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4화 (294/648)

EP.294 294화. 요리 수업!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마당 밖에서 진짜 새 소리가 들리더라.

창문 밖을 보니 우리 집은 아니고, 바로 옆에 있는 엘리스의 저택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어제 분명 남다은을 끌어안고 잤는데, 옆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아으. 피곤해."

기지개를 피며 방 밖으로 나오니 향긋한 커피 향이 풍겼다.

거실 테이블에 앉은 남다은이었다.

"좋은 아침."

"응. 잘 잤어?"

언제나의 아침처럼 남다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좁은 기숙사든 넓은 집이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흐어어…."

곧 방에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릴리아나도 튀어나왔다.

어제 부끄러워했던 건 벌써 잊은 건지 하품을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저래 보여도 청결은 잘 챙기는 애니까.

멍하니 소파에 앉아 릴리아나를 보다가 남다은에게 말을 걸었다.

"으, 월요일은 항상 싫다니까."

"그래도 오늘은 편하잖아?"

홀짝-

나는 커피를 마시는 남다은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월요일이 편할 수가 있나?

"뭐가 편해?"

"아카데미에서 보낸 단체 메시지 못 봤어?"

"단체 메시지?"

"응. 단축 수업 한다고 했잖아."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쌓여있는 메시지들.

히로인에게 오는 메시지가 아니면 알람을 꺼놨더니 이런 상태였다.

대체 어디서 퍼졌는지 내 번호가 유출돼서 인터뷰 요청부터 광고 촬영, 길드 영입 문자 같은 쓸데없는 연락이 너무 많이 온다.

"진짜네?"

정말로 단축 수업을 알리는 메시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번호를 바꾸고 알람은 켜놓던지 해야겠네.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겠어.

"응?"

짧아진 수업에 기뻐하고 있을 때.

맨 위에서 빛나고 있는 메시지가 보였다.

임솔 교수님의 메시지다.

잠에 빠져있던 새벽에 메시지를 보낸 탓에 이제야 발견했다.

- 임솔 교수님 : 미안. 당분간 연락 못 해. 많이 바ㅃ,ㅡㄹ것같ㅇㅏ

"…?"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꼼꼼한 교수님이 이런 오타까지 낸 거지.

전화나 메시지라도 해볼까 했는데… 바쁘다니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프랑스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가려 했으니 그때 직접 물어봐야지.

"그나저나 나 없을 때 일주일간 너랑 다희는 어떻게 등교할 거야?"

이 집의 계약을 내 이름으로 했으니 언젠가 내 소유라는 건 들킬 거다.

하지만 남다은과 같이 산다는 것까지 들키면 너무 귀찮아지는데.

"그건 제가 생각해놓은 바가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스칼렛이 걸어왔다.

*

남다은의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스칼렛이 엘리스의 집에서 쓰던 마법 도구를 알려줬거든.

이게 있으면 들어갈 때나 나갈 때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효과가 집 주변까지 퍼져서 이것만 있으면 쉬울 거라고.

이런 좋은 마법 도구가 있었구나.

크기가 커서 기숙사에서는 못 썼겠지만, 우리 집은 남는 게 마당이었으니 거기 대충 던져놨다.

"세상 참 좋아."

"호연 씨,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허무하게."

수업 때마다 옆자리를 지키는 루미와 루시 쌍둥이.

귀여운 쌍둥이들과도 일주일간 작별이다.

"너희는 철혈 길드 실습이라고 하지 않았어?"

"웅. 그랬었지."

"이야, 역시 잘나가네."

철혈 길드는 1학년생도 중에서도 상위권 들에만 연락을 보냈다. 루시와 루미도 이제 꽤 강해졌다는 뜻이다.

"호연 씨는 아이리스 길드라고 하셨죠… 외국이면 일주일이나 못 보겠네요."

"어쩔 수 없어. 루미. 이호연한테도 좋은 기회일 거야."

"…."

루미는 시무룩해졌고, 루시는 그런 루미를 다독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둘을 보니 미안함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내게 중요한 기회였거든.

루미를 토닥이던 루시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가기 전에 인사는 하고 갈 거지? 동아리방에서."

"저, 저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 당연하지."

어차피 히로인들은 한 번씩 다 만나야 한다.

일주일이나 못 만나는데, 당연히 인사는 하고 가야지.

… 그 인사가 얼마나 진할지는 모르겠지만.

*

오전 수업은 요리 시간.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의외로 던전 같은 곳에 가면 필요한 능력치라고 한다.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던전이나 게이트 원정에서는, 요리보다 재료를 챙겨가는 경우가 많다.

아공간 아티팩트 중에서는 시간을 고정해주는 아티팩트도 많지만, 던전 중에는 아티팩트를 무효화하는 곳도 있다. 자연스럽게 보관이 오래가는 재료들을 챙겨가 단순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편이다.

물론 엘리스 같은 사람한테는 필요 없는 수업이라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정규 수업에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모든 생도가 눈앞의 재료들을 보며 요리를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진지한 수업은 아니었다.

앞에 있던 초청 요리사도 실습에 나가기 전에 마음 편하게 쉬라는 듯 말했으니, 대부분은 장난스럽게 임했다.

의외로 고평가를 받은 건 남다은.

맛있어 보이는 스튜를 만들었는데, 수업 주제에 제일 잘 맞으면서 색깔도 고운 게 군침이 도는 비주얼이었다.

"… 다은 생도는 대단하네요. 좋은 신부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예전 세상의 때가 빠지지 않은 내 기준에서는 엄청난 성차별 발언인데, 다행히 이쪽 세계에서는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여자든 남자든 차별 없이 죽어 나가는 세계였으니 내 기준과는 다른 거겠지.

역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데, 성장 배경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 뒤에는 새까맣게 탄 머핀을 손에 올린 채 멍하니 바라보는 엘리스의 모습도 보였다.

저건 모르는 척해주자.

한편 내 주변의 남자 생도들은 대부분 개고생 중이었다.

"이호연 씨는 요리도 잘하시나?"

"아쉽게도 그건 아니네."

아예 요리를 포기한 김영한은 내게 다가와서 장난을 걸었다.

나는 적당히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원래 이런 장르의 남자 주인공은 요리도 잘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런 특전은 없거든.

그래도 자취 경력이 있으니 단순한 김치찌개 정도는 할 수 있다.

"… 색이 많이 진한 거 같은데, 잘 한 거 맞냐?"

"한 입 먹어볼래?"

"그 말을 기다렸어."

혹시 조리 과정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김영한을 기미 상궁으로 썼다.

히로인이나 내가 먹기 전에 테스트해봐야지.

국자로 그릇에 덜어낸 김영한은 고기 한 점까지 푸짐하게 한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먹을만하지?"

내가 자취 경력이 얼만데.

김치찌개는 못 끓일 수가 없는 음식이거든.

김치 넣고 고기 넣고 야채 넣고 물 넣고 팔팔팔.

얼마나 쉬워.

김영한은 찌개를 음미한 후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요리 더럽게 못 한다."

"… 그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숟가락으로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아닌데. 그냥저냥 먹을만한데….

"호연씨. 저, 저도 먹어봐도 될까요."

그때 우울해하는 날 보며 루미가 다가왔다.

"당연하지. 네가 제대로 평가 좀 해줘. 루미."

그래.

김영한같이 질투에 눈이 멀은 남자가 내 찌개 맛을 공정하게 평가할 리가 없지.

우리 루미가 제대로 평가해줄거다.

"흡…."

꿀꺽.

"마, 맛있어요…."

루미는 눈을 떨며 김치찌개를 삼켰다.

"…아니, 그 정도야?"

한 명은 몰라도 두 명이 저러면 진짜 자신감이 떨어지는데.

"줘봐. 나도 먹어볼래."

표정이 점점 굳는 루미를 보고 루시가 다가왔다.

"네가 마지막 희망이다. 루시."

냠.

찌개를 입에 넣은 루시는, 슬쩍 눈을 돌려 내 눈치를 살폈다.

"음, 음…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

"그냥 그만하자."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요리를 할 이유가 어딨어.

남이 해주면 되는 거잖아.

예를 들면 좋은 신부가 될 거라는 남다은.

그래, 다은이가 해주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시끌시끌한 교실을 가로질러 내게 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교수님에게 칭찬받았어. 한 입 먹을래?"

"…? 어, 응."

어느새 내 앞에 선 남다은은 자연스럽게, 내 그릇에 스튜를 담아줬다.

마치 집에서나 보여주던 다정한 모습이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다은이 준 스튜를 받고 입에 넣었다.

먹음직스러운 향과 감칠맛이 가득한 스튜. 중간중간 씹히는 식감은 보존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냠냠.

"… 진짜 맛있네."

이 스튜에 비하면 내 김치찌개는 쓰레기가 맞구나.

"다행이다. 네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넣었거든."

내 칭찬에 만족한 듯 웃은 남다은은 스튜를 챙겨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하게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남다은이랑 저렇게 친했어? 신기하네."

주변의 다른 생도들은 수군대며 이 쪽을 보고 있었고, 그나마 나와 친분이 있는 김영한만이 직설적으로 말해왔다.

"… 응. 나름대로."

"나름대로가 아닌 거 같은데."

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서 뭐라 대답할 순 없었다.

여기서 친한 척은 안 하기로 했으면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100 ] ( + 0.9 )

- [ 성욕 : 7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역시 민폐였을까… 하지만 남들 앞에서 나도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

"…."

나는 남다은의 상태창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미리 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했구나. 다은아.

어제 너무 열심히 박아줘서 그런 걸까.

남다은도 가끔은 평정심을 잃는 모양이다.

시야의 구석에는 엘리스가 이쪽을 꺼림칙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스에게 동거 사실을 말한 이후라서 저 시선도 왠지 신경 쓰인다.

"이호연! 내, 내 것도 먹어!"

"제 것도 먹어주세요…."

루시와 루미는 내게 스튜를 주고 간 남다은을 보며 눈을 끔뻑거리다가, 손을 벌벌 떨면서 내게 음식을 내밀었다.

비주얼부터 남다은의 것에 비해선 많이 빈약한 모습이라 그런지 자신감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내 김치찌개에 비하면 다 맛있었다.

"…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꽤 놀랄 정도로.

이제 보니까 내 김치찌개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음식이 너무 맛있는 거였구나.

"그래? 다행이다…. 근데 남다은이랑 언제 저렇게 친했어?"

"제 볶음밥을 먼저 먹였어야 했는데…."

"… 그건 나중에 말하자."

나는 달라붙는 쌍둥이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언제? 점심시간?"

하지만 루시는 포기하지 않고 내 팔을 붙잡았다.

"… 아니. 나 점심시간에는 일이 있잖아."

"양호실이요?"

"응. 양호실 갔다 와서 꼭 보자."

"알겠어요."

다행히 루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미의 반응을 보고 루시도 내 팔을 놔줬다.

"그럼 동아리 방에서 기다릴 테니까… 꼭 와야 해."

"저도 호연 씨 올 때 까지 숨 참을거에요. 흡."

루시는 조심스럽게 날 올려다봤고, 루미는 귀엽게 주먹을 쥐고 볼을 부풀렸다.

"걱정하지 마. 무조건 갈게."

나는 귀여운 애교에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만든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할 일이 많다.

점심 시간에 밥 먹을 시간도 아까우니, 이걸로 떼워야지.

11