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7 307화. 아이리스 길드로 (5)
엘리스는 오랜만에 본가의 침대에 몸을 맡겼다.
한국에도 좋은 침대가 있지만, 20년간 써온 이 침대가 자신에게는 제일 잘 맞았다.
"후으읏…."
푹신한 침대와 몸을 비비며 하품을 한 엘리스는 이불을 꾸욱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면의 감촉이 몸에 닿는 건 언제나 기분좋았다.
그녀에겐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여전했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걸 탐내는 성격은 어릴 때와 그대로였고,툭툭 던지는 기분 나쁜 말도 똑같았다.
이호연도 문제였다.
엘리스는 이호연이 한 말을 떠올렸다.
- 아무얘기도안했어.그냥켄타우로스에대한얘기정도?널많이걱정하시더라.
언니도 여전히 내가 켄타우로스 추적조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거다.
분명 아빠와 마찬가지로 안전이니 뭐니 하면서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려 하겠지.
"아, 아악… 싫어."
엘리스는 머리를 쥐어 잡고 고개를 빙빙 돌렸다.
이호연이 아이리스 길드에 오면 뭐든 해결될 줄 알았는데 답답함만 늘어났다.
하필 자신이 잠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언니와 만나다니.
"…."
켄타우로스 작전에 함께하고 싶다는 말.
어릴 적부터 과보호를 당한 탓일까, 아빠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첫 실전이 약간은 두렵기도 하고.
엘리스는 성인인데도 실전 경험이 없었고, 늦춰지다보니 그녀는 첫 실전에 대해 두려움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그걸 극복하고 싶었지만….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 못 믿겠으면 너도 따라올래?
엘리스는 프랑스에 오기 전 이호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너도 아빠의 품을 떠나서 가보고 싶다며. 안전하면 너도 추적조에 같이 가도 되잖아.
- 좋은 경험 하게 될 테니까 미리 고마워해도 돼.
그녀와 다르게 자신감에 차 있던 그 모습.
짧은 대화였지만, 물론 분명 자신도 데려가 준다고 말했었지.
인사치레인 걸 알아도 괜히 기대하게 된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데. 하아."
엘리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대를 지웠다.
안 될 걸 기대해봤자 더 짜증 날 뿐.
"바람둥이…."
엘리스는 머리에 맴도는 남자의 얼굴을 억지로 지워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수요일.
아이리스 길드에 온 지 이틀 차 아침이다.
어젯밤에는 스칼렛과 릴리아나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었는데, 확실히 프랑스 음식이 맛있긴 했다.
릴리아나도 호평이었고, 나도 만족했다.
다음엔 단둘이 나가봐야지.
똑똑-
"네. 누구세요?"
아침부터 릴리아나의 몸을 만지며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스칼렛이 서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호연 님."
"응. 무슨 일이야? 스칼렛."
"길드장님 보러 가셔야죠. 엘리스 아가씨도 기다리고 있어요."
"아… 맞네. 잠시만."
우리 놀러 온 게 아니었지.
나는 재빨리 옷을 챙겨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침대에 쓰러져 자고 있던 릴리아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으, 으어… 주인님. 아침부터…."
"그런 거 아니니까 일어나봐. 우리 나가야 해."
어제밤에 맛있는 거 먹고 신나서 너무 괴롭혔나.
릴리아나는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야. 자도 되니까 일단은 목걸이로 변해봐. 바로 나가야 해."
"이이익…."
퍼엉-
릴리아나는 연기에 휩쌓이며 붉은 보석이 박힌 크롬하츠 목걸이로 변했다.
난 빠르게 세수를 하고 떡진 머리를 정리한 후에, 목에 릴리아나를 걸고 문을 열었다.
"가자. 스칼렛."
"오늘 아침에도 순식간에 달라지셨네요."
"한 두 번 보는 거 아니잖아."
"이쪽으로 오시죠."
*
"미안 조금 늦었지?"
나는 밖에서 기다리던 엘리스를 만났다.
"괜찮아. 급하게 찾아온 것 치곤 빨리 왔네. 가자."
"길드장님 오신 거야?"
"응. 오자마자 나를 보겠다고 해서, 겸사겸사 너도 데려가려고. 내가 없으면 너한테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오. 배려 고맙다. 사실 혼자 만나는 건 좀 무섭거든."
그 아저씨 첫 만남 때 기억이 워낙 생생해야지.
얼마나 무서웠는데.
"긴장하지 말고, 가자."
엘리스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난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정작 자기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
긴장하지 말라고 말하는 엘리스가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라 긴장한 걸까.
나는 뒤에서 기다리는 스칼렛에게 인사를 한 뒤에 엘리스의 뒤를 따라갔다.
어제 돌아다니느라 대충 구조를 익힌 길드를 걷다 보니 금방 길드장실에 도착했고, 우리는 허락을 맡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엘리… 뭐야. 너는 왜 같이 왔어."
"…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이자 엘리스의 아버지인 아이작.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잘생긴 외모의 그는 날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꾸벅.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고, 엘리스가 나 대신 대답했다.
"아빠가 호연이한테 이상한 짓 할까 봐 감시하려고 같이 왔어."
"엘리스. 나름대로 능력은 있는 놈이지만 아직 완전히 인정받긴 멀었어. 적어도 내 시험을 3개는 더 통과해야…."
엘리스는 길드장 실이 익숙한 듯 내게 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아."
"아, 땡큐."
우리는 혼잣말을 하는 아이작을 내버려 둔 채 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은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엘리스를 쳐다보다가, 헛기침을 한 후에 날 보며 입을 열었다.
"큼. 일단 아이리스 길드에 온 걸 환영한다. 어제는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길드원들에게 환영을 잘 받았거든요."
"그렇지? 길드원들이 한국을 워낙 좋아해서 말이야.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항상 그러고 있단 말이야. 아, 혹시라도 아이리스 길드에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
아이작은 날 보며 흐뭇하게 웃었고, 엘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하아. 하고 한숨을 쉬더니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한참 길드 자랑을 하던 아이작은 몇 분 후에 정신을 차렸는지 손뼉을 쳤다.
"아. 너무 다른 얘기로 샜네.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면, 켄타우로스를 보고 싶다고 했었지?"
"네. 맞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 될 건 없지. 그렇게 진행하자. 다음 켄타우로스 추적조에 널 끼워주마."
"… 엘리스도 데려갈 수 있을까요?"
나는 잊지 않고 엘리스를 언급했다.
이왕이면 데려가서 경험을 쌓게 해줘야지.
엘리스는 갑자기 나온 자신의 이름 때문에 당황한 듯 날 바라봤다.
"엘리스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침 같이 현장 체험을 하기로 온거니까."
"… 아빠. 정말로?"
"그래. 너도 실전 경험을 쌓을 때가 됐어."
엘리스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표정을 숨기려했지만, 결국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첫 실전이라는 말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허락하는 아이작을 보며 어제 아이린이 한 말을 되새겼다.
- 아버지는 엘리스 때문에라도 대충 끼워주는 척만 할 거야. 켄타우로스 추적조는 굉장히 위험하거든.
'딱 그대로네.'
물론 엘리스가 먼저 말하진 않았지만, 아이작의 의도는 맞춘 것 같다.
저 딸바보 아저씨가 엘리스에게 먼저 위험한 일을 권유할 리가 없으니까.
다행이라면 이미 생각해놓은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엘리스한테 좋은 경험을 해주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터트렸는데 안 데려갈 순 없잖아.
"길드장님."
"어. 왜?"
아이작은 아직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갈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나는 그대로 폭탄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사실 제게 켄타우로스를 무조건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 무슨 소리지?"
"켄타우로스가 사라질 때 생기는 음침하고 어두운 마력. 저와 임솔 교수님이 같이 분석해서 결과를 도출했거든요. 이제야 말씀드리는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난 양심에 찔리는 것 하나 없이 임솔 교수님을 팔아먹었다.
나도 천재 마법사라고 꽤 유명해지고 있지만, 아직 임솔 교수님의 이름값에 미치진 못했다.
사제관계 좋은 게 뭐 있어. 이럴 때 쓰는거지.
어차피 교수님은 폐관 수련 중이라 확인할 방법도 없고.
나중에 들켜도 혼나진 않을거다. 아마도.
아이작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눈을 크게 떴고, 엘리스는 내 팔을 붙잡고 귀에 속삭였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임솔 교수님이랑 같이 연구하다니?"
"미안. 비밀로 하려 했는데,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걸 왜…."
"왜 그런 사실을 지금 말하는 거지? 미리 말했다면 충분히 대우해줬을 것이고, 소원권은 다른 곳에 써도 됐을 거다."
아이작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행히 옆에 엘리스가 있어서 그런지 화를 내진 않네.
아이작이 말한 건 당연한 의문이다.
물론, 당연한 의문이기에 생각도 다 해놨다.
"처음에는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니까요.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 능력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오늘 지켜보니… 제대로 된 추적팀에 끼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제 목적이랑 다르거든요."
"너,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엘리스. 길드장님이 널 진짜 위험한 곳에 데려갈 리가 없잖아. 들뜨지 말고 진정해. 같이 좋은 경험 하기로 했던 거 잊었어?"
"…!"
엘리스는 옆에서 놀란 듯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차분하게 아이작의 눈을 바라봤다.
아이작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리 오래 보진 않았지만, 길드장님은 엘리스를 참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켄타우로스 추적조 같은 위험한 장소에서 딸의 첫 실전을 보낼 분은 아닌 것 같거든요."
"… 아빠?"
내가 믿는 건 두 가지.
내 능력과 옆에 있는 엘리스.
나는 엘리스의 장애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아이리스 길드가 영입하고 싶어 하는 인재다.
조금 까분다고 쉽게 내칠 순 없겠지.
게다가 엘리스도 첫 실전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이상함을 느꼈을 거다.
자신의 아버지가 딸의 첫 실전을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리가 없지.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아이작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 맞아. 생각해보니 이상해. 지금까지 위험한 곳에 절대 보내지 않았잖아. 켄타우로스는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날 데려간다고?"
"그런 게 아니란다. 우리 딸. 너희가 처음 같이하는 첫 추적인 만큼, 조금 더 안전하게 하려 했을 뿐이야. 딱히 속이려는 건 아니었어. 이호연. 네가 정 원한다면 제대로 된 추적조에도 포함시켜 주마. 그건 네 선택이니까. 하지만 엘리스는 아직이야."
"…."
아이작은 진실에 거짓을 섞은 말로 엘리스를 설득한 후에 날 바라봤다.
이제 뭐 어쩔꺼냐. 라는 눈빛이다.
'나는 할 말 다 했는데.'
내 옆의 엘리스는 입을 우물쭈물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자신감이 부족한 걸까.
이렇게 깔아줬는데 받아먹질 않네.
'뭐, 마지막까지 이미지 쌓을 기회를 주면 나야 고맙지.'
나는 엘리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엘리스는 놀란듯 내 얼굴을 바라봤고, 나는 아이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저는 제대로 된 추적조에 엘리스도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