한국에 따라가야 하나?'
프랑스에서 거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시간문제였다.
인생의 목표가 엘리스였던 아이린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낭패.
1팀장실에 돌아온 아이린은 의자에 앉아 엘리스의 사진을 보며 고민을 이어갔다.
"엘리스…."
아이린은 엘리스의 어릴 적 사진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사실 사회 통념상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다.
동생을 사랑하는 것.
하지만 이미 엘리스와 자신은 사회의 둘레를 벗어났다.
미학(美學)의 관점으로 엘리스와 아이린은 법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물론 아이린 자신만의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아이린은 그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리스신화의 미의 신인 아프로디테가 변덕스럽고 기분파여도 용서되었던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
그렇기에 자신과 엘리스도 금단의 행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린은 지금까지 모아왔던 엘리스의 사진들을 훑었다.
엘리스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후, 자신의 취향대로 성장시킨 엘리스의 성장기는 그녀의 보물이었다.
마치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도화지처럼그녀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 남자 때문에 조금 물들었지만, 다시 새하얀 색을 되찾을 게 뻔하다.
그리고 그 새하얀 도화지를 붉게 물들이는 건 자신이어야만 한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띠리리리리-
"… 바로 왔다고?"
그때, 그녀가 엘리스의 숙소 주변에 설치한 알람 마법진이 울리기 시작했다.
*
"끝났다아아…."
털썩-
릴리아나는 마법진을 완성하자마자 뒤로 벌러덩 누웠다.
레베카는 피곤한 듯 하품을 했고, 기다리던 스칼렛은 짝짝짝 박수를 쳤다.
"고생하셨어요. 레베카 씨. 릴리아나 너도."
"응응. 애기 아빠도 구경하느라 힘썼네."
"죽을 것 같애… 머리를 너무 썼어…."
"제가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스칼렛이 나눠주는 커피를 받아마시며 릴리아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진짜 뜨거운데. 어쩌냐 이거. 과부화아니야?"
"단 걸 먹어야 해. 빵, 음료수, 정액…."
"마지막에 이상한 단어가 나오지 않았어? 으응?"
나는 서큐버스의 헛소리에 눈을 끔벅거리는 레베카를 보며 마법진을 확인했다.
켄타우로스의 위치를 추적하는 마법진.
레베카의 주도로 만들어진 마법진은 켄타우로스가 어디로 도망쳐도 잡을 수 있는 설계였다.
완성된 마법진을 보니 설계부터 의도가 모두 이해가 되었는데, 도대체 이걸 혼자 어떻게 만든 거지? 내가 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레베카 씨, 이거 어떻게 혼자 만들었어요?"
"룬의 결계를 베이스로 한 거라 의외로 쉬웠어."
"우와."
천재야 천재.
나는 레베카 씨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때 스칼렛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호연님. 그럼 분석이 끝났다고 길드장님께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아, 오늘 바로 출격하는 건 안 된다고도 해줘."
"알겠습니다. 아마 빠른 출격을 원하실 텐데 내일은 괜찮으신가요?"
"24시가 넘었으니 내일이라고 우기지않는다면, 내일 아침은 괜찮지."
나도 그놈하고 대화 좀 나누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잘났길래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스칼렛이 보고를 하러 간 뒤, 나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피곤해애…."
"그러게. 릴리아나. 조금 쉴까."
"너무 졸리면 좀 주무세요. 릴리아나도 좀 더 자고."
어제 자기 직전까지 마법진 분석을 해놓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시 일을 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
특히 릴리아나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으으응. 조금만 잘까."
"나는 릴리아나랑 잘래."
"으, 으응? 나는 괜찮은데."
"릴리아나. 우리 친해진 거 아니었어?"
레베카는 릴리아나의 몸을 끌어안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릴리아나는 귀찮은 듯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이 좋게 같이 자면 되겠네."
나는 침대에 쓰러진 둘을 보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고, 저녁에 가까워지는 시간.
아마 내일은 켄타우로스의 은신처를 습격할 테니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잠시만, 내일은 월요일이잖아.'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 기말고사가 하는 날이다.
다른 히로인들은 한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연락으로 때운다고 쳐도, 당장 옆에 있는 엘리스를 이대로 보내는 건 아쉽잖아.
"엘리스라도 만나러 가야겠네."
저번에 다 못 해줬던 마사지를 이번에 다 해줘야지.
- 나 : 엘리스. 지금 찾아가도 될까? 내일이면 아카데미에 돌아가니까 그전에 못 했던 마사지해줄게.
- 엘리스 : 응. 와도 괜찮아.
"오케이."
할 일은 빠르게 끝내야지.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확인한 뒤 엘리스의 숙소로 향했다.
*
"빨리 왔네."
"바로 왔거든."
나는 익숙한 듯 엘리스의 숙소로 들어갔다.
넓은 집을 혼자 쓰는 게 아직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엘리스는 편한 것 같으니 뭐.
이렇게 넓으면 귀신 나올까 봐 무섭지 않나?
"들어와. 안쪽에 준비해놨어."
"응. 아, 방문은 이거 하나가 끝이지?"
"… 그렇긴 한데, 그건 왜?"
"아무 이유 없어. 그냥 궁금해서."
"흐음. 그래."
나는 엘리스가 방 안으로 앞장서서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준비한 마법진을 문 앞에 설치했다.
'혹시 모르니까.'
인생이 얼마나 위험한데. 보험은 들어놔야겠지.
방 안의 구조는 저번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내일이면 아카데미에 돌아가니까 오늘 다 끝내버리자."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 본방을 하진 못할 것 같네.
"나 내일 안 가."
"… 왜?"
"그러기로 했어."
괜히 열심히 하는 척 손가락을 풀고 있는데, 엘리스가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네가 왜 안가? 시험 봐야지."
"사람들이 신경이나 쓰겠어? 대충 아이리스 길드 일이니까 안 왔겠구나 하겠지."
"…."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네.
겸사겸사 특별 시험에 엘리스도 넣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이 한두 개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
대충 나랑 끼워팔기로 넣으면 얼마든지 가능할거다.
"그래도 신기하네. 어떻게 한 거야?"
"비밀이야. 아빠랑 대화를 좀 했거든."
"오, 애교라도 부린 건 아니지?"
원작에서 한 번 정도 나온 기억이 난다.
내가 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혀를 굴리던데 그게 실제로 있는 설정일까.
"… 애교라니?"
"농담이었어."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저렇게 살벌하게 쳐다봐.
얘도 언니를 닮은 건가.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일 가는 게 아니면 좀 천천히 올 걸 그랬네. 켄타우로스까지 생포하고 마사지하는 게 깔끔했을 텐데."
"… 뭐라고 했어?"
"응? 아, 난 오늘 까지 인줄 알고 급하게 온 거거든. 싫다는 말은 아닌데 그게 마나를 더 잘 쓸 수 있잖아."
"그거 말고 그다음에. 켄타우로스를 생포한다며. 진심이야?"
"… 내가 그랬나?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희망 사항을 입 밖으로 내버렸네.
사실 레베카 씨의 말에 따르면 켄타우로스도 세뇌에 걸린 상태라고 한다.
그전에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하니, 믿어도 되겠지.
세뇌만 풀 수 있다면 우리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다.
아님 말고.
"생포… 그래. 뭐 노력은 할 수 있으니까."
다행히 엘리스는 이미 나를 어느정도 포기한 듯 고개를 젓는 정도로만 반응했다.
"크흠. 몸은 괜찮고?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거 아니야?"
나는 그 틈을 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마침 엘리스의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편했다.
"… 뭘 했다고 컨디션이 별로겠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야. 같이 켄타우로스 추적팀 실습했잖아."
진짜 켄타우로스도 만났으니 첫 실전인 엘리스는 엄청나게 힘들었을 거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피로가 잔뜩일텐데.
"아니.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추적도 제대로 못 했고, 전투도 제대로 못 했지. 그냥… 하아."
엘리스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못 들은 거로 해줘. 미안. 아니면 오늘은 그냥 돌아갈래? 네 말대로 켄타우로스를 해결한 뒤에도 시간이 있긴 한데."
아마 나한테 화풀이를 한다고 느낀 걸까.
아니면 추한 변명을 하는 게 창피했던 걸까.
엘리스는 눈을 감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굉장히 피곤해하는 모습이었는데, 확실히 이럴 때는 혼자 내버려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
'… 오늘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