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0 310화. 엘리스 (3)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나는 내 몸에 딱 붙은 엘리스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엘리스는 '흐음-' 같은 콧소리를 내면서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딱 봐도 어색한 게 사람하고 같이 누워본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너는 어떻냐'고 물어보다니….
'당연히 존나 좋지.'
풍기는 살냄새도 그렇고, 내 아랫배에 닿는 엉덩이도 그렇고,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등도 그렇다.
그냥 엘리스라는 여자의 모든 부분이 문제였다.
이대로 끌어안아서 덮치고 싶을 정도로 좋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
쓰레기인 나에게도 순정이 있는 법.
나는 침착하게 엘리스의 상태창을 열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92 ]
- [ 성욕 : 80 ]
- [ 식욕 : 4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따뜻하긴 하네. 마사지랑은 다른 따뜻함이야. … 혹시 부끄러워서 몸이 뜨거워진건가?
"…."
뭐지.
혹시 나 꼬시는 거야?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서 안아주면 되는 거지? 맞지?
어제 길드장 앞에서 담판을 지은 게 너무 효과적이라서 이러는 건가?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 고민하던 그때, 엘리스가 먼저 말했다.
"이러고 있으면 뭐 해?"
"정확히 어떤 상황을 말하는거야?"
"다른 여자들을 이렇게 껴안고 있을 때?"
이번엔 진짜 약간 무서웠다.
일단 엘리스가 이러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분명한 건 이대로 끌어안아주는 건 틀린 답이다.
괜히 돌려 말하다가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 엘리스. 갑자기 왜 그래?"
"딱히 이유는 없는데."
미치겠네.
다행히 진지하게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지, 엘리스는 대화를 중단하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애완동물이 투정을 부리듯, 정수리로 내 가슴을 꾸욱 눌렀다.
꾸욱- 꾸욱-
"으으음."
"…?"
이건 무슨 뜻일까.
고양이의 애정 표현 같은 건가?
엘리스는 세팅한 머리가 망가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가슴에 머리카락을 비볐다.
엘리스의 좋은 향기가 내 옷에 배기는 것 같았다.
분명 기분은 좋다.
예쁜 여자가 애교를 부리는 것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안 이러던 애가 이러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앞머리가 흔들리도록 머리를 움직이는 걸 보니 열심히 하는 거 같긴 한데, 왜 그러는 거냐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가슴을 내어준 채 엘리스의 이상행동을 지켜봤다.
건들자니 화를 낼 것 같고, 대화가 통하지도 않으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듯이 내 가슴을 내주고 엘리스의 가슴을 취해볼까.
'역시 그건 아니지.'
뚝-
그러나 엘리스의 귀여운 짓은 30초도 안 되어 끝났다.
내 가슴에서 머리를 뗀 엘리스는 순식간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날 내려다봤다.
"어땠어?"
"어, 좋았어."
"흐음. 그렇구나."
방금은 너무 멍청해보였나?
조금 더 좋은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생각이 나지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엘리스를 쳐다봤다.
엘리스는 눈을 찌푸리더니,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치우고 재차 말을 이었다.
"고마웠어. 생각한 거랑 완전히 다르네."
"무슨 생각 했는데?"
"아무 느낌 없을 줄 알았어."
엘리스는 거실을 가로질러 전신거울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마치 내가 있는 걸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머리 정리를 끝낸 엘리스는 침대로 걸어왔다.
"부탁 들어줬으니까 밥은 사줄게. 가자."
"… 엘리스?"
"밖에서 기다릴게. 준비하고 나와."
몸을 돌린 엘리스는 그대로 현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퍼엉!
"쟤는 진짜 이쁘다고 막 나가네!"
그와 동시에, 침대 구석에 있던 목걸이가 릴리아나로 변했다.
"안그래?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마음대로 스킨십하다가 나오라고 하고. 완전 제멋대로야. 예쁘면 다 되는 줄 아는 인간. 흥."
"… 너는 평소 네 행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나는 인간이 아니라 서큐버스거든?"
이 서큐버스는 내 주변 여자 중에 외모덕을 제일 보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걸 모르는지, 계속 불평을 해댔다.
"… 일단 좀 나갔다 올게. 점심이나 먹고 와야겠네."
사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릴리아나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상한 짓을 하더니 휙 나가버렸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너무 귀여운데.'
예쁘기까지 하니 효과가 두 배.
역시 자신의 외모를 사용하는 법을 드디어 깨달은 걸까.
"나도 데려가!"
"금방 나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스칼렛이랑 놀든가."
"저 여자 때문에 사라졌잖아. 나 심심행."
"밥 먹으러 가는 거라 어차피… 하아, 그래. 가자."
릴리아나가 내 팔에 매달리는 걸 보고 설득을 포기했다.
역시 외모로 갑질하는 건 서큐버스가 최고구나.
결국 나는 릴리아나를 목에 걸고 바깥으로 나왔다.
*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식당의 외관을 보고, 나는 살짝 기가 죽었다.
- 지옥의 마왕님 거처가 이거랑 비슷할 거 같은데.
"… 그러게."
오늘만큼은 릴리아나의 말에 동의했다.
'이게 식당이야 성이야.'
저번에 스칼렛이 데려갔던 레스토랑도 충분히 고급스러웠지만, 이번 식당은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다.
물론 이게 엘리스에게는 보통이겠지.
나와 엘리스는 입구를 막고 있는 가드에게 다가갔다.
"예약은 하셨습니까?"
"미안. 오늘은 그냥 왔어요."
"알겠습니다. 엘리스 양과 손님 1분. 전달해놓겠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가드는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길을 비켜줬다.
저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엘리스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말 없이 엘리스의 뒤를 따랐다.
"와…."
- 여기서 방송하면 대박 나겠다. 그치.
여기 있는 장식 하나만 훔쳐 가도 4인 가족의 1년 치 생활비가 나오지 않을까.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안 쪽으로 들어갔다.
깊은 곳에는 룸이 있었는데, 아마 엘리스 같은 VVIP들을 위한 자리인 것 같았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항상 먹던 거로 두 개 부탁해요."
웨이터는 주문을 받고 돌아갔고, 나와 엘리스만이 자리에 남았다.
엘리스는 뻔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그게 꽤 부담이었다.
난 어색함을 깨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다.
"… 요즘 몸은 어때? 괜찮아?"
"응.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졌어. 길드 훈련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번 주는 쉬고 있지만."
"나도 여기 온 이후로 훈련을 못 해서 아쉬웠는데 너도 그렇구나."
나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길드원 중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데 말 못 하는 사람 분명히 있을 거다.
"넌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때, 엘리스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오늘따라 그냥 하는 일이 참 많네.
어차피 물어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대답을 생각했다.
"인생이 원래 그렇잖아. 언제 망할지 모르는데 잘 나갈 때 열심히 해놔야지."
고민은 짧았다.
잘 나간다고 방심하면 훅 가는 것도 금방이다.
저번 삶에서 나름 먹고살았던 것도 그 이유고, 지금 여자들과 관계를 만든 것도 그래서겠지.
쓰레기처럼 살았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하기 힘들지만, 열심히 살았냐고 물으면 당연히 YES다.
내 대답을 들은 엘리스는 눈을 깜박. 깜박. 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길드에 오면 내가 먹여 살려줄 수 있는데."
"… 오늘 왜 그러는데 진짜."
때마침 웨이터가 에피타이저를 가지고 왔다.
엘리스는 큭. 하고 장난스럽게 웃더니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앞에 앉은 사람은 속이 타들어 가는데, 음식이 잘도 입에 들어가는구나.
'이건 뭐 내가 공략당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앞에 놓여있던 스프를 입에 가져갔다.
아직도 엘리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밥은 먹어야지.
내 입으로 스푼이 쏙 들어가자마자, 나는 스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뭐야 이거."
스프가 혀에 닿자마자 내 온몸이 알아챘다.
이건 음식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입은 다음 한 입을 원하는데도, 그릇에 있는 이 스프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먹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 먹어보면 다들 그렇게 반응하더라."
내 맞은편에 앉은 엘리스는 익숙하게 스프를 떠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살짝 정신이 들었다.
그래. 엘리스랑 같이 왔는데 찌질한 모습만 보일 순 없지.
호감 있는 남자를 식당에 데려왔는데 첫 모습이 스프가 아까워서 못 먹는 모습이면, 있는 정이 다 떨어질 거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식사했다.
물론 메인요리가 나왔을 때는 너무 아까워서 스테이크를 최대한 작게 잘라먹었지만, 들키진 않았겠지.
"입맛에 맞았어?"
"응. 엄청 맛있다."
우리는 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내게도 상태창이 있다면, 엘리스에 대한 호감도가 10은 올라갔을 정도로 맛있었다.
게다가 밥도 사준다니.
혹시 천사인가?
- 나도 달라구! 빨리 포장해달라고 해줘!
그에 비해 내 머릿속의 악마는 아까부터 헛소리를 해왔다.
겉보기에 맛없어 보이는 에피타이저때는 조용히 있다가,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부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 하아."
- 포장해줘! 안 해주면 스카웃한테 이를 거야!
그래. 데려왔을 때부터 뭔가 사건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했다.
"저기, 엘리스."
"응?"
엘리스는 후식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식사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찌질한 남자가 되지 않기로 했는데, 이 미친 서큐버스때문에 결국은 이런 말을 하게 되는구나.
"… 여기 테이크 아웃도 해주나?"
"테이크 아웃?"
엘리스는 잠깐 내 말을 곱씹어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쪽팔리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엘리스의 얼굴은 꽤 귀여웠다.
엘리스가 옆에 있던 버튼을 누르자, 금방 웨이터가 방으로 들어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오늘 먹었던 메뉴로 테이크 아웃 좀 해줘요. 제가 집에서 먹고 싶어서요."
"아, 네. 셰프에게 전하겠습니다."
엘리스는 자기가 먹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웨이터의 눈이 잠깐 내게 향하는 걸 분명 확인했다.
이런 주문을 한 적이 없으니 날 의심하는 거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괜히 죄책감이 든다.
- 야호! 스테이크! 스테이크!
릴리아나는 내 속도 모르고 신나게 스테이크를 연호했다.
너는 진짜 돌아가서 보자.
"… 고마워."
나는 직접 누명을 써준 엘리스에게 감사를 전했다.
오늘의 컨셉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엘리스의 표정을 보니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혹시 밥 한 끼 하는 데이트가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럼 침대에는 왜 누운 거야?
"오늘은 어땠어?"
"응?"
엘리스의 말이 내 고민을 끊어냈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비운 엘리스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나랑 같이 한 식사는 어땠냐고 묻는거야."
"영광이었지. 식사도 맛있었고, 파트너도 좋았고."
다행히 내 긴장도 조금은 풀렸다.
엘리스의 이상행동에 조금 적응이 된 거 같다.
"그때 했던 말은 아직도 유지되는 중이야?"
"언제?"
"언니를 만나고 나서 했던 말."
"… 외모 얘기 말하는거야?"
"응."
분명 그런 적이 있었지.
아이린의 외모를 질투하는 것 같은 엘리스에게 했던 말.
내가 아는 사람중에 외모는 엘리스가 최고라고 했었다.
"당연히 유지중이지. 아마 평생 유지될걸."
"흐음. 그래?"
엘리스는 스푼으로 유리잔을 통통 치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합격."
"뭐가 합격인데."
"그런 게 있어."
분명 아이작도 내게 저런 말을 했었는데.
아빠나 딸이나 똑같구나.
"슬슬 일어날까? 다음에도 먹고 싶으면 말해. 같이 오자."
"응."
엘리스는 시원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를 막고 있던 벽 하나가 깨진 느낌이다.
직접 외모에 대해 말하는 것도 원래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큰 변화였다.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그걸 받쳐주는 외모와 능력이 있으니 미워할 수 없는 느낌.
게다가 행동 하나하나에 그녀의 프라이드가 묻어있었다.
남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늘어난 것 같았는데,내 입장에선 더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음에 여기 온다면 절대 릴리아나를 데려오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