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9 309화. 엘리스 (2)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부부 사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둘의 좋은 금실을 보여주듯, 길드장실 옆에는 부길드장실이 딱 붙어있었다.
어릴 적에 자주 드나들던 부길드장실의 문 앞에 선 엘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 응. 들어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업무에 한참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눈을 이 쪽으로 돌리지 않고 있었다.
"… 엄마."
"어머, 엘리스?"
방에 들어온 부하의 보고를 기다리던 부길드장, 소피아는 기운 없는 딸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혹시 불편한 거라도 있니?"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엄마가 보고 싶어서?"
"…."
츄우-
손으로 키스를 하는 어머니를 보며 엘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젋게 사는 부모님을 둔 건 꽤 피곤한 일이다.
어머니와의 시간은 처음 프랑스에 온 날 충분히 보냈다.
오늘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고민 상담이었다.
"… 고민이 있어서요."
"으흥. 실전에 대한 이야기야?"
"비슷하긴 해요."
엘리스는 소파에 털썩 앉았고, 소피아도 딸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잠시 업무를 중단했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리스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텐션이 낮아진 엘리스는 처음이었기에 어머니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엘리스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고, 소피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딸과 눈을 마주쳤다.
"혹시, 남자문제?"
"… 네."
소피아는 익숙하게 커피를 내려 딸에게 권했다.
엘리스가 고민이 있다고 찾아온 건 처음이니, 당연히 남자에 대한 고민이겠지.
어릴 때부터 확실하게 해놓은 성교육이 효과가 있었다.
[이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 헷갈리면 엄마에게 물어봐라.]
소피아가 계속해서 반복주입한 말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강한 남자와 인연을 맺은 그녀의 말이었기에 엘리스도 신뢰할 수 있었다.
"같이 온 이호연 생도? 아직 얼굴은 못 봤는데."
"… 네."
"어머, 뜨겁네. 우리 딸은 그 아이가 좋은 걸까?"
"… 모르겠어요. 괜찮은 남자 같기는 한데, 너무 나쁜 놈이에요."
괜찮은 남자인 건 맞지만, 단점이 너무 많다.
그것도 그녀의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점들이었기에 더욱 문제였다.
여자를 몇 명씩 끼고 다니면서 그녀들을 전부 사랑하려고 하는 욕심쟁이.
그러면서도 다른 여자들에게 손을 뻗는 바람둥이.
하지만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하는 행동 때문인지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다.
재밌게도 항상 이호연이 엘리스를 보며 하는 생각을, 엘리스도 이호연을 보며 똑같이 하고 있었다.
"엘리스, 너는 엄마가 누구랑 결혼했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설마 우리 길드장님보다 나쁜 남자가 있을까?"
"…."
"일단 설명해봐. 엄마가 듣고 판단해볼게."
엘리스는 잠깐 고민했다.
만약 자신의 아버지와 이호연이 하나부터 열까지 누가 더 쓰레기인지 겨룬다면….
'분명 좋은 싸움이 될텐데.'
엘리스는 천천히 자신이 아는 이호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 그리고 뒷조사를 했을 때.
같이 서바이벌 시험을 했을 때.
자신의 선천적 마력 장애를 치료해줄 때.
그 외에 아카데미 생활들.
마지막으로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을 때.
그리고 모든 설명을 마친 엘리스는, 입을 벌린 채 눈을 찌푸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엘리스. 그 남자랑은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그렇긴 한데요…."
엘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솔직하게 말했구나.
저 쓰레기를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섞었어야 했는데.
"으음. 엘리스.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네."
"이호연이란 애가 다른 여자가 있으면서 널 만나잖아? 그러면 너도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그 아이를 만나는 건 어때?"
"… 그건 싫어요."
"왜? 호연이는 마음대로 살잖아."
"그렇지만… 엄마도 안 그러잖아요."
이호연이 그렇게 한다고 자신도 그러긴 싫었다.
그렇게 하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하면 이호연과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기적인 생물이다.
소피아는 엘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극약처방을 해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 걸 보니 중증이구나.
"우리 딸. 고민이라고 했으면서 마음이 꽤 기울었나 봐?"
"저도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 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소피아은 고민하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총명했던 아이가 이렇게 된 걸 보니 자신감 처방이 필요했다.
"대충 알겠어. 엘리스. 일단 네가 하고 싶은 대로해 보는 건 어때?"
"제가 하고 싶은 대로요?"
"응. 일단 그 남자한테 찾아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데이트를 해도 좋고, 같이 침대에 누워있어도 좋고. 아, 물론 말 그대로 누워있기만 해야 해? 여자는 쉽게 몸을 내주면 안 되거든. 그 순간부터 남자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니까."
"그, 그게…."
갑자기 진도를 빠르게 나가는 엄마를 보며 당황한 엘리스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소피아는 멈추지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이 가치관이 틀리지않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왜?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해요. 갑자기 호연이 방으로 들어가서 '나 침대에 누울게?' 하고 누울 수도 없잖아요."
"그렇게 해."
"… 네?"
"엘리스."
소피아는 딸이 정말 사랑에 빠졌다는 걸 실감했다.
그렇게 자신감에 넘치던 아이가 이렇게 소심해지다니.
날카롭던 호랑이가 잠시 못 본 사이에 집고양이가 된 느낌이었다.
"항상 얘기했었지? 남자를 따라가지 말고, 남자를 묶으라고."
"… 네."
엄마의 연애관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결국 남자는 좋은 여자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하룻밤 장난 정도는 봐줄 수 있다. 어차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자신이니까.'
그 덕분에 저런 쓰레기에게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거겠지.
"자신감 있게 행동해. 남자란 생물은 예쁜 여자에겐 이상하게 관대하거든."
"…."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이미 마음은 기울었지만, 확실한 말을 원했다.
소피아는 여자의 그 마음을 알기에 정확한 응원을 해줬다.
"우리 딸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남자는 세상에 절대 없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봐."
"... 알겠어요.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해볼게요."
"응. 항상 자신감 있게. 알겠지?"
"네."
그래.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
잘 안되면 그때 생각하고 잘 되더라도 그때 생각하자.
그 남자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설마 화를 내진않겠지.
고민을 끝낸 엘리스는 결의에 찬 눈으로 부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자신감있게 나가는 딸을 보며, 소피아는 요염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후우. 그래도 마지막엔 좋은 표정이 되었네요. 처음에는 표정때문에 들킨 줄 알았어요. 그렇죠. 달링?"
"크흑… 흐읍. 흐윽…."
스르륵-
잠시 후, 입에 주먹을 박은 채 눈물을 흘리는 금발의 미남자가 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까지 벽과 동화하고 있었는데도 엘리스가 눈치채지 못한 남자.
엘리스의 아버지이자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 아이작이었다.
"그만 울어요. 아이작. 엘리스도 이제 어른이에요."
"아, 알아. 하지만, 평생 내가 키우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런 놈한테. 크흑."
자리에서 일어난 소피아는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안았다.
"그 정도 남자가 어디 있다고. 능력도 좋고 인성도 좋고, 평생 뜯어먹을 얼굴도 있잖아요. 원래 뛰어난 수컷이 아름다운 암컷을 차지하기 마련이에요. 마치… 당신처럼?"
"… 허니."
"달링… 엘리스 때문에 못 한 거, 마저 할까요?"
여기까지가, 엘리스가 이호연의 숙소 앞에 찾아오게 된 계기였다.
*
나는 눈앞의 엘리스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랑 다르게 힘을 준 모습을 보니 왠지 설렌다고 해야하나.
원래 예쁘던 애가 풀 세팅까지 하니까… 진짜 존나 예뻤다.
"음, 엘리스? 잠시만.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
"아니. 안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 안이 좀 더러운데 괜찮아?"
"응. 괜찮아."
"알았어. 들어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엘리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의견이 엄청나게 강했다.
원래 저렇게 말하면 예의상 분위기를 읽고 물러나는 게 눈치빠른 엘리스의 장점이었는데, 오늘은 뭐랄까.
'… 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은데?'
자신감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배짱이라고 해야하나? 여유?
아무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 실례."
엘리스는 내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일부러 바깥에서 말을 크게 한 게 효과가 있었다.
침대 위에 돌돌 말려 있던 이불은 그대로였지만, 안에 릴리아나는 없었고 목걸이 하나만 덜렁 놓여있었다.
스칼렛은 당연히 사라진 뒤였다.
역시 둘 다 눈치가 빠르다니까.
"음, 마실 게 없어서 미안하네. 거기 앉아있을래? 물이라도 가져올게."
"여기서 지내고 있었구나."
엘리스는 의자를 꺼내 앉고는 내가 지내는 숙소를 살폈다.
"응. 기숙사랑 크기가 비슷해."
"좀 더 좋은 곳으로 올려달라고 할게."
너무 좋다. 라는 뜻으로 말한건데, 엘리스는 부담스러운 말을 해왔다.
"아니아니,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
"그렇지만 원래 집보다 좁잖아?"
"오래 있을 것도 아니잖아. 그냥 이렇게 지낼게."
"그래?"
"…."
확실히 어릴 때부터 부자로 자란 애들은 나랑 생각하는 게 달라.
엘리스는 대화를 멈췄고,말이 이어지지가 않을 것 같길래 그 틈을 타 시원한 물을 떠 왔다.
"자, 이거라도 마셔."
"고마워."
꼴딱꼴딱-
시원하게 물을 마시는 엘리스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 비서님은 안 따라왔네?"
"응. 길드 내부는 안전하잖아."
"…."
"…."
나는 어색한 침묵과 함께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는 불편하지도 않은 지 물을 마시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왜 내가 대화 주제를 꺼내야 하는건데.
설마 진짜 놀러 온 거였어?
어쩌지.
사실 여자와 섹스는 여러 번 했지만, 여자사람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은 없었다.
그건 또 다른 영역이잖아.
나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내다가,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태창'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90 ]
- [ 성욕 : 7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확실히, 엄마 말이 맞아. 얘도 남자야.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가 않네.
'… 엄마?'
이걸로는 엘리스가 원하는 걸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엘리스는 대화할 의향이 없어보이니, 내가 말을 꺼내야겠지.
나는 태연하게 엘리스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걸었다.
"엘리스. 밥은 먹었어?"
"아니."
"밥이라도 같이 먹으러 갈래? 밥은 내가 살 테니까 네가 좋은 식당 좀 소개해줘."
나이스.
난 속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방금 진짜 좋았다.
너무 멋있어서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기전에 이불 안에서도 '와, 오늘 진짜 멋있었다.' 하고 생각날 정도.
하지만 엘리스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해왔다.
"좋아. 근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당연하지."
"침대에 누워줄 수 있어?"
"응?"
엘리스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 자는 것처럼 누워봐."
"… 어, 알았어."
엘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침대 한 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엘리스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딱히 명령받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예쁜 여사친과 노는 기분?
그리고 침대에 눕고 나서야 깨달았다.
'혹시 엘리스가 자신의 외모를 100% 활용하는 경지에 도달한 건가?'
엘리스가 이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 모든 일이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게다가 거부감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위험한데.
이렇게 날 세뇌해서 죽이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물론 엘리스는 그런 명령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있는 내 옆에 똑같이 누울 뿐이었다.
"으음…."
엘리스는 그대로 눈을 감으며 내 가슴에 등을 붙였다.
향긋한 머리향과 살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혔고, 엘리스의 엉덩이가 내 아랫배에 닿았다.
그녀는 그 자세로 내게 질문했다.
"따뜻하긴 한데. 너는 어때?"
"… 응? 어?"
'죽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나는 살짝 붉어진 엘리스의 귀를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