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8 308화. 엘리스
"… 엘리스도 데려갈 수 있을까요?"
이호연과 아이작의 대화를 듣던 엘리스는 갑자기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잊지 않았구나.'
좋은 경험을 시켜주겠다던 그의 말.
인사치레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나서, 엘리스는기분이 좋아졌다.
"엘리스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침 같이 현장 체험을 하기로 온 거니까."
"… 아빠. 정말로?"
"그래. 너도 실전 경험을 쌓을 때가 됐어."
결국 엘리스도 참여하는 쪽으로 대화가 흘러가자, 그녀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이제서야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준 것 같아서.
드디어 어린아이에서 벗어난 것 같아서.
기대감과 기쁨, 설렘. 감사까지.
이호연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호연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이어지는 폭탄 발언.
엘리스는 깜짝 놀라 이호연을 막으려 했지만, 이호연은 엘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엘리스. 길드장님이 널 진짜 위험한 곳에 데려갈 리가 없잖아. 들뜨지 말고 진정해. 같이 좋은 경험 하기로 했던 거 잊었어?"
"…!"
그는 자신에게 제대로 된 경험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줬다.
엘리스는 그제서야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 맞아. 생각해보니 이상해. 지금까지 위험한 곳에 절대 보내지 않았잖아. 켄타우로스는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날 데려간다고?"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아버지의 행동과 너무 달랐다.
절대 자신을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으려던 아버지가 먼저 실전을 권하다니.
"그런 게 아니란다. 우리 딸. 너희가 처음 같이하는 첫 추적인 만큼, 조금 더 안전하게 하려 했을 뿐이야. 딱히 속이려는 건 아니었어. 이호연. 네가 정 원한다면 제대로 된 추적조에도 포함시켜 주마. 그건 네 선택이니까. 하지만 엘리스는 아직이야."
"…."
아이작의 말에, 엘리스는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아이작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첫 실전인데 조금 더 안전하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위험한 건 맞잖아.'
그렇게 평소처럼 두려움에 패배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려던 때에, 그가 또 움직였다.
"길드장님. 저는 제대로 된 추적조에 엘리스도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꾸욱-
엘리스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이호연을 보며 침을 삼켰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자신의 아버지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안돼. 너무 위험해. 네가 따라오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내 딸 엘리스까지 데려갈 순 없어."
"언제까지 그렇게 보호만 하실 거예요. 이제는 엘리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건 네가 아니라 나와 엘리스가 판단할 일이야. 더는 관여하지 말거라."
"그럼 엘리스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뭘 원하는지."
"어. 어?"
대화를 듣던 엘리스는 눈을 끔벅거렸다.
이호연은 그런 엘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엘리스. 네가 정해. 어떻게 하고 싶어."
"나, 나는…."
당연히, 가고 싶다.
자신의 실력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에이스만 모인 길드의 추적팀이라고 해도, 1인분 할 자신은 있었다.
이미 자신은 생도의 수준이 아니니까.
게다가 언제까지나 뒤에서 숨어있기는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켄타우로스가 그렇게 강하다고 하던데.
첫 경험부터 그렇게 강적을 만나야 할까.
엘리스가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엘리스, 우리 딸. 아빠가 말했잖아. 첫 추적이니까 조금 더 안전하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조금씩 경험을 쌓아가도 늦지 않아. 첫 경험부터 이렇게 위험한 일에 따라올 필요는 없잖니…."
"…."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몇 번이나 저렇게 속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데려가 준다고 했으니까.
다음에도 분명….
"엘리스."
그때, 엘리스는 손등 위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자신의 손 위에 이호연의 손이 올라와있었고, 옆으로고개를 돌리자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이호연이 보였다.
"할 수 있어. 같이 가자."
엘리스는 정체불명의 자신감이 자신의 가슴을 채우는 걸 느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엘리스는 아이작과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다음 날.
아이리스 길드장실.
금발의 미녀가 책상을 양 팔로 책상을 내리찍었다.
길드장실에 놓여있는 가구라서 마력 처리가 되어있어서 망정이지, 일반 원목 가구였다면 이미 부숴졌을거다.
아이작은 얼굴을 찌푸린 아이린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 우리 큰 딸.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아버지. 추적 팀에 엘리스가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으응. 미리 말했을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하는 척만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다 엘리스가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에요?!"
"…."
아이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이린을 보며 눈을 피했다.
"아버지…!"
"…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이작은 아직도 생생한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 아빠. 나도 가고 싶어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무조건 해낼게요.
귀엽기만 하던 딸이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아이작은 엘리스의 손을 잡고 있던 나쁜 새끼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게 남자에게 딸을 뺏긴 아버지의 감정인가.
평생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든 긍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손을 잡았을 때 엘리스의 행복한 표정이 지금도 아이작의 눈앞에 선했다.
"크흑…."
"아버지!"
"아이린. 너는 남자를 데려올 때 미리 허락을 맡아야 한다. 꼭…."
"아니, 지금 그런 이상한 소리할 때가 아니에요! 엘리스를 어떻게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요!"
"진정해라. 우리 딸. 이미 정해진 걸 뒤집을 순 없어. 엘리스가 원한 일이니까."
"엘리스가요?"
"그래. 너도 같이 잘해보자. 엘리스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 알겠습니다."
이미 이 사람은 글렀구나.
엘리스를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려 하다니.
아이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길드장실을 빠져나왔다.
- 크흡. 엘리스. 안된다. 안돼…. 하지만 혼인 신고를 하려면 날 이겨야….
뒤에서 들리는 아이작의 혼잣말을 무시하며 길드장실을 나온 아이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엘리스가 원했다고?'
실전은 위험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언니의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해… 엘리스."
적어도 몇년은 괜찮을 줄 알았다.
선천적 마력 장애도 있고, 어릴 때부터 실전이 무섭다는 인식을 심어줬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인지 같이 동참하던 아버지도 엘리스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선천적 마력 장애는 고쳐지고 있질않나, 실전까지 투입된다니.
엘리스를 온실의 화초로 만들려는 아이린의 계획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응. 안녕."
아이린은 지나가는 길드원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업무실로 향했다.
덜컥-
1팀장 업무실에 돌아온 아이린은, 문을 잠그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전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보며 다리를 꼬았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라인과 섹시한 각선미.
작지 않지만 과하지도 않은 가슴. 매력 있는 쇄골과 새하얀 목덜미.
완벽한 자신의 몸을 보며 아이린은 서랍에 있는 곰 인형을 꺼냈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인형은, 유치원에 다니던 엘리스에게서 뺏은 것이다.
아이린은 귀여운 동생을 생각하며 곰 인형을 꾸욱 끌어안았다.
곰 인형을 끌어안자 치밀어올랐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당연히 그녀의 냄새는 완전히 지워졌지만, 엘리스가 소중히 간직하던 그 감정만은 남아있다.
엘리스는 역시 우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 엘리스에게 뺏을 소중한 물건이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엘리스는 취미보다 자기 개발에 힘쓰기 시작했으니까.
"하아… 내 동생. 사랑스러운 동생. 어쩌면 좋아."
열심히 보호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역시 그 남자 때문일까.
"이호연…."
엘리스의 성격이 바뀐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밖에 없다.
심지어 선천적 마나 장애를 고치는 것도 그 남자였다.
동생의 유일한 오점까지 사라지면…
"흐으응…."
아이린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때는 과연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완성될까.
"역시 안돼. 응. 절대 안돼…."
엘리스는 남에게 절대 줄 수 없다.
영원히.
*
아이작을 만나고 이틀.
나는 아직도 숙소에 처박혀있었다.
- 나 : 그래? 철혈 길드도 꽤 힘든 모양이네.
- 남다은 : 응. 하지만 호연이보단 편할 거야. 타지에서 고새하니까.
- 남다은 : '고새하니까' > '고생하니까.' 오타야.
- 나 : 어, 응. 조금 힘들긴 한데. 버틸만해. 조금 이따 연락할게.
나는 귀여운 남다은과 메시지를 끝냈다.
저 쪽에서는 모두 고생하는 거 같은데, 나는 이틀 내내 놀아서 양심이 찔렸거든.
스마트 워치를 끄고는 다시 릴리아나의 몸에 달라붙었다.
양심의 가책을 지울 때는 역시 가슴이지.
"맛있당. 역시 프랑스는 빵이구나."
옴뇸뇸.
내 품에 안긴 릴리아나는 양 손에 도넛을 들고 햄스터처럼 베어먹었다.
"그래그래. 많이 먹어."
나는 릴리아나의 등에 배를 딱 붙이고 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스킨십이라도 해야지.
릴리아나의 몸은 언제 만져도 질리지가 않거든.
주물주물-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호연님."
스칼렛이 약간 혐오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별로 상처는 아니었다.
이런 모습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뭐.
"스칼렛. 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야?"
"추적팀은 테러가 일어나야 나가는 거니까요."
스칼렛의 말대로였다.
아이작과 담판을 지어서 엘리스를 추적팀에 넣은 건 좋다. 그 덕분에 엘리스랑도 더 친해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지금까지 테러가 일어나질 않으니 하루종일 대기를 해야 했다.
"흐음… 그렇긴한데 아쉽네."
"혹시 프랑스에 테러가 발생하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스칼렛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얘는 왜 날 쓰레기로 만들려고 하는거야.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할 게 없다는 거지. 뭐라도 시켜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건의해보겠습니다. 호연 님이 아이리스 길드의 잡무라도 돕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고요."
"… 굳이 그럴 필요는 없긴 해. 너도 귀찮잖아. 그치?"
테러가 일어나서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닌데… 굳이 또 다른 일을 찾을 필요는 없잖아.
그냥 이러고 있는 게 편하다.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테러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곧 일어나겠지.
"그럼 엘리스 아가씨라도 한 번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도 똑같은 상황일 텐데요."
"음, 그럴까?"
스칼렛이 좋은 의견을 내왔다.
요새 너무 놀긴 했지.
혼자 마법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장이 있는 게 아니라서 만족스럽진 않았다.
훈련장을 쓰게 해달라고 할까 했는데, 그러기엔 시설이 빈약했다.
아마 대부분의 길드원이 외부에서 업무를 해서 그렇겠지.
결국 할 게 없어서 열심히 놀러다녔다.
한국에 있는 애들하고 연락도 하고, 릴리아나랑 맛짐 탐방도 했다.
스칼렛과 쇼핑을 가서 선물로 줄 기념품도 골랐다.
그렇게 놀았는데도 정작 소식이 없어서 조금 지루했던 참이었다.
엘리스라도 만나러 갈까.
"그러지 말고 나랑 놀아!"
"너랑은 계속 놀았잖아. 엊그제는 맛집 탐방했고, 어제는 쇼핑했잖아."
"더 놀아줘! 더!"
"야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봐."
"우웅. 아니면 오늘은 낮부터…?"
내게 달라붙은 릴리아나가 목덜미를 쪽쪽 빨려고 하던 그때.
똑똑똑-
이틀 내내 조용하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릴리아나. 숨어."
"히, 히익."
침대로 뛰어간 릴리아나는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침대 구석으로 굴러갔다.
저건 뭐 머리만 숨기는 타조도 아니고.
저런다고 숨어질까 싶지만, 어차피 방까지 들어오진 않겠지.
"네. 누구세요-!"
드디어 좋은 소식, 아니. 나쁜 소식이 온건가?
문을 열자 내가 예상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서있었다.
살짝 웨이브 진 금발에 본적 없는 머리핀.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준 것 같은 화려한 원피스와 귀여운 핸드백.
본 적 없는 엘리스의 사복차림이었다.
"… 그냥 뭐하나 해서. 놀러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